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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3월 7일 금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3월 7일 금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0(29),11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본기도

주님,
저희가 시작한 참회의 생활을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육신으로 닦는 이 재계를 성실한 마음으로 완수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1(50),3-4.5-6ㄱㄴ.18-19(◎ 19ㄴㄷ)
◎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아모 5,14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사순 시기의 재계를 지키며 이 제사를 봉헌하오니
저희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주시고
극기를 실천하는 꿋꿋한 힘을 저희에게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25(24),4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이 사랑의 영약으로 모든 죄의 상처를 낫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이 백성이 언제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며
지난 삶을 뉘우치오니
이 세상 순례를 마치고 영원토록 주님을 뵈옵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언론과 방송을 배울 때입니다. 현명한 독자는 주어지는 정보의 행간과 문맥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행간은 단순한 글의 의미뿐만 아니라, 글 속에 직접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의미나 의도를 뜻합니다. 문맥은 어떤 단어나 문장이 쓰인 전체적인 분위기나 맥락을 가리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글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향하는 달을 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단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단식은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식은 음식을 끊거나 절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단식은 단순히 배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행위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우리는 단식의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배척하고 외면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들을 단속하고 추방하는 정책이 강화되었습니다. 법적으로만 보면 그들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었으니 단속하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땅을 찾았을까요? 기근과 전쟁, 가난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듯이, 우리는 이들의 행간을 읽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앞세우며 형식적인 신앙을 강조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한다."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시간 음식을 끊고 기도한다고 해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한다면 그 단식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단식이란 내 배를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난민과 이민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입니다. 둘째,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불의한 법과 제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들이 불법을 저질렀으니 당연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셋째, 마음을 새롭게 하는 단식을 해야 합니다. 단식은 단순한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단식을 통해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형식의 단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정의를 실천하는 단식을 할 것인가? 우리는 법과 제도의 문맥만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억눌린 이들의 행간을 읽으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단식입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단식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실천할 수 있는 단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내일 할 단식이 단순한 음식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단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나으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마태 9,14-15

 

더 이상 슬퍼하고 통곡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구약 시대를 종결짓는 동시에 신약시대를 활짝 여신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이 풍기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강렬한 투사의 이미지입니다.

그는 사악하고 구린 유다 고위층 위선자들과 죄인들의 악행을 강력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신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회개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은 예수님을 꼭 빼닮았습니다.

적대자들의 위협 앞에서도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칭찬이나 격려의 말이 아니라 듣기 싫은 쓴소리를 거침없이 퍼붓는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무고한 죽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서막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례자 요한의 삶은 참으로 씁쓸하고 고독하고 팍팍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느라고 그는 일찌감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라고는 전무한 황량한 장소였습니다.

그저 하늘과 구름, 흙과 먼지만이 전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조용하고 고독한 광야에서 하루 온종일 기도하고 수행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그의 특기는 단식이었습니다. 그의 취미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필살기는 고행이었습니다.

메뚜기나 들 꿀 같은 최소한의 음식과 보기가 민망할 정도의 낙타 털옷을 입고 그야말로 자연인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재미라고는 단1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쇠락과 더불어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나신 메시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가시는 곳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그분은 잔치 초대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얼마나 자주 초대받으셨던지,

설교 말씀 중에 비유를 드실 때, 자주 잔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그분의 삶은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잔치를 좋아하시고 축제를 즐기셨던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는 끝났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고 통곡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대대적인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내내 함께 하시기에 당연히 우리들의 이 세상 여정 역시 지속되는 축제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니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단식해야 할 이유>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과 ‘신랑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단식을 앞세우던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께 따졌고,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62,4-5; 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으며,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 에페 5,23-32).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단식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이는 ‘단식해야 할 이유’와 함께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임을 계시합니다. 

곧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단식으로, 결국 단식은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곧 사랑으로 행하는 단식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

(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6.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신명30,15-20 루카9,22-25

                                                               행복은 선택
                                                    “오늘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40,5ㄱ)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날마다 행복을 선택하여 훈련함으로 행복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수도생활이 그러합니다.
날마다 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해 살도록 일과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좋은 날의 선택입니다.
날마다 설레는 기쁨으로 시작할 수 있는 오늘 하루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예전에 써놓고 좋아하며 나눴던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늘 함께 계시기에”<2023.10.21.>


오늘 옛 현자도 공부중 사람을, 사랑을 먼저 선택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공부는 사람을 깨닫고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그 시작은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논어>
어려운 선택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을 선택하는 공부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12.3계엄 국회측 장순옥 변호사의 최후 변론에서 감동적인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이 세상 풍경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입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2025.2.25>
제자리를 선택하여 제몫을 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때 참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어제 저의 참 좋은 선택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맨먼저 피는 파스카의 봄꽃 영춘화를 선물 받고 즉시 ‘마리아의 집’ 뜨락을 찾았고
연약해 보이는 노란 영춘화를 사진에 담아 복음의 축복을 전하는 마음으로 참 많은 분들에게
많은 시간 할애하여 다음 문자 메시지와 더불어 전송했습니다.


“사순절 재의 수요일 영춘화 봄소식 축복 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형제님”
이런 답글도 받았습니다.
“눈 속에서도 봄의 희망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저 꽃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죽음과 같은 겨울을 통과하여 피어난 생명의 봄꽃, 봄의 전령사 ‘영춘화迎春化’ 꽃이름 그대로
‘파스카의 봄꽃’입니다.
영춘화의 꽃말은 희망, 사모하는 마음, 새해의 첫 출발입니다.
오늘 제1독서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 우렁차게 들립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참 좋은 선택을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려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라면 날마다 오늘 우리의 행복이자 생명이신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여 선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은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후 이어 모세처럼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을 선택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모세의 생명과 축복의 선택이 복음에서 구체화됩니다.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생명과 행복, 구원의 선택입니다.


단숨에 읽히는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자발적 사랑으로 자유로운 주님의 선택이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구체화되는 선택입니다.
하루이틀 따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입니다.
주님 사랑에 나를 버리고 비우고 날마다 내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를,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 마치는 그날 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었어도 그 마음에 찬미와 감사가, 평화와 기쁨이, 믿음과 희망이,
사랑이 없는 공허한 삶이었다면, 또 존엄한 품위를 잃은 삶이었다면 그 인생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생명과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여 잘 따를 수 있도록
결정적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늘 인용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3/7(금)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단식입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단식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실천할 수 있는 단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내일 할 단식이 단순한 음식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단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나으리라.”(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 얼마나 잔치를 좋아하시고 축제를 즐기셨던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는 끝났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고 통곡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대대적인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내내 함께 하시기에 당연히 우리들의 이 세상 여정 역시 지속되는 축제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니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

(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자발적 사랑으로 자유로운 주님의 선택이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구체화되는 선택입니다.
하루이틀 따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입니다.
주님 사랑에 나를 버리고 비우고 날마다 내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를,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 마치는 그날 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3/7(금)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

(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7일(금) 7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