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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6월 23일 월요일[(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6월 23일 월요일[(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28(27),8-9 참조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2,1-9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2-13.18-19.20과 22(◎ 12ㄴ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복음 환호송

히브 4,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 알렐루야.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화해와 찬미의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해져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45(144),15 참조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10,11.1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성사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창세기 12,1-9   마태오 7,1-5

 

신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

하루를 살면서 거울을 몇 번이나 볼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외출하기 전에 한 번,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 한 번 등 시도 때도 없이 보는 것이 거울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어떨까요? 자기가 더러운지 그렇지 않은지, 깔끔하게 옷을 잘 입었는지

아무 맵시 없게 옷을 입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 외모에 대해서 누군가가 세심하게 알려 주거나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형제 안에 담겨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듯이, 형제의 단점과 잘못된 점을 볼 때마다

그 형제의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처지를 헤아리며 ‘나’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신학생 때 공동생활을 하면서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다 보니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형제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울로 삼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는 너와 달라.’라는 생각보다

‘나와 너는 크게 다르지 않아.’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외모를 가꾸기가 어렵듯이 형제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자신의 내면을 가꿀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우리와 함께 하는 형제들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장하도록 보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마태 7,1-5

 

지속적으로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합시다!

 

다들 젊은 시절의 성급함과 미성숙으로 인해 발생한 감추고 싶은 흑역사들 한 두 가지 있을 것입니다.

지우개로 지우듯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고 싶지만, 어쩌다 한 번씩 떠올라 이불킥을 하게 만듭니다.

 

제 흑역사 중에 가장 큰 부분은 자격이나 역량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수도회 내 이런저런 중책을 맡게 되면서,

이율배반적인 위선자의 모습을 참 많이 연출했던 것 같습니다.

이래서 되겠냐? 이래야 되지 않겠느냐? 목청껏 외쳤지만, 돌아보니 그런 질타는 저게 가장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더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 7,3-4)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 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마태 7,1-5

<‘용서’와 ‘자비’야말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래야 ‘심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들보’를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그것은 우선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를 알아채는 일입니다.

‘들보’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 곧 보는 틀, 보는 관점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이 행해지는 데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 편견, 세속 정신 등의 고정 관념이라면, 바로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다일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들어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야말로, 바로 그것을 빼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눈’을 빼낼 수 있는 길은 바로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빛으로 상대를 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호의와 자비’로 상대를 보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 2,13)

그래서 루카복음에서는 병행구문에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카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용서’와 ‘자비’야말로 바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 7,2)

이는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심판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로마 2,3)

하오니, 주님!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22. 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창세14,18-20 1코린11,23-26 루카911ㄴ-17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성체성사 예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를 실감하는 요즈음의 대한민국입니다.

창공의 별처럼 빛나는 순교선열들이, 순국선열들이 수호천사들이 되어 대한민국을 돕습니다.

여전히 기상후 계속되는 만세칠창중 “대한민국-한반도 만세!”기도입니다.

정말 하느님 사랑과 보호를 얼마나 많이 받은 대한민국인지 체험하는 요즈음입니다.

올해의 5월, 6월은 유난히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6월 예수성심성월은 더욱 그러합니다. 

 

축제의 6월 같습니다.

6월 모든 주일이 대축일입니다.

첫주(6/1)는 주님승천 대축일, 둘째주(6/8)는 성령강림 대축일, 오늘 셋째주(6/22)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그리고 넷째주(6/29)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또 금주내에 성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이 있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이 있으니

예수성심 6월은 대축일의 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은 물론 모든 대축일을 하나로 요약하면 ‘하느님의 사랑 대축일’입니다.

모든 대축일이 결국은 참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은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성체성혈 대축일로 사랑의 성체성사를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강론 제목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성체성사 예찬”이라 정했습니다.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자랑할 것도, 할말도 많은 성체성사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체성사로 살아가듯 참으로 믿는 이들 역시 성체성사로 살아갑니다.

명실공히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은 성체성사를 통해 고스란히 표현됩니다.

진정 하느님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은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합니다.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에 대한 교리서의 가르침입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

 

문득 양노원 지도신부로 계신 옛 장상의, “낙이라곤 미사 하나 뿐인데 내가 이분들을 두고 휴가를 갈 수 없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하루하루는 물론 평생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미사은총으로 우리는 ‘일상의 늪’,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고

아름답고 거룩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즈카르야 후렴도

충만한 기쁨과 흥겨움을 선사했습니다.

 

“너는 멜키체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이니라.”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방금 부른 성체송가의 은총은 얼마나 풍요로웠는지요! 제 주특기가 ‘하느님 자랑’입니다.

하느님 자랑하듯 계속 이어갑니다.

2007년 이때쯤 쓴, 가끔 인용했던 “온 세상 제대로 삼아”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불암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둥글고 커다란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성체 모시고, 태양성체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존엄한 품위의 존재로 살게 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 또한 삼위일체 신비와 흡사하여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같은 생각이 들지만

용기를 내어 세측면에 걸쳐 세독서 순서대로 특징을 나눕니다.

 

첫째, 성체성사는 ‘축복의 성사’입니다.

하느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 축복을 주시는 일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람을 축복한 멜키세댁은 예수님은 물론 사제들의 예표가 됩니다.

축복한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바랔’이 세 번 연속하여 나옵니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적들은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를 올리시며

우리 모두를 축복하십니다.

 

둘째, 성체성사는 ‘기억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일회적 성사가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성체성사의 은총을 기억하고 현재화하여 우리 모두 주님과 하나된 성체성사적 삶을 살게 합니다.

기억이 과거를 현재화하고 희망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날도 계속되는 성찬례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찬례는 언제나 교회 생활의 중심입니다. 순례여정중인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성찬례의 거행으로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고 전하면서, 선택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앉게 될

천상 잔치를 향하여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셋째,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미사 구조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주님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필요한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니

바로 미사의 전반부 말씀 전례를 상징합니다.

 

이어지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대로 성찬전례에 해당됩니다.

하늘 아버지와 늘 일치의 삶을 사셨던 주님은 제자들이 지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시니 그대로 기적이 일어나 황량했던 광야는 낙원의 천국으로 변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축복하신 빵을 떼어 군중에게 나눠주시니,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도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성체성사의 은혜가 차고 넘칩니다.

공동체는 일치와 더불어 주님을 닮은 섬김과 나눔의 사랑의 공동체로 변모됩니다.

다 달라도 공동체의 중심은 성체성사의 주님을 바라보고 모시니 공동체의 견고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성체성사는 삶의 중심입니다.

여기 성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는 수도형제들은 성당에서 성사(聖事)에 참여하여 축복을 받고,

식당에서 식사(食事)를 통해 육신의 힘을 얻고, 일터인 농장에서 농사(農事)로 먹을 것을 자급합니다.

이런 성사, 식사, 농사의 삼사(三事)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성체성사입니다. 

 

이 지상에서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자 선취(先取)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하늘과 새땅’의 천국을 앞당겨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다음 묵시록의 고백은 저절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Veni, Domine Iesu; 묵시22,20).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23(월)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그들을 거울로 삼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는 너와 달라.’라는 생각보다

‘나와 너는 크게 다르지 않아.’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외모를 가꾸기가 어렵듯이 형제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자신의 내면을 가꿀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우리와 함께 하는 형제들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장하도록 보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한재호 신부)

 

2.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 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이 지상에서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자 선취(先取)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하늘과 새땅’의 천국을 앞당겨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이수철 신부)

 

6/23(월)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6월23일(월) 6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