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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3월 8일 토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3월 8일 토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69(68),17 참조
주님, 너그러우신 자애로 저희에게 응답하소서. 주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희를 돌아보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자비로이 굽어살피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의 오른팔로 보호하여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6(85),1-2.3-4.5-6(◎ 11ㄱㄴ)
◎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
○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가련하고 불쌍한 이 몸이옵니다. 제 영혼 지켜 주소서. 당신께 충실한 이 몸,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
○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오니, 주님, 이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

복음 환호송

에제 33,11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화해와 찬미의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해져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9,13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생명의 천상 양식으로 힘을 얻고 비오니
이 세상에서 받아 모신 성체가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거룩한 신비에 참여한 이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어떠한 위험도 겪지 않고
주님의 보호를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세리 레위를 부르심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본당에서는 사순과 대림이 시작되면 성경 쓰기를 권장합니다. 작년에는 로마서를 필사했습니다.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하였고, 저는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선물 선정은 수녀님이 하였습니다. 사순 때는 믹서기를 마련했고, 대림 때는 멸치와 김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사순에는 구약성서 중에 코헬렛,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를 필사하도록 했습니다. 코헬렛은 인간의 삶은 허무하지만, 최선의 삶은 하느님을 믿는 마음 안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토빗기는 좋은 또는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주인공 토빗의 이름을 딴 것으로 삶과 죽음, 건강과 고통, 기쁨과 슬픔 같은 대립된 현실 모두가 결국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딧기는 아시리아 대군의 침략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과부 유딧의 활약에 힘입어 그들에게 맞서 승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을 희망하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그에 합당한 삶의 실천뿐임을 강조합니다. 에스테르기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학살될 위기에서 구원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언급 없이도 섭리와 구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며, 신앙과 용기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도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선물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사순 특강에는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사목하고 있는 신부님이 오십니다. 신부님은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10년 동안 선교사로 사목하였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현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과테말라 현지에서 지내면서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사제가 되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굳이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기름진 밭에서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에서도, 돌밭에서도 땀 흘려 1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보내 주는 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북새통입니다. 납치의 위험도 겪어야 했고, 총을 든 강도도 만났었고, 온 몸이 썩어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라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 루카 5,27-32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복음서를 펼칠 때 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를 해드릴까요?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도 똑같습니다.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속이 많이 상하지? 내가 네 고통, 네 눈물 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

힘들 때 내가 바로 옆에 있음을 잊지 말거라. 내밀고 있는 내 손을 잡거라. 일어서거라.”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위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 한 말씀을 또 던지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애지중지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러니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7.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 마태9,14-15

 

                                                   주님이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참된 단식”

 

일기쓰듯하는 강론입니다.

어제는 제 인생중에 획기적인 날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수도사제생활하다보니 참 부끄럽게도 받는 일에 익숙해졌고 받은 것에

감사함을 거의 잊고 지냈으며 주는 것을 거의 잊고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어제는 봄소식을 전하는 마음으로, 봄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늘 고맙게 생각하던 차에

치과병원에 용기를 내어 소박하고 품위있어 보이는 꽃한다발을 사들고 방문했습니다.

생전 처음이요 제 자신 품격도 높아지는 듯 참 흐뭇했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문득 이런 사랑의 꽃선물이 단식보다 백배는 좋겠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단식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詩같은

 하루

 詩같이

 살자”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꽃같은 삶, 시같은 ‘사랑의 삶’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단식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집회35,6)는 얼마전 말씀이 생각났고, 이웃을 방문하거나 만날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다짐도 새로이 했습니다.

더불어 생각난 것은 결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꽃’이나 ‘시’를 선물하기 위해 꽃다발이나 시집을 살 때는

절대로 값을 깎는 불경不敬을 저질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순간 들었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충고도 좋습니다.

 

“타인의 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감수성은 지식이 아니기에

남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로 나타난다.”<다산>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논어>

 

경청과 어짐의 자세가 바로 참된 단식의 정신일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그럽고 인정이 많으며 슬기롭고 덕이 있다(Generous, humane, wise, and virtuous)’라는

순수한 우리말 ‘어질다’의 뜻도 어감도 참 좋습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단식입니다.

단식을 해서 구원이 아니라 사랑을 많이해서 구원입니다.

단식은 상대적일뿐 절대적 가치는 사랑입니다. 배고픈 이는 먹어야 하고 비만하고 배부른 이는

단식이 필요합니다.

말많이 하는 직업의 사람들은 침묵해야 하고 침묵이 일상화된 독거노인은 말해야 합니다.

단식도 침묵도 상대적 수행일뿐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을 권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하느님만이 아시는 자발적 겸손한 사랑의 단식, 자유롭게 하는 단식을 바라십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할 것이고, 한번뿐인 귀한 혼인잔치 같은 인생!

고해인생이 아닌 행복한 축제인생을 누리시길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슬픔이나 우울, 심각함은 결코 참된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 유우머가 참된 영성의 표집입니다.

왜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드는 지요.

굳이 단식을 하려거든 나팔을 불지말고 마태복음의 예수님 가르침처럼 하느님만 알고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기쁜 마음으로 축제인생 분위기에

추호도 손상을 주지 않도록 함이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예의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된 단식의 정신은 아마도 예수님의 롤모델로 삼으셨을 이사야 예언자가 보여줍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실천이 바로 참된 단식의 진수임을 밝히는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오늘 이사야의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단숨에 읽히는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빠진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우리의 창백한 단식 수행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인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실천이 참된 단식이요 이런 정심으로 사순절을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에 쏟아지는 주님의 축복 말씀이 우리 마음을 환히 밝히며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사랑의 혁명적 예언자이자 신비가요 영성가인 이사야는 불멸의 시인입니다.

이사야의 말씀 전부가 살아 약동하는 시요, 우리를 깨달음과 자유로움으로 이끄는

이런 생명과 빛과 희망이 넘치는 시가 참 좋은 시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살아있는 시인지요!

수천년전 이스라엘의 예언자 시가 시공을 초월하여 역설적 문명의 야만시대에도 그대로 통하니

하느님의 선견지명이 놀랍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 거룩한 사순시기 우리 모두 참된 단식의 정신으로

자유로운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3/8(토)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조재형 신부)

 

2.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슬픔이나 우울, 심각함은 결코 참된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 유우머가 참된 영성의 표집입니다.

왜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드는 지요.

굳이 단식을 하려거든 나팔을 불지말고 마태복음의 예수님 가르침처럼 하느님만 알고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기쁜 마음으로 축제인생 분위기에

추호도 손상을 주지 않도록 함이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예의입니다. (이수철 신부)

 

3/8(토)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8일(토) 4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