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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6월 24일 화요일[(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6월 24일 화요일[(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신 요한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며 뒤에 오실 구원자 예수님을 알립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을 기리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요한 1,6-7; 루카 1,17 참조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복된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
모든 신자의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39(138),1-3.13-14ㄱㄴ.14ㄷ-15(◎ 14ㄱ)
◎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
○ 제 영혼이 잘 아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1,76
◎ 알렐루야.
○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예물기도

주님,
복된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께서 오시리라 예고하고
이미 와 계심을 증언하였으니
저희가 그의 탄생을 기뻐하며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선구자의 사명>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78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셨네.

영성체 후 묵상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유다 산악 지방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는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어린양의 잔치로 기운을 되찾고 비오니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복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는 저희가
세례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성 요한 세례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축일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 그분의 삶은 겸손 소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사목하는 부주임 신부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신부님은 원래 올해 8월이면 비자가 끝나 귀국해야 했지만, 교구장님의 허락과 본인의 의지로 30개월을 더 있기로 했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사목, 때때로 피곤한 공동생활입니다. 그럼에도 함께 하겠다라고 말해준 그 선택이 고맙고, 그 마음 안에 요한의 겸손한 영혼이 비쳐 보입니다. 옆에서 본 신부님은 제게 부족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제입니다. 작년에도 부모님과 여행을 다녀왔고, 올해에는 과달루페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영어 미사와 영어강론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있습니다. 식복사의 도움 없이도 식사, 청소, 세탁을 잘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식복사가 도움을 주기에 처음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음식도 곧잘 합니다. 전례에 관심이 많습니다. 낡은 미사 경본도 한국에서 구매하였고, 제의실의 낡은 옷장도 새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성작도 도금해서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청년들을 사랑해서 성서 공부와 교리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사목 방향을 이해하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신부님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언제가 기뻐하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을 기억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다한 뒤에는 광야로 물러가고, 마침내 살로메의 춤값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의 이름을 잊지 않습니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이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받은 예언자입니다. 요한의 탄생 축일은 낮이 가장 긴 하지 즈음이며, 예수님의 탄생 축일은 낮이 가장 짧은 동지 즈음입니다. 낮이 길어지던 시점에 태어난 요한의 존재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작아집니다. 반면, 가장 짧은 낮에 태어난 예수님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더해 갑니다. 하늘의 자연 현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질서 있게 드러납니다.

 

수도자에 대한 시를 생각합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높이지 않고 떠벌이지 않으며 /앞세우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얕보지 않고 굽히지 않으며/ 남을 복되게 해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끝에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떠난다.” 이 시의 수도자라는 단어 대신, 오늘 우리 각자의 세례명을 넣어보면 어떨까요? “가브리엘, 너는 밀알처럼 썩는 아픔과 기쁨을 누리고자 오직 이름 없이 살기를 원하는가? 가브리엘, 너는 죄지은 이의 짐을 지고 가는 지게가 되기를 원하는가? 가브리엘, 너는 남을 복되게 해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끝에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 세례자 요한의 삶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그는 빛으로 보내진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며, 참된 제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처럼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은 결국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겸손한 자는 잊히는 듯 보이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빛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이 고백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 각자도 하느님의 도구로 살면 좋겠습니다. 빛을 드러내되, 그 빛의 주인이 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세례자 요한을 기리며, 우리 삶이 겸손한 증언이 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루카 1,57-66.80

 

우리 역시 바람잡이일뿐입니다!

 

언젠가 초보 수도자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수도자들에게도 문화 예술 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젊은 형제들 열 명과 함께 혜화동으로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우왕좌왕 길을 헤매다가 조금 늦게 들어가게 되었는 데...열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갑자기 우르르 들어가니, 주로 커플 위주의 관객들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본무대가 펼쳐지기 전에 한 재미있는 청년이 무대 위에 등장했습니다.

퀴즈도 내고, 선물도 주고, 참신한 개그도 펼쳐놓고, 한바탕 관객들을 재미있게 해주고는 쿨하게 퇴장했습니다.

 

이른바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 무대 막이 오르기 전에 관객들에게 기쁨도 주며 주 무대에 앞서 호응을 유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분위기 메이커이지 결코 무대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연극 주 무대의 서막을 알리는 안내자 역할에 충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경축합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습니다.

교회 전례력 역시 그의 큰 존재감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성인들은 세상 뜬 날을 축일로 잡아 기념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죽음뿐만 아니라 탄생일까지 챙겨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성인 중에서도 대성인에 속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토록 큰 인물, 대성인이 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신원 의식, 놀라운 겸손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중요한 진리 하나를 항상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의 오실 길을 닦는 선구자라는 것을. 나는 절대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바람잡이요 분위기 메이커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져, 어느 순간 소멸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주님께서 그를 특별히 총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최후가 참담하고 쓸쓸했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한 그에게 주어진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고통은 잠시였지만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남긴 불멸의 덕행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주인공이 아니라 바람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 저분이 주님이시다, 저분이 영생과 구원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하며

용감하게 외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루카 1,57-66.80

 

<신원과 사명>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사  49,1-2;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르야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뭍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제 삶의 서판 위에 당신이 주신 이름을 새기게 하소서.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23.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창세12,1-9 마태7,1-5

 

믿음의 여정, 떠남의 여정

<너 자신을 알라>

“늘 새로운 시작, 늘 영원한 현역”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위기간은 2013.3.13.-2025.4.21.까지 만12년 1개월 8일 이었고,

올해 부활대축일 다음날 4.21일 향년 88세로 선종하셨습니다.

재위 12년 동안 저는 거의 매일 교황님의 글을 읽을 정도로 교황님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사랑했고 심취했습니다. 

다시 뒤를 이은 레오14세 교황도 경청과 균형의 인품으로 벌써 많은 분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저의 관심 또한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분 다 교회를 사랑하며 믿음의 여정에 충실했던 교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소중하다.”

“신자이전에, 우리는 사람이 되도록 불림 받았다.”

레오 교황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제 성체성혈 대축일 삼종기도후 강론 요지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성체성사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세상 구원을 위한 궁극적 희생의 사랑이다.”

 

무엇보다 레오 교황과 오랫동안 친분을 맺었던 페루 코사카 교구장 노르베르트 스트로트만 주교의

레오 교황에 대한 인터뷰 대목이 좋았습니다.

 

“그는 결코 사치스럽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고 항상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교구도 잘 이끌었고 어려운 문제들도 잘 해결했습니다.

추기경단 평균나이보다 훨씬 젊은 69세 나이에, 그와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추기경단에 없어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고 봅니다. 

 

그분은 북미와 남미를 알고, 로마의 안젤리꿈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신학생 교육 경험이 있고,

다국어에 능통하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총장으로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그는 조용한 대표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에 기름을 붓지 않고 오히려 신중하게 행동합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니지만, 항상 매우 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레오 교황은 늘 보편교회의 관점에 중심을 두고 보편교회의 일치를 생각하며 판단할 것입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오늘 창세기의 믿음의 사람, 아브람을 연상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을 부르심으로 새로운 구원역사를 펼치십니다. 

이런 구도여정에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자극이 됩니다.

 

“사람들은 노력에 한계를 두고서는 재능에서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다산>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칩니다.’ 공자가 답했다. ‘너는 지금 미리 선을 긋고 물러나 있구나.’”

 

옛 현자에게서 불퇴전(不退轉)의 용기와 정신을 배웁니다.

아브람은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아브람에 대한 장엄한 축복선언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마도 아브람은 평생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람뿐 아니라 우리 역시 축복받은 존재로 불림받았고 주님의 축복을 나누며 살아야 함을 믿습니다.

아브람이 롯과 함께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습니다.

새삼 믿음의 여정은 늘 새로운 시작의 떠남의 여정이자 나이에 상관없이 늘 현역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군인으로 말하면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이고, 학생으로 말하면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삶입니다.

사실 아브람은 끝까지 믿음의 여정,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영원한 현역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정주의 수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이요 안으로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처럼, 끊임없이 내적 떠남의 여정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아브람은 떠남의 여정중에 수시로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음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오늘 말씀중 제단을 쌓았다는 두 대목입니다.

아브람은 제단을 쌓으며 축복된 존재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믿음의 여정, 떠남의 여정중에 있는 영원한 현역으로서

자신 신원을 새롭게 확인했을 것입니다.

아브람보다 더 많이 우리는 매일 성전에서 미사를 통해, 시간경을 통해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우리의 신원을 늘 새롭게 합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여정, 떠남의 여정이 오늘 복음에 대한 참 좋은 답이 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계속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무지의 결과 교만으로 남을 심판하고, 제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무지, 무식하고 용감하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정말 겸손하고 지혜로워 나의 한계와 부족을 안다면,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무지에 눈먼 자신을 안다면,

내눈에 들보를 안다면, 절대로 남을 심판하지도, 남의 눈에 티를 뽑겠다는 만용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니가 뭔데?” “니나 잘 해!”라는 자연스런 반발입니다.

정말 하느님께 모두가 소중한 사랑받는 존재임을 안다면 결코 심판하지 못할 것이며 심판은 하느님께 맡길 것입니다.

 

바로 아브람처럼 산전수전 시련과 고난의 믿음의 여정, 떠남의 여정은 자기를 깨달아 알아가는

회개의 여정과도 일치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참 나를 알아감으로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병은 치유되어 겸손에 이르게 되고

저절로 심판은 멈출 것입니다.

정말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자가 남을 심판하지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는 결코,

절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차별이 아닌 구별을, 심판이 아닌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과 교만의 무지에 대한 답은 평생 믿음의 여정, 떠남의 여정에 충실함에 있음을 봅니다.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시며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 하오리다.”(시편73,28).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24(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되새김 구절

 

1. 교회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을 기억합니다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자신의 사명을 다한 뒤에는 광야로 물러가고마침내 살로메의 춤값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하지만 교회는 그의 이름을 잊지 않습니다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이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받은 예언자입니다요한의 탄생 축일은 낮이 가장 긴 하지 즈음이며예수님의 탄생 축일은 낮이 가장 짧은 동지 즈음입니다낮이 길어지던 시점에 태어난 요한의 존재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작아집니다반면가장 짧은 낮에 태어난 예수님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더해 갑니다하늘의 자연 현상 속에서도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질서 있게 드러납니다.

 

수도자에 대한 시를 생각합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높이지 않고 떠벌이지 않으며 /앞세우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얕보지 않고 굽히지 않으며/ 남을 복되게 해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끝에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떠난다.” 

(조재형 신부)

 

2. 세례자 요한은 중요한 진리 하나를 항상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의 오실 길을 닦는 선구자라는 것을. 나는 절대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바람잡이요 분위기 메이커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져, 어느 순간 소멸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주님께서 그를 특별히 총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최후가 참담하고 쓸쓸했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한 그에게 주어진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고통은 잠시였지만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남긴 불멸의 덕행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주인공이 아니라 바람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 저분이 주님이시다, 저분이 영생과 구원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하며

용감하게 외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사  49,1-2; 49,5)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제 삶의 서판 위에 당신이 주신 이름을 새기게 하소서.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무지, 무식하고 용감하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정말 겸손하고 지혜로워 나의 한계와 부족을 안다면,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무지에 눈먼 자신을 안다면,

내눈에 들보를 안다면, 절대로 남을 심판하지도, 남의 눈에 티를 뽑겠다는 만용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니가 뭔데?” “니나 잘 해!”라는 자연스런 반발입니다.

정말 하느님께 모두가 소중한 사랑받는 존재임을 안다면 결코 심판하지 못할 것이며 심판은 하느님께 맡길 것입니다.

 

심판과 교만의 무지에 대한 답은 평생 믿음의 여정, 떠남의 여정에 충실함에 있음을 봅니다.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이수철 신부)

 

6/24(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오늘의 기도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제 삶의 서판 위에 당신이 주신 이름을 새기게 하소서.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6월24일(화) 7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