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4월 5일 토요일[(자) 사순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저승의 올가미가 나를 휘감았네. 곤경 중에 나 주님을 불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본기도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 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 ◎
○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
○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신 심판자, 하느님은 언제든 진노하시는 분.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화해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어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저희 마음을 자비로이 주님께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는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로 저희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온전히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의 백성을 보살피시고 천상 은총을 풍성히 베푸시어
다가오는 거룩한 신비를 올바로 준비하며
보이는 위로로 도움을 받고
보이지 않는 선을 향하여 달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은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확증편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반대되는 사실이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에 따라 개인, 교회, 국가가 큰 혼란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경험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가족들은 임시로 매장한 후, 나중에 고향 선산으로 이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묘가 무덤 입구 왼쪽에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큰아들만은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의 묘는 오른쪽에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제일 잘 아니까,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다른 가족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큰아들은 확신을 가지고 묘를 이장했는데 나중에 연락이 왔습니다. "이곳에 모셔진 분은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결국, 유족들에게 사과드리고 다시 묘를 옮겨야 했습니다. 큰아들이 처음부터 다른 가족들의 의견을 들었더라면 이런 큰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요.
이런 확증편향은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국가 안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확증편향의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성지를 되찾아야 한다!"라는 생각만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원하셨는데, 교회는 전쟁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오히려 증오와 폭력이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또한,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녀야! 악마와 손잡은 사람이야!"라는 확신 속에서 무고한 이들을 처형했습니다. 이들이 정말 마녀였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2000년 희년을 맞이하며, 이런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날 ‘나는 과연 올바른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에서도 확증편향으로 인해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은 아리안족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잘못된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 확신 속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났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자는 적이다"라는 논리로 반대파들을 감옥에 가두고, 시베리아로 보내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0년대 메카시 광풍이 불었습니다. "저 사람은 공산주의자야!"라고 낙인찍으면, 아무런 증거 없이 감옥에 가두고 직장에서 쫓아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선의 통치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자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심한 고문을 당하고, 순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피로 이 땅의 신앙이 더욱 깊어졌고, 그 순교지들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살아가면서도 확증편향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틀리지 않아!"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을 때, "이건 무조건 잘못된 것이야!"라고 성급하게 판단할 때, "이 사람은 변하지 않을 거야!"라고 단정 지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신념이 항상 옳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의심하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순 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은 없는가?’,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입니다. 내가 확증편향에 빠져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았던 적은 없는지, 혹시 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 내 생각만 고집했던 적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따르며, 겸손하게 신앙을 살아가는 사순 시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순 제4주 간 토요일
예레미야 11,18-20 요한 7,40-53
주님,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일찌감치 어린 나이에 예언자로 불림받았던 예레미야의 인생 여정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참으로 기구하고 안쓰러웠습니다. 또래들은 다들 모여서 깔깔대고 웃고 뛰노는 그런 나이에 불림을 받았으니
얼마나 부담스럽고 막막했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주된 소명은 이스라엘 고관대작들과 지도층 인사들을 경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보아하니 머리에 피도
제대로 마르지 않은 한 아이가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니,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백성들 앞으로 나아가는 예레미야의 심정이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예레 11,19)
보통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은 다 자란 양이었습니다. 그래야 고기도 넉넉하게 나오고,
가죽도 쓸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종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어린양도 도살되곤 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 살만큼 산 어미양들도 두려워서 혼비백산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은 그보다 훨씬 더 했을 것입니다. 예언자 생활 내내 예레미야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신세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서를 천천히 읽다보면 참으로 특별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이 너무 크다보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달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 듣기 좋은 말씀, 덕담,
칭찬과 위로의 말이었으면 득달같이 달려가서 예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지도층 인사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의 거듭된 배신과 불충실에 따른 왕국의 파괴와 멸망을 예언해야만 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예언자 직분을 시작했기에, 말빨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고,
가는 곳 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예레미야는 하루는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나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15,10)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 7-8)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언자이기에 겪어야만 했던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꾸준히 순명했습니다. 아직 어렸기에 틈만 나면 “주님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십니까?” 하고 부르짖었지만,
결코 예언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걸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생애는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듭된 시련과 실패를 통해 그를 성장시키셨고, 튼튼한 당신의 종으로 거듭 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생애를 통해 실패를 통해서도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동시에, 분명 우리 생애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처참한 실패에서 성공에로 이끄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실패를 이용해서 우리의 상처를 영광의 배지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3. 이영근신부
사순 제4주 간 토요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이어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왜 오늘 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변화되는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5.4.4.사순 제4주간 금요일
지혜2,1ㄱ.12-22 요한7,1-2.10.25-30
악(惡)에 대한 유일한 처방
“하느님 중심의 삶”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시편54,3)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부터 확인해 놓고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참나의 실현이자 완성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나타내는 참 좋은 말씀들을 열거해 봅니다.
1.믿음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큰 일도 작은에서 시작한다.
2.사람과의 신의를 지키는 일은 먼 이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다산>
3.‘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하고’(견리사의;見利思義),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치며,
희미해진 약속이라도 잊지 않는다면, 완성된 인간이라 할 수 있다.<논어>
4.도시의 공원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에 <공원의 위로>라는 책을 구입해 읽고 있습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공원은 도시의 괄호다. 도시의 소란에서 탈주해 자발적으로 표류할 수 있는 장소다.
도시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내며 일상의 미학적 문해력을 길러준다.
공원은 지역사회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탱해주는 사회적 인프라다. 공원은 도시의 여백이다.
미래세대를 위한 숨통이다. 공원은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비인간 생명체와 사물이 함께 거주하는 혼종의 경관이다.
무엇보다도 공원은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주는 위로의 장소이자 모두를 환대하는 공간이다.’
진정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하느님을 닮은 넓고 그윽하고 편안한 ‘위로와 환대의 공원’같은 존재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런면에서 여기 요셉수도원은 전체가 공원인 축복받은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5.은총의 사순시기, 요즘에 적절하다 싶어 오래전 배밭을 보며 써놓은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기쁨을
노래한 ‘봄햇살 붓으로’라는 시를 나눕니다. 바야흐로 시작된 봄의 축제, 파스카 축제,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다
생명의 화판
대지에
부드러운 봄 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에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다”<2007.4.4.>
6.예전 10대 중학교 시절, 60년대 풍미했던 <하숙생>이란 최희준 노래를 참 좋아했으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가끔 부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며 떠오른 하숙생 가사가 좋아 2절 전부를 소개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려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허무감이 물씬 배어 있는 정처없는 인생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부재한 허무주의의 삶은 악마의 밥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분명코 단언하건데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방향과 목적지가 분명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歸鄕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흡사 예수님이 당신을 죽이려는 악의 세력에 포위되어 있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의 현실입니다. 암세포가 증식되어 온몸에 퍼지듯 ‘죄악의 암세포’가
사회전반에 확산되는 총체적 위기의 오늘입니다. 바로 어제 제주도에서의 <4.3 사건> 77주년을 지낸 다음,
오늘 2025년 4월4일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핵선고가 있는 역사적인 날!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믿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악인들의 삶과 생각, 그리고 악인들의 의인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데 흡사 예수님 수난을 연상케 합니다. 그 일부만 나눕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두고 보자.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려보자.”
이런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환히 밝히며 단호히 바로잡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지혜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무지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실했을 때 악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합니다. 증식하여 퍼져나가는 죄악의 암세포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래서 사순시기중 기도와 회개의 수행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지혜서 다음 말씀이 인간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답은 하느님이심을 결론짓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이래서 평생 필수 공부가 하느님 공부, 하느님 지혜 공부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떠나니 정신병도 많고,
괴물도, 악마도, 야수가 되어 버리고, 급기야는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됩니다.
정말 세상 죄악에 오염되니 제대로 된 제정신의 무공해 사람들을 만나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 중심의 삶뿐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중 다음 핵심 구절이 예수님의 신원 고백이 그대로 답이 됩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원은 그대로 우리의 신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우리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필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하느님께로 왔다가 하느님께로 가는 ‘귀향의 여정’중이라는 자각이 더욱 하느님 중심의 삶에
박차를 가하게 하며, 이보다 악에 대한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해주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악에 대한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시편34,19). 아멘.

4/5(토)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의심하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순 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은 없는가?’,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입니다. 내가 확증편향에 빠져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았던 적은 없는지, 혹시 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 내 생각만 고집했던 적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따르며, 겸손하게 신앙을 살아가는 사순 시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조재형 신부)
2.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생애를 통해 실패를 통해서도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동시에, 분명 우리 생애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처참한 실패에서 성공에로 이끄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실패를 이용해서 우리의 상처를 영광의 배지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 중심의 삶뿐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중 다음 핵심 구절이 예수님의 신원 고백이 그대로 답이 됩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원은 그대로 우리의 신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우리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필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하느님께로 왔다가 하느님께로 가는 ‘귀향의 여정’중이라는 자각이 더욱 하느님 중심의 삶에
박차를 가하게 하며, 이보다 악에 대한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해주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악에 대한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시편34,19). 아멘.
(이수철 신부)
4/5(토)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 2025년 4월5일(토) 5시5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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