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11일(화) 오늘의 글/시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441) 풍운아 허균의 비극 “속된 선비들의 멍청한 짓 비위가 상해 견딜 수 없다” 한글로 쓴 최초의 소설 <홍길동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저자 허균(1569∼1618년)은 홍길동에 가려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허균의 일생은 홍길동보다 더 극적이다. 허균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초당 허엽은 강릉의 토호(土豪)였다. 유명한 초당두부는 바로 허균의 아버지 호에서 유래되었다. 허균의 일생을 뜯어보려면 먼저 그의 역작인 <홍길동전>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양반과 천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로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은 가출한 뒤 신출귀몰, 양반 고관대작을 조롱하며 골탕 먹이는 의적(義賊)이 된다. 허균의 일생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허균은 서자(양민첩 자식)도 아니고 서얼(천민첩 자식)도 아니다. 아버지 허엽이 상처하자 재취로 들어간 부인에게서 태어난 삼남매 가운데 막내다. 서자와 서얼에 대해 조선 유교사회가 얼마나 불합리하게 그들을 배척했는지 가장 분개한 사람이 허균이다. 자신과 누이 허난설헌의 스승이자 둘째 형 허봉의 친구인 이달이 훌륭한 인품과 빼어난 학식에도 단지 서자라는 이유로 등용되지 못하고 변방을 떠도는 현실에 분노한 것이다. 허균은 남이 할 수 없는 독특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필담을 나누고 시(詩)를 지어 주연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조선에 허균밖에 없었다. 이를 시문외교(詩文外交)라 했다. 문장이 출중해야 하고 임기응변의 시작(詩作)에 능해야 하며 가무음곡에도 일가견이 있을 뿐 아니라 주색(酒色)에도 밝은 한량이어야 했다. 허균에게 딱 맞는 임무였다. 명나라 사신들은 허균의 재주와 인간미에 푹 빠져 북경으로 오는 조선 사신에 허균을 콕 찍어 넣도록 조선 조정에 청을 넣었다.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갈 때는 인삼을 가져가 사치품을 사 왔지만, 허균은 인삼을 팔아 몽땅 책을 사 왔다. 허균은 이렇게 구한 <당시선(唐詩選)> <송시선(宋詩選)>을 누이 허난설헌에게 보냈다.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는 조선의 시를 소개해 북경에서 <조선시선(朝鮮詩選)>이 출판되게 했다. 비참하게 죽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도 엮어 <난설헌집>을 북경에서 출판해 명나라 문인들을 놀라게 했고,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시문계를 흔들어놓기도 했다. “나는 남이 틀린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속된 선비들의 멍청한 짓은 비위가 상해 견딜 수 없다.” 허균의 성격이 둥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시문외교로 맹활약한 허균은 전후에 황해도사로 임용됐지만 반년 만에 파직되었다. 그는 첫 임지인 황해도로 떠날 때 수십명의 한양 기생들을 데려가 이들을 위한 관아까지 지었다. 새로운 임지에 발령받으면 수청 기생이 있는데도 한양에서 기녀 한부대를 데려가 기녀들과의 은밀한 잠자리 모습을 적나라하게 글로 써 까발렸다. 당연히 유교사상에 젖어 있는 양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은 성인이 가르친 것이다. 하늘은 성인 위에 있으니 나는 차라리 인륜을 어길지라도 하늘의 뜻에 따르겠다.” 허균은 자유분방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왜군을 무찌른 사명대사·서산대사와 친해 불경을 설파하면서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떠받들던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허균의 슬픔은 가문의 몰락이 시발점이었다. 허균이 열두살 때 경상관찰사였던 아버지 허엽이 객사하고 형 허봉도 유배에서 풀려나 방랑하다가 객사하고 누이 난설헌마저 두 아이를 땅에 묻고 스물여섯에 요절하자 허균은 비참한 현실에 절망한다. 삼척 부사로 갔을 때는 불과 보름 만에 파직당했다. 얼마 후 공주 부사로 갔을 때는 서자들과 어울렸다는 죄목으로 아홉달 만에 파직당한다. 허균은 20여년 관직생활에서 세번 유배당하고 여섯번 파직당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허균은 중용되어 형조참의까지 올랐다. 절대 군주인 왕의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남대문에 불온방이 나붙어 서자들의 모임인 강변칠우(江邊七友)들이 엮이고 그들과 친했던 허균도 대역죄로 잡혀 들어가 능지처참을 당한다. 현재 용인에 있는 허씨네 선산의 허균 묘와 아버지 허엽 묘는 가묘(假墓)로 봉분 속에 시신이 없다. 그때 아버지 허엽의 묘는 부관참시되었다. |

내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나 행복해지고 싶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듯 내 마음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간수할 건 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과 칭찬의 말 등은 간직해도 좋지만 필요도 없는 비난이나 고통의 기억은 쓰레기나 잡동사니 치우듯이 과감히 버리는것입니다. 자기 마음밭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립니다. 버려야 할 쭉정이들을 그대로 쌓아두거나 잘 간수해야 할 알곡들을 미련하게 내버리면서 행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마음밭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 밭을 가꾸는 사람도 자기입니다.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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