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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4월 30일 수요일[(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4월 30일 수요일[(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비오 5세 교황

입당송

시편 18(17),50; 22(21),23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8-9(◎ 7ㄱ)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복음 환호송

요한 3,16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5,16.1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백분 토론을 보았습니다. 보수의 논객으로 조갑제 대표가 나왔고, 진보의 논객으로 유시민 작가가 나왔습니다. 상대방의 품격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충실하게 전하는 토론이었습니다. 진행자가 대통령 탄핵과 파면 이후에 치러지게 되는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와 진보가 내세울 시대정신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시대정신은 몇 년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를 어우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헌법 전문에 시대정신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80년 동안 이런 시대정신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시대정신은 자유, 번영, 통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10 항쟁을 통해서 그리고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을 통해서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향해 전진해 왔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무역 10위에 이르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우리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부속 도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통일은 우리가 이룩해야 할 시대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보수와 진보는 이런 시대정신을 구현해 왔습니다. 앞으로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런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후보와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말은 시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입니다. 부활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복권(Reinstate)과 사면(Clemency)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억울하게 벼슬에서 쫓겨났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을 후대에 사면하거나, 직위를 복권하기도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이 중세에 다시 등장하여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바뀌는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근대 서구사회의 사상과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패션과 문화, 예술, 건축에서 회상, 회고, 추억이라는 뜻의 복고(Retrospect)가 있습니다.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체제, 전통 등을 그리워하여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감각을 현대와 접목하여 현대적 감성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보는 부활(賦活)’은 공매도 부활, 비트코인 부활, 트럼프 부활과 같은 말로 사용됩니다. 그런 부활은 활력을 주고, 생기를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復活)’과는 한글 표기와 발음은 같지만 뜻은 다른 말입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소생(蘇生)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은 언제나 악을 이긴다.”라는 이치를 말해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듭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부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은 과학과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부활은 체험과 삶의 영역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경문을 읽습니다.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우리는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교회의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비록 감옥에 갇힐지라도, 비록 가진 것을 빼앗길지라도, 비록 목숨을 잃을지라도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시대정신의 근거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것,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 부활 시기의 시대정신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요한 3,16-21

 

행동하기 위해 믿을까, 믿기 위해 행동할까?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이 행위보다는 믿음으로 온다는 주제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예수님은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은 빛으로 나아옴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행위는 빛으로 나아오는 자격증과 같습니다. 행위가 옳지 못하면 자기 잘못이 드러날까 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올 수는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특별히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고, 계단을 오를 수 없어

집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분들이 고생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서로 돕겠다고

나서서 행복한 고민이 생깁니다. 누구에게 더 시키고, 누구는 덜 시키고 하면 거기에서

차별받는 것처럼 여겨서 나아오지를 못합니다. 

 

저는 이미 그분들이 저에게 해 주신 일들에 고마워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다름이 없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하면 그만큼 제가 다른 사람들을 더 신임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 본당에 계신 분들도 저를 많이 도와주시지만, 이전 본당에 계신 분들도 도와주십니다.

그러면 지금 본당에 계신 분들이 섭섭해하고, 새로운 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이전분들이 섭섭해하십니다.

이분들은 행위에 지나친 가치를 두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저를 돕는 행동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저에게 합당한 존재라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제가 별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감사해야 하는 존재임에도 저에게 다가오려는 분들은 무언가 일을 해야만 저에게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들이 일을 하는 것은 저에게 다가오기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위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는 분들은 언젠가는

믿음을 키우지 못한 덕으로 더는 다가올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우리를 쫓아내실까요?

우리 자신의 양심이 그분께 가기를 막을 것입니다. 행위에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을 규정을 지키려다가 안식일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헌금을 보여주기 행위로 왜곡, 거짓이 드러나 심판을 자초(사도 5,1-11)한

아나니아스와 사피라도 있습니다. 성실한 노동을 내세우며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을 이해 못한

탕자의 비유에서의 맏아들도 생각해보십시오(루카 15,25-32). 

 

행위는 사랑을 믿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도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행복임을 믿어야 구원에 가까워질 수 있고, 성체성사도 의미 있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물 위를 걷다 빠지고, 세 번 부인도 했지만 회개로 더욱 굳건한 반석이 된(마태 14,28-33; 요한 21,15-19)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시몬을 생각해봅시다.

성경엔 나오지 않지만, 그 십자가를 함께 지며 영화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자비를 실천해 보니까 자비가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가 행복임을 느끼기 위한 시도여야 합니다.

결국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심판받습니다. 그 믿음은 성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지,

성체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체도 그분의 살과 피입니다.

그것을 영하기에 먼저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올바른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기에 위험해 보이는 다리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다리를 살살 건너봅니다. 괜찮습니다.

다시 건너봅니다. 또 괜찮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생깁니까?

다리가 겉보기에 불안해 보여도 안전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성체성사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선한 행동을 강화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착한 뜻이 그분께 다가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요한 3,16-21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 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 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4.29.화요일 시에나의 가타리나 동정 학자(1347-1380) 기념일

사도4,32-37 요한3,7.8-15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교회 공동체

“참다운 우정의 사람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이 참 유익한 가르침이 됩니다.

“본질에 가까워진 단순함 속에는 무수한 복잡함이 담겨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모든 과잉을 제거한 것이다.”<다산>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전형인 성인들의 단순한 모습이 바로 이러합니다.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삶에서 목격하는 사실입니다.

특별하거나 별난 것은 결코 참된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귀한 진리가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시공과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구도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참으로 믿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한 하느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같은 귀한 품위의 우리 존재들입니다.

이런 품위의 삶을 살라고 눈들면 늘 파스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하늘길’이신 파스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위로부터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이

존엄한 품위의 삶을, 한 마음 한 뜻의 참다운 우정의 공동체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입니다.

살아갈수록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에 천주교의 미사전례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통감합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분들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얼마전 성인다운 삶을 살다가 88세로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4월29일은 33세, 예수님 나이에 선종하신 시에나의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우리 수도원 주변에도 성녀 가타리나를 닮은 자매들도 여러분 있으며 특히 오늘 미사중 기억하며 봉헌합니다.

 

성녀는 1347년 시에나의 하층 중산층 가정에서 25남매중 23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성녀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읽고 쓸줄도 몰랐습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정을 그리스도께 바쳤고 10대 중반까지 기도와 명상시간을 가졌고,

16세 도미니코 제3수도회에 입회합니다.

성녀는 남녀동료들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성직자 개혁,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촉구하며,

참된 회개와 쇄신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성녀는 1366년 19세 나이에 ‘예수님과의 신비로운 결혼’을 체험했고, 그후 병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섬겼고,

병원이나 집에서 이들을 돌봤습니다.

1370년 23세 때, 성녀는 지옥, 연옥, 천국에 대한 일련의 환상을 보았고, 공적인 삶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수행합니다.

성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방 대분열은 1417년까지 계속되었고, 서방 분열의 문제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성녀를 늘 괴롭혔습니다.

 

성녀가 쓴 300통의 편지는 성녀의 말을 필경사가 받아 적은 것이며,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서 ‘성하’라는

공식적 칭호대신 다정하게 교황님(Papa)이라 불렀습니다.

성녀는 26가지 기도문을 남겼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집’의 저술을 남겼는데

이 또한 필경사가 성녀의 체험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성녀는 3개월간 고통을 온전히 견뎌낸후 1380년 4월29일 33세로 선종합니다.

임종을 앞두고 이룬 마지막 업적은 교황 우르바노 6세와 로마 공화국의 화해였습니다.

성녀는 1939년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그리고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네딕도, 성 치릴로와 성 메테디오, 스웨덴의 비르짓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에디트 슈타인)와 함께

가타리나 성녀를 유럽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성녀에게 교회학자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참으로 33세 짧은 생애, 보통 사람의 몇배를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았던 불가사의한 성녀 가타리나였습니다.

말 그대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성녀답게, 은총의 선물에 상응하여 분투의 노력을 다했던,

시종여일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로 일관했던 생애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보여줍니다.

말그대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의 중심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은총을 베푸시니 그대로 참다운 우정의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인간들의 노력만으로 이룬 유토피아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노력이

함께 하여 이룬 아름다운 공동체요, 우리 수도공동체가 롤모델로 삼는 이상적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묘사가 참 아름다워 그대로 인용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말그대로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입니다.

억지로나 강제적인 유혈 혁명의 평등 공동체가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정의와 평화, 평등의 공동체입니다.

진정 ‘억강부약抑强扶弱, 대동세상大同世上’을 꿈꾸는 정치지도자들이라면 모름지기

여기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영감을 얻고 배워야 하며, 이에 앞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겸손과 사랑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같은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야말로 참으로 자랑스런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바로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공동체가 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완성된 공동체는 없습니다.

순례여정중 완성을 향해가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미완의 공동체요, 그래서 부단히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기 위해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바치는 자발적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발적 사랑의 하늘나라 공동체 실현에 참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4/30(수)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것,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 부활 시기의 시대정신입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도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행복임을 믿어야 구원에 가까워질 수 있고, 성체성사도 의미 있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물 위를 걷다 빠지고, 세 번 부인도 했지만 회개로 더욱 굳건한 반석이 된(마태 14,28-33; 요한 21,15-19)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시몬을 생각해봅시다.

성경엔 나오지 않지만, 그 십자가를 함께 지며 영화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자비를 실천해 보니까 자비가 보이는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시에나 가타리나 성녀는 3개월간 고통을 온전히 견뎌낸후 1380년 4월29일 33세로 선종합니다.

임종을 앞두고 이룬 마지막 업적은 교황 우르바노 6세와 로마 공화국의 화해였습니다.

성녀는 1939년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그리고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네딕도, 성 치릴로와 성 메테디오, 스웨덴의 비르짓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에디트 슈타인)와 함께

가타리나 성녀를 유럽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성녀에게 교회학자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참으로 33세 짧은 생애, 보통 사람의 몇배를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았던 불가사의한 성녀 가타리나였습니다.

말 그대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성녀답게, 은총의 선물에 상응하여 분투의 노력을 다했던,

시종여일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로 일관했던 생애였습니다. (이수철 신부)

 

4/30(수)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30일(수) 7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