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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4월 4일 금요일[(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4월 4일 금요일[(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54(53),3-4 참조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이 제사로 도와주시니
저희가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여
그 은혜를 새로운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1ㄱ.12-22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4(33),17-18.19-20.21과 23(◎ 19ㄱ)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
○ 그의 뼈를 고스란히 지켜 주시니, 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하여졌으니
이 제사를 세우신 주님께 더욱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에페 1,7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었네. 그분의 풍성한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사로 저희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갔으니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을 굽어보시어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이들을
천상 은총으로 자애로이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을 주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음에도 돈을 주울 거라는 기대를 하고 길을 걸었습니다. 전에는 옆집 사람과 인사도 하고, 들의 꽃도 보고, 새 소리도 듣고, 하늘이 구름도 보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돈에 관한 생각이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지만,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지 모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보이고, 실패하는 사람은 지금 없는 것이 보인다고 합니다. 예전에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성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인상이 돼지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임금님은 인상이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스님은 어찌 그리 말하십니까?”라고 말하자 무학대사가 이리 말했다고 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이 보인답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보면 좋은 점이 먼저 보이십니까, 아니면 부족한 점이 먼저 보이십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눈으로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는, 결국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든 불만스러운 것만 보이겠지요. 반대로,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세상의 작은 일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바라보실 때 어떻게 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를 손가락질하며 저들은 죄인이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회개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비난하고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쉬운 것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하늘을 보고, 꽃을 보고, 사람을 보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것은 지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식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환자의 상태를 보는 의사는 지식의 눈으로 봅니다. 증권의 시세를 보는 증권 전문가 역시 지식의 눈으로 봅니다. 신문에 칼럼을 쓰는 논설위원도 지식의 눈으로 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지혜의 눈으로, 깨달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노자, 장자, 공자는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비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인과 예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런 안목은 오랫동안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단순히 시력으로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회개란 단순히 잘못한 것을 반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입니다. 돼지의 눈이 아니라,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세상의 눈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 아닐까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단점이 아닌 장점을 먼저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조금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더욱 기쁘게 바라보실 겁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타협하는 신앙은 매력이 없다, 그래서 희망도 없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몇몇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동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본인들도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기 힘이 듭니다. 

 

일본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선교로 천주교 신앙이 급속히 전파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그리스도교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고 극심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박해의 공포 앞에서 일부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신앙을 숨긴 채 잠복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박해를 피해 숨은 신자들은 겉으로는 불교나 신토(神道)의 신앙을 따르는 척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신앙은 원래의

가톨릭 교리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리아 관음(マリア観音)’상입니다.

원래의 성모 마리아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당국에 적발되어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일본식 불상인

관음보살(観音菩薩)과 비슷하게 만들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성모 마리아 신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마리아 관음상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아닌 일본 토착 종교의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도문과 성가도 일본 토착 종교적 표현으로 은밀히 바꾸고

위장하게 되었습니다.

미사 전례도 점차 원형을 잃어버렸으며, 성사의 정확한 의미와 방법 또한 잊혀졌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19세기 중반 일본이 개항하고

천주교 선교사들이 재입국했을 때, 많은 잠복 기리시탄들은 이미 정통 천주교와는 전혀 다른

신앙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오랜 세월 박해 속에서 죽음을

피하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정통 신앙을 잃고,

그들만의 왜곡된 신앙 체계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혹독하고 오랜 박해에도 신앙을 지켜온 것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거의 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며, 신앙을 보존하고 전하는 일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죽음을 피하고자 했던 가쿠레 기리시탄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두려움이 신앙을 왜곡하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쇠퇴와 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가톨릭 신앙은 일본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민족성 자체가 밟으면 더 기를 쓰고 일어나는 민족성이 우리나라입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18세기 말, 외국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학자들 스스로 진리를 찾아 받아들인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출발은 초기에 사제가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졌습니다.

초기에는 임시로 평신도가 성직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만들어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 했으나 이것이 정통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는 반드시 교회의

공식 절차를 통해 안수를 받은 정통 사제들을 목숨을 걸고 영입하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또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일반적이었던 유교의 조상 제사나 불교적

요소와 결합하는 방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오직 교황청의 지침에 따라 정통적인 신앙만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관습과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는 곧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신자들에게 더욱 굳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신앙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순교 정신은 또한 정통 사제를 초빙하는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중국 베이징 교구에 여러 차례 대표단을 파견하여 사제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최초로 한국에 입국하여 성사를 집전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후에도 사제의 영입운동은 계속되어,

마침내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조선 땅에 들어와

비로소 한국 천주교는 본격적인 성직 중심의 정통적인 교회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비록 가성직제도와 같은 불완전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는

거의 로마보다 더 로마다운 보편 교회가 요구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 형태는 목숨을 걸고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내는 이들에게 많은 열매를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믿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신자 중의

몇 프로나 들까요? 거의 들지 않습니다. 조선시대는 성체 한번, 고해성사 한 번 하려 목숨을

걸었었습니다. 신앙은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변질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신앙은 더는 매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앙은 어떻습니까?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지옥도 없다고 하고,

성체를 왜 영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십일조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까지도 쉬운 방식으로 변질시켜 설명합니다. 

 

사랑도 제 목숨을 지키려 하는 타협적인 모습을 보일 때는 믿을 수 없는 게 되어버립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왜 지금도 매력적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에 관계된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초대교회의 성인인 폴리카르포 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타협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수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종교나 사랑이나 다 목숨을 내어주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매력을 잃는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예수님의 정체성>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을 때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 7,27)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참조).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 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8-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흐르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생명이 피어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5.4.3.사순 제4주간 목요일                                                                   

탈출32,7-14 요한5,31-47

 

주님안에서 관계속의 삶

“자기 소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삶”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시편 입당송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입니다.

“작은 상자에 큰 것을 억지로 담으면 부서지고 만다. 사람의 탐욕도 그렇다.”<다산>

“먹을 것을 밝히는 사람을 낮춰 보는 까닭은 작은 것을 채우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맹자>

새삼 자기를 알아 분수를 지킴이, 지족知足함이 지혜이자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혼자서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관계속의 삶입니다. 관계를 떠난 고립단절의 삶이 지옥입니다. 그러니 서로 감사해야 합니다. 서로가 구원하기 때문이요 혼자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애당초 관계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삶의 여정도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예전 수도원을 찾았던 분과의 주고받은 문답도 생각납니다. 

 

“여기가 천국입니다.”

“아닙니다. 자연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천국은 장소개념이기보다는 관계 개념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삶과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과연 주님과 신뢰와 사랑이 날로 깊어지는 관계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완전히 관계속의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코 고립단절의 혼자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지요! 모두의 기대를 가득 받고 있는 예수님의 소명과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네 경우를 보여줍니다.

 

첫째, 요한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로 진리이신 주님을 증언합니다.

둘째,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 주님을,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증언합니다.

셋째, 아버지께서 친히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삶자체를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무지로 인해 유대인들은 이를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넷째,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주는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주님은 성경이 증언하는 당신께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며 무지한 유대인들을 꾸짖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분은 이런 예수님입니다. 다양한 관계속에서 당신이 받은 소명과 책임을 다하시는 예수님을 평생 보고 배우며 일치를 추구하는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의 중재자로서 새모세 예수님의 위상을 이들 유대인들을 몰랐습니다. 탈출기의 중재자 모세를 정말 알았다면 새모세 예수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를 하나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것이다.”(신명18,15-18참조)

 

그 아득한 옛날 새모세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누구입니까? 모세를 보면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을 보면 모세가 보입니다. 중재자 모세의 역할이 오늘 탈출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님과 모세의 주고받은 기도와 같은 대화는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온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중재자 모세의 손에 달린 형국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즉시 애원하며 주님께 매달립니다. 하느님께 대한 한없는 신뢰와 철부지 무지한 동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모세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참된 사제이자 목자상을 보고 배웁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 자신을 걸고,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자기가 받은 소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과의 백성들간의 유일한 중재자이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의 백성을 살리려는 사랑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정말 참사람 하나 보는 듯 합니다. 하느님 없는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 없는 모세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모세와 백성들이 하나된 공동운명체같은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유일한 중재자로 가교 역할을 하는 지도자 모세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세의 위상을 훨씬 넘어서는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이며 구원자이자 영도자이신 새모세 예수님입니다. 새삼 이스라엘은 물론 온 인류의 영원한 희망은 이런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모시고 이웃과의 더불어 삶 중에 우리가 받은 소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하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형제들과 더불어 성인들과 천사들은 물론 누구보다도 주님 친히 이런 우리의 빛나는 증언자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예레31,33).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4/4(금)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회개란 단순히 잘못한 것을 반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입니다. 돼지의 눈이 아니라,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세상의 눈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 아닐까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단점이 아닌 장점을 먼저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조금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더욱 기쁘게 바라보실 겁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조재형 신부)

 

2. 신앙은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변질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신앙은 더는 매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성 라우렌시오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초대교회의 성인인 폴리카르포 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타협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수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종교나 사랑이나 다 목숨을 내어주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매력을 잃는다는 것을 명심합시다.(전삼용 신부)

 

3.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흐르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생명이 피어오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유일한 중재자로 가교 역할을 하는 지도자 모세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세의 위상을 훨씬 넘어서는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이며 구원자이자 영도자이신 새모세 예수님입니다. 새삼 이스라엘은 물론 온 인류의 영원한 희망은 이런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모시고 이웃과의 더불어 삶 중에 우리가 받은 소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하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형제들과 더불어 성인들과 천사들은 물론 누구보다도 주님 친히 이런 우리의 빛나는 증언자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예레31,33). 아멘.(이수철 신부)


 

4/4(금)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흐르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생명이 피어오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4일(금) 3시5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