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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20일 목요일[(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2월 20일 목요일[(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1(30),3-4 참조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9,1-13
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5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7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2(101),16-18.19-21.29와 22-23(◎ 20ㄴ)
◎ 주님은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라.
○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 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
○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
○ “당신 종들의 자손은 편안히 살아가고, 그 후손은 당신 앞에 굳게 서 있으리이다.” 주님이 시온에서 당신 이름을, 예루살렘에서 당신 찬양을 전하시리라. 그때에 백성들과 나라들이, 주님을 섬기러 모여들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표징(sign)과 상징(symbol)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교통 신호등, 결혼반지, 국기 등은 모두 특정한 의미를 지닌 표징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징을 주셨을까요? 오늘 저는 구약의 무지개와 신약의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과 사랑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창세기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첫 번째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라고 말씀하시며 무지개를 그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무지개는 하늘에서 바라볼 뿐, 그것을 통해 직접적인 생명의 은총을 받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표징을 통해 하느님의 언약이 완성될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표징을 주시는 장면을 듣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축복하신 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어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기념의 표징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무지개와는 달리, 단순한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표징입니다.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는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성체가 몹시 고프답니다.” 당시 최인호는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최인호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감실(龕室)’이 됩니다. 우리는 최초의 감실이었던 성모님처럼 순명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하느님과 노아입니다. 표징의 형태는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입니다. 언약의 성격은 홍수로 멸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신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예수님과 모든 인류입니다. 연약의 형태는 빵과 포도주입니다. 연약의 성격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미사를 통해서 지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외적인 표징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내적인 은총의 표징입니다. 무지개는 인간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가 직접 받아 모시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묵상하며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표징이라면,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언약을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긴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난의 잔, 십자가, 나눔, 희생을 통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너의 신앙고백을 너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앙고백은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다.” 참된 신앙인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복음마르 8,27-33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극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묵상도 은혜롭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에 대한 묵상도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꼭 저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그리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 보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분위기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수제자 직분까지 맡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의 강도가 엄청납니다.

화들짝 놀랄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 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지속적으로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르 8,29)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알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 말과 ‘명백히’(행전;담대히,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 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담대히)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신변 안전과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일니다. 

비록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담대히 걷게 하소서.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19.연중 제6주간 수요일                                                          창세8,6-13.20-22 마르8,22-26

                                                           개안(開眼)의 여정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개안뿐이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116,17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십니다.

상징하는 바, 참 깊고 오묘합니다.

점차 눈이 열려 좋아지는 시력은 그대로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그동안 참 많이 강조했던 ‘마음의 병’이 무지였습니다.

마음을 눈멀게 하는 마음의 치명적 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바로 무지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우리를 눈멀게 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눈뜬 맹인들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따라 보는 눈이요 마음따라 듣는 귀입니다.

마음의 눈, 심안이 날로 좋아져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색맹, 문맹, 맹신, 맹목...모두 눈멀 맹자가 들어갑니다.

분별이 불가능하니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온갖 불행의 원인은 무지의 눈멈에 기인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은 배움의 여정과 함께 가는 지혜와 자유를 보여줍니다.

역시 개안의 여정에 끊이없는 배움이 좋은 도움이 됩니다. 

 

“배움에도 용기가 필요하듯, 용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무모한 용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어지럽힌다.”<다산>

 

눈먼 무지의 무모한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을 어지럽히는지 작금의 현실이 증명합니다.

정말 편견, 맹신등 무지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래서 날로 지혜로워지는 배움의 여정을, 진리탐구 여정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맨몸으로 범을 잡고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 않는다는 자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계획을 잘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논어>

 

맹목의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현실주의적 현자 공자의 지혜로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사실 공부의 목적도 무지의 눈을 밝히는 개안에 있음을 봅니다.

회개와 깨달음의 여정 역시 날로 밝아지는 심안을 말해줍니다.

과연 날로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에 날로 좋아지는 영적 시력인지요?

육안은 어둬져도 심안은, 영안은 날로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성장에 도약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라기 보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이치만 봐도 분명합니다.

점차적인 과정중 성장이요 성숙이듯 개안의 영적 현실도 그러합니다.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눈먼이에 대한 치유는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맹인이 예수님께 치유되어 점차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이 좋아지는 경우는

바로 세례후 점차 좋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세례성사로 무지의 눈이 열린후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 고백성사가 개안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창세기 홍수가 그친후 노아의 이야기 역시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의 상징이었습니다.

방주안에서 물로부터 구원받은 노아는 즉시 지상의 표면을 걷지 않고 점차적인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

때가 되자 물이 마른후 비로소 지상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세례의 물로 구원받은 우리 역시 하느님이 만든 동터오는 새벽의 새날을 신뢰로서 걷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평생 한결같이, 끊임없이,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성공적 개안의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후반부 노아의 봉헌제사시 봉헌의 향내를 맡으며 하신 주님의 다짐이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얼마나 주님의 자비롭고 섬세한 배려의 사랑인지요!

주님은 인간의 내적 악의 현실을 이해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잘 살아보라고 선물처럼 주시는 삶의 기회들입니다.

자연리듬, 계절의 자연스런 흐름처럼 무리하지 않고 순리대로 살면서 공동의 집인 지구를

잘 관리해야할 막중한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지요?

무분별한 탐욕으로 지구 자원의 오용과 남용으로 인해 섬세한 균형과 조화는 깨지고 기후위기등

지구의 병도 날로 깊어져 가는 위중한 상황입니다.

개안의 여정에 필히 생태적 회개의 여정이 함께 가야함을 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자연리듬, 자연의 흐름에 따라

순리의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나누면서, 동시에 적게 쓰고 적게 먹고 적게 활동하면서

관상적 지혜의 내적 삶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참 좋은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1,17-18). 아멘.


2/20(목) [(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참된 신앙인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조재형 신부)

 

2.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 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담대히 걷게 하소서.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영적성장에 도약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라기 보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이치만 봐도 분명합니다.

점차적인 과정중 성장이요 성숙이듯 개안의 영적 현실도 그러합니다.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눈먼이에 대한 치유는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맹인이 예수님께 치유되어 점차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이 좋아지는 경우는

바로 세례후 점차 좋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이수철 신부)

 

2/20(목) [(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담대히 걷게 하소서.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0일(목) 6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