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6월 7일 토요일[(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제자들은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네. 알렐루야.
본기도
파스카 축제를 마치는 저희에게 너그러이 은혜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 신비를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늘에 있는 주님의 옥좌에서, 당신 눈으로 살피시고, 당신 눈동자로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
○ 주님은 의인도 악인도 가려내시고, 그분의 얼은 폭행을 즐기는 자를 미워하신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거룩한 신비를 합당히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성령이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리라.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로 저희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갔으니
저희의 기도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일석삼조(一石三鳥)’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 하나를 던졌는데 세 마리의 새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하루에 네 가지의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집 축성이 있었고, 이어서 구역장 회의, 마지막으로는 청소년 음악회까지 있었습니다. 아침 9시에 집을 나섰고, 저녁 10시에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마음은 오히려 충만했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이 네 가지 일을 돌아보며, 하느님께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로 이어주셨다고 느꼈습니다. 첫 번째는 장례미사입니다. 삶의 한 여정을 마친 형제님을 위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미사는 단지 죽음을 슬퍼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분의 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감사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의미’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장례미사는 바로 그런 작업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감사로 바꾸는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 품 안에서 영원으로 가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두 번째는 집 축성입니다. 괌에서 막 이사 온 가정이었습니다. 아직 교적도 없고, 가구도 없었지만, 축복은 가득했습니다. 어떤 본당에서는 교적이 없다는 이유로 축성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속을 보시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먼저 보신다. “존재는 환대에서 피어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환대했습니다. 손님은 아브라함이 곧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이를 얻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강도당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축성은 환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은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의 신앙입니다.
세 번째는 청소년 음악회였습니다. 어색하고 서툰 손놀림, 떨리는 음표, 아직은 조금 부족한 표현력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모습이 더 감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미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희망은 두 딸을 두고 있다. 하나는 분노요, 다른 하나는 용기다”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지금 부족함에 대한 성찰이고, 용기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돋움입니다. 청소년들의 연주는 그런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서툴지만, 순수했고, 그래서 아름다웠습니다. 네 번째는 구역장 회의였습니다. 저는 이 회의를 다리(bridge)라고 생각합니다. 본당과 구역, 사제와 신자, 하느님의 말씀과 생활의 목소리를 잇는 연결의 다리입니다. “다리는 강을 피하지 않는다. 강을 품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 다양한 사연, 때로는 불만까지도 사랑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본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역장 회의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을 맞아들이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시간을 복음으로 바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은 감옥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곧 ‘비교하지 말고,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살아라.’라는 말씀입니다. 장례미사를 통해 과거를 봉헌하고, 집 축성을 통해 현재를 축복하며, 구역장 회의로 본당과 구역을 이어주는 다리를 놓고, 청소년 음악회로 미래의 희망을 품었던 하루였습니다. 그 하루 속에서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우리 각자의 삶도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리, 그 모든 순간이 바로 하느님 은총의 통로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과거를 감사로, 현재를 기도로, 미래를 희망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21,20-25
한 사람의 인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잣대!
어제 이재명 대통령께서는 취임 선서를 마친 직후, 참으로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행보를 전 국민 앞에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들은 국회 청소 노동자들과 방호 직원들이었습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쌩트집 잡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보여주기’라느니, ‘쌩쇼’라느니 하겠지만,
낮은 곳에서 묵묵히 헌신하시는 분들 한명 한명 눈을 맞추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한분 한분 대하는 표정이며 말투에서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저도 요즘 드넓은 피정 센터에서 청소 노동자, 급식실 노동자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데,
멀리 있는 저한테까지 그 따뜻한 위로의 감정이 전해오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잣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청소 노동자나, 식당 종업원,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매일 하고 있는 궂은 일들을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대한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할 때, 그 공동체의 미래는 암울할 뿐입니다.
반대로 그분들의 노고가 이 사회를 위해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인지 잘 알고 있고,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높은 수준의 인격자입니다.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예수님의 평생에 걸친 행보는 오로지 아래를 향한 행보였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은 당대 유다 고관대작들이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그리 친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낮은 곳에서 고생하는 민중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뜻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아래로의 행보는 바오로 사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당대 힘 좀 쓰는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얼마나 너그럽고 관대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셋집에서 검소하게 살면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쁘게 환대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었고, 그들에게 주님의 크신 자비를 선포하며 격려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요한 21,20-25
오늘을 충실히 살게 만드는 것은 꿈보다 정체성이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마지막 때에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요한의 미래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결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본인들도 헛갈릴 정도로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삶의 끝을 아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만을 믿고 현실에 충실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운명론의 폐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운명을 알고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전에 EBS 지식 채널 중 이러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파리 여행을 다큐 형식으로 찍은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평생 미술 교사를 하다 은퇴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내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그는 오랜 계획을 세우고 많은 돈을 쓰며 그림 도구들을 사고 준비합니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의 화가 생활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도 당하며 돈을 다 잃습니다. 길거리에서 비도 맞으며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은 기쁘지만 이미 손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화가의 꿈이 그분께는
생계를 위한 수단 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너는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 되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런 꿈을 이야기합니다.
꿈이 크면 어른들은 칭찬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을 이루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 중에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유재석 씨 같은 경우입니다. 미래의 꿈보다 오늘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꿈이 오늘을 충실하게 살게 할 힘을 잃었다면 그 꿈은 망상이 되고 맙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한 스님과 제자가 가난한 집에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난한 집은 암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젖으로 여러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음 날 떠나면서 제자에게 몰래 그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깜짝 놀랐지만 순종하였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을 때 제자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이전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고
부유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전까지 암소에게 의존하며 살았는데 암소가 사라지자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더니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꿈도 이렇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명확하면 그것이 지금을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오늘을 허투루 살게 만드는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미래에도 부자로 살 수 있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모가 물려줄 재산에 대한 명확한 보장이 있다면 오늘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부자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미리 선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주님은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질문에도 머뭇거림이 없이 현명한 답을 하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손에 참새 한 마리를 들고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새는 살아 있나요, 죽어있나요?”
만약 살아 있다고 말하면 꽉 눌러 죽일 생각이고 죽었다고 한다면 하늘로 날려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스님은 대답했습니다.
“그 새의 살고 죽음은 너에게 달렸지.”
아이는 스님의 현명함에 놀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어제 엄마가 점을 보고 왔는데 제 운명이 아주 안 좋대요.”
스님은 아이에게 손을 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물선과 운명선 등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운명선은 어디 있지?”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제 손안에 있네요.”
구약의 요셉이 꾼 꿈은 가족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열린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가족까지 존경하는 결실을 볼 것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꿈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면 분명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정체성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오갈 데 없어서 대학 때 판자촌에서 버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새고 심지어 떠내려갈 정도로 위에서 물이 많이 흘러내려 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시인이다. 이 순간은 두려워할 순간이 아니라 시를 위한 영감을 찾아내야 할 때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천둥 번개도, 바람도, 새는 비도, 흘러 내려오는 물도 모두 시를 위한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삶,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오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꿈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정체성만 명확하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꿈에 반드시 도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꿈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드느냐입니다.
꿈은 모호해도 좋습니다.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그 꿈으로 오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6.부활 제7주간 금요일
사도25,13ㄴ-21 요한21,15-19
평생 화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6월은 예수성심성월이자 호국보훈의 달이요, 오늘은 1956년부터 시작된 올해 제79주년 현충일입니다.
민족과 국가의 수호 및 발전에 기여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되거나 목숨을 바친 분들을 애도하는 날로
법정공휴일이자 국가추념일입니다.
주님을 위한 거룩한 사랑의 순교만 있는게 아니라 나라를 위한 거룩한 죽음의 순국도 있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갈 때마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산화(散華)한 군인들의 무수한 묘지를 보면
가슴 짠한 감동을 체험하곤 합니다.
어제 순국의 애국자들을 생각하며 불러본 조지훈 시인 작사의 현충일 노래 가사를 소개합니다.
오늘 한 번 불러보시며 나라 사랑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임들은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아 그 정성 새로워라”
얼마전 80세 고령에도 영원한 현역으로 손색이 없는 어느 유명한 보수 논객의 인터뷰 내용중
이미 강론에 인용했던 말마디가 요즘도 생생합니다.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사랑하는 역동적인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첫눈에 반한 첫사랑의 추억도 가슴 뛰게 합니다.
여러분은 가슴 뛰는 사랑이 있습니까?
국립묘지에서의 “가슴 짠한 감동의 사랑”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가슴 뛰는 사랑”입니다.
“가슴 뛰는 사랑!” 이 최고의 건강비법입니다.
잘먹어서, 운동 많이 해서 건강이 아니라 가슴 뛰는 사랑의 감동이 참 건강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이, 주님 찬미가, 주님 감사가, 주님 희망이, 새로운 만남이, 새로운 발견이, 새로운 배움이,
새로운 깨달음이 가슴 뛰는 기쁨을, 행복을 선사합니다.
이런 가슴 뛰는 기쁨이, 행복이 있을 때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한 청춘의 건강입니다.
저의 경우 첫 사랑은 초등학교 시절 아이들이었고 지금은 하느님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은 제 사랑의 전부였고, 지금은 하느님이 제 사랑 전부입니다.
지금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사랑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운 분’, 바로 저에게는 주님입니다.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 상본중,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 라는 바오로 사도의 성구 말씀은
제 좌우명입니다.
행복기도중 다음 고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요즘은 수도원 원내, 성모자상곁의 금계국꽃들이 가슴 뛰는 사랑을 선사합니다.
어제 써놓은 ‘사랑’이란 자작시입니다.
“참
눈부시다
주님인 태양을 반사하니
황금빛 얼굴
성모자상곁
금계국꽃들
주님인 태양을 닮았다
주변이 환하다”<2025.6.5.>
주님의 부르심에 첫눈에 반해 주님을 따라 나선,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건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가 바로 그러합니다.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극적인 회심후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과 베드로의 주고 받는 대화도 감동적입니다.
주님은 세 번 거푸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믿는 모든이들에게 평생 화두가 되는 물음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겠습니까?
베드로는 부지불식간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가슴 아팠던 추억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아마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각성시키기 위한 주님의 의도적 3회의 물음같습니다.
세 번이나 묻자 세 번째 베드로는 슬퍼하며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대답하며 주님 사랑을 깊이깊이 마음에 각인했을 것입니다.
저라면 “예, 주님을 사랑합니다!” 대답했을 것이나 사연이 깊었던 베드로의 답은 좀 깁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후 세 번 주님의 당부는 대동소이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당신의 양들인 형제자매들을 돌보는 사랑에 전력을 다하라는 유언같은 당부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 역시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돌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의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임을 예고하면서 명령하시니
이 또한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니 베드로는 물론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이어 “내 양들을 돌보아라!”와
“나를 따라라!” 두 당부가 뒤따릅니다.
어느 도반이 보내준, 주님을 따르는데 단순한 겸손의 비법을 나눕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틀렸으면 고치면 되고, 고마우면 감사하면 되고, 잘못했으면 사과하면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할수록 인생은 가벼워진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 모습에서도 순교자로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림이 감지됩니다.
바오로는 황제에게 상소함으로 예루살렘이 아닌 로마에서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여러 복잡한 관계와 사건이 중첩되지만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대선교사 바오로를
대제국의 심장부인 로마로 이끄심을 봅니다.
바로 두 말씀의 성취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아마도 바오로는 로마에서 주님을 증언하다 죽는 순교를 예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길은 오늘 우리 삶의 이야기 속에도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오늘도 우리 모두 주님 사랑을 고백하고 형제들을 돌보며,
주님의 손길 따라 자발적 사랑과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참고;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7(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의미’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장례미사는 바로 그런 작업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감사로 바꾸는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 품 안에서 영원으로 가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존재는 환대에서 피어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환대했습니다. 손님은 아브라함이 곧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이를 얻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강도당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축성은 환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은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의 신앙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희망은 두 딸을 두고 있다. 하나는 분노요, 다른 하나는 용기다”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지금 부족함에 대한 성찰이고, 용기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돋움입니다. 청소년들의 연주는 그런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서툴지만, 순수했고, 그래서 아름다웠습니다. 네 번째는 구역장 회의였습니다. 저는 이 회의를 다리(bridge)라고 생각합니다. 본당과 구역, 사제와 신자, 하느님의 말씀과 생활의 목소리를 잇는 연결의 다리입니다. “다리는 강을 피하지 않는다. 강을 품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 다양한 사연, 때로는 불만까지도 사랑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본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역장 회의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었습니다.(조재형 신부)
2.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예수님의 평생에 걸친 행보는 오로지 아래를 향한 행보였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은 당대 유다 고관대작들이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그리 친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낮은 곳에서 고생하는 민중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뜻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아래로의 행보는 바오로 사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당대 힘 좀 쓰는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얼마나 너그럽고 관대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셋집에서 검소하게 살면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쁘게 환대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었고, 그들에게 주님의 크신 자비를 선포하며 격려했습니다.(양승국 신부)
3. 류시화 시인은 오갈 데 없어서 대학 때 판자촌에서 버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새고 심지어 떠내려갈 정도로 위에서 물이 많이 흘러내려 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시인이다. 이 순간은 두려워할 순간이 아니라 시를 위한 영감을 찾아내야 할 때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천둥 번개도, 바람도, 새는 비도, 흘러 내려오는 물도 모두 시를 위한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삶,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오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꿈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정체성만 명확하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꿈에 반드시 도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꿈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드느냐입니다. (전삼용 신부)
4. 베드로는 물론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이어 “내 양들을 돌보아라!”와
“나를 따라라!” 두 당부가 뒤따릅니다.
어느 도반이 보내준, 주님을 따르는데 단순한 겸손의 비법을 나눕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틀렸으면 고치면 되고, 고마우면 감사하면 되고, 잘못했으면 사과하면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할수록 인생은 가벼워진다.”(이수철 신부)
6/7(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의미’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존재는 환대에서 피어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환대했습니다. 축성은 환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은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의 신앙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희망은 두 딸을 두고 있다. 하나는 분노요, 다른 하나는 용기다”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지금 부족함에 대한 성찰이고, 용기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돋움입니다.
“다리는 강을 피하지 않는다. 강을 품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 다양한 사연, 때로는 불만까지도 사랑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본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역장 회의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었습니다.
아멘.
- 2025년 6월7일 6시2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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