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6월 25일 수요일[(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6월 25일 수요일[(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고 모인 사람들을 지켜 주시니
남북으로 갈라진 저희 민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흩어진 가족들이 한데 모여
기쁘게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예레 31,10.11-12ㄱㄴ.13ㄷㄹ-14(◎ 10ㄷ 참조)
◎ 주님, 흩어진 당신 백성을 모으소서.
○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사제들에게는 기름진 것을 배불리 먹이고, 내 백성을 내 선물로 가득 채워 주리라. ◎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빛, 온 세상에 퍼져 있어도 갈라지지 않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자녀들이 예물을 바치며 청하오니
이 사랑의 성사가 저희 민족을 하나로 묶어 주고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가 가진 것을 나누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한국 고유 감사송 4 : 민족의 일치와 통일을 이루시는 하느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선조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주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일치의 표상인 거룩한 교회를 세워 주셨나이다.
이 나라가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져 쓰라린 시련을 겪고 있으나
주님께서는 불가능을 모르시며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시니
주님의 오묘한 섭리로
저희가 민족 통일의 희망을 키우고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침내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이끄시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한국 순교 성인들과 함께
저희도 기꺼이 주님을 찬미하며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콜로 3,14 참조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이니, 무엇보다 사랑을 입어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사랑과 일치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하루빨리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남북의 온 겨레가 함께 모여
기쁨의 잔치를 나누며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 우리는 남과 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어릴 적 친구와 다툰 기억이 납니다. 친구는 제 목을,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고 서로 울며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손을 놓았고, 웃으며 어깨동무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5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란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먼저 손을 놓는 용기와, 다시 손을 잡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70년이 넘도록 서로 손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등의 끈, 긴장의 끈을 여전히 붙들고 있습니다. 남과 북은 대립과 불신, 이념과 체제 속에서 너무 오랜 시간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 속에서도 길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새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햇볕정책’을 기억합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서 문화와 경제 협력의 자리를 마련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시작은 ‘소’였습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소 한 마리를 팔아서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성공한 정주영 회장은 천 마리의 소를 끌고 북으로 갔습니다. 천 마리의 소와 천 마리의 소를 태우고 갔던 트럭을 북한에 주고 왔습니다. 

 

이렇게 남과 북의 경제 협력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그 뒤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백두산 관광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예술단이 남한으로 와서 공연하였고, 남한의 예술단이 북한으로 가서 공연하였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을 넘어와서 회담하였고,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으로 가서 연설하였습니다. 

 

이렇게 무르익은 평화의 분위기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으로 이어졌습니다. 3번에 걸친 회담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북한과 미국의 평화 회담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미국은 다시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한국은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남과 북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자리’가 다시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참으로 화해하고, 민족이 하나 될 수 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찰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용서의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산가족이 만나고, 남과 북이 단일팀으로 국제경기에 나가고, 남과 북의 예술인들이 평양과 서울에서 공연하고,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백두산 관광도 계속되고, 서울, 평양을 이어주는 고속도로, 철도가 개통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군사적인 통일은 아직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우리가 서로 협력을 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는 일들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으로 풀어나가던 일들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치유되기를 기도하며, 남, 북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외교가 먼저가 아닙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정치보다 깊은 것은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6월 25일,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면서도, 그 속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섭리를 믿으며 기도해 왔습니다. 이 기도가 언젠가 ‘민족 기쁨의 날’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우리가 먼저 이 미사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때, 민족의 아픔 속에서도 새로운 봄은 찾아올 것입니다. 그 봄은 무력이나 이념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마태 18,19-22

 

좋은 영성 서적 한 권이 주는 축복과 은총!

 

여름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3박 4일, 혹은 일주일 휴가를 가서 마냥 유흥만 즐긴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휴가가 아닐 것입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앉거나, 전망 좋은 카페 창가에 앉아 좋은 영성 서적 한 권 읽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휴가 겸 피정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때로 좋은 책 한 권이 우리 삶의 근본을 흔들기도 하고, 삶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 휴가 때 읽어보시면 좋을 영성 서적 한 권을 소개합니다.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파블로 도밍게스 프리에토 신부님(1966-2009)의 ‘주님의 기도로

피정하기’(성바오로, 구입 문의: www.paolo.kr)입니다.

광주대교구 강기남 요셉 신부님께서 아주 정성껏, 정교하게 번역을 잘 해주셔서, 읽기가 편합니다.

 

불과 마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파블로 신부님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이 하루를 일 년처럼

그렇게 바쁘게 사셨습니다.

신학교 교수 겸 학장으로 후학들을 양성했고, 꾸준히 논문을 쓰셨으며, 틈틈이 사제나 수도자들의 연례 피정을 동반하셨습니다.

 

과로를 거듭하던 파블로 신부님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던 동료 사제가 삶의 속도를 좀 늦추고

건강을 좀 돌보면 어떻겠냐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파블로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시간은 하느님의 선물이잖아요? 우리는 그 선물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하고요.

주님께서 정해주신 저의 마지막 시간이 오면, 그때부터는 저도 평안한 안식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파블로 신부님께서 어찌 그리 정확하게 제 심정을 잘 대변해 주셨는지...저도 신부님처럼 꽤 바쁘게 지내는 편인데,

이유는 파블로 신부님과 똑같습니다.

 

목숨 다하면 한 줌 흙으로 변할 것이고, 썩어질 육신인데, 뭐 그리 아까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그분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고민하며,

뭐라도 주님과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자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주님의 기도로 피정하기’는 등산애호가셨던 파블로 신부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25일 전,

콜롬비아 교구 사제들의 연례 피정 때 하셨던 강의록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강의실에 앉아서 파블로 신부님의 강의를 듣는 그런 생생한 느낌입니다.

 

파블로 신부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이며, 우리 신앙생활의 좋은 길잡이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후다닥, 순식간에 바치고 마는 주님의 기도를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 끊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내적 생명을 위한 참된 학교와 같은 기도입니다”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어떤 기도도 주님의 기도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님의 기도보다 더 효과적으로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없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1-22)

 

이 부분에 대해서 파블로 신부님은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닮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깊이 일치되어 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원수를 용서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용서하는 행위는 가장 순수한 무상성이 드러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전삼용 요셉 신부 강론

 

광장 없이는 일치도 없다

찬미 예수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분단 70년이 넘는 세월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소설가 최인훈의 『광장』은 바로 그 분단의 비극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고전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왜 통일이 되어야 하는지 묵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에 사는 철학과 학생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유명한 언론인이었으나 해방 후 월북하여 북에서 고위 간부가 되었습니다. 이명준은 남한 사회를 '개인의 밀실'만 있고 진정한 소통과 연대가 이루어지는 '광장'은 없는 곳이라 비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 윤애와의 관계에서도, 부패하고 불의가 만연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존재 때문에 남한 경찰의 혹독한 조사와 학대를 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남한 사회에 대한 환멸은 극에 달합니다. 그는 마침내 '혁명과 이념의 광장'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월북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북한의 현실은 또 다른 절망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가 억압된 채, 오직 당의 구호와 집단주의만이 강요되는 '닫힌 광장'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연인 은혜를 만나 잠시 사랑의 기쁨을 느끼지만, 북한 사회 역시 그가 꿈꾸던 이상향이 아님을 깨닫고 깊이 좌절합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명준은 인민군 장교로 참전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옵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그는 남과 북, 양쪽 체제가 이념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자행하는지를 똑똑히 목격합니다. 부상당한 그가 간호장교가 된 은혜를 다시 만나지만,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폭격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가 된 이명준은 포로송환 과정에서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남한은 '부패한 밀실'이었고, 북한은 '가짜 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남과 북의 이념 대립에 환멸을 느끼며, 제3국인 '중립국'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를 태우고 인도로 향하던 배 위에서 이명준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찾던 진정한 '광장', 즉 이념을 넘어선 인간적인 사랑과 연대의 공간은 남에도, 북에도, 그리고 중립국이라는 제3의 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는 죽은 연인 은혜와 그녀가 낳았을지도 모를 자신의 딸, 그리고 푸른 바다를 바라봅니다. 결국 그는 두 마리의 갈매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기도할 때 두 사람 이상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희망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두 마음이 같은 것을 희망하면 분명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치의 광장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명준은 남과 북에 각각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남과 북이 갈라져서 그 사랑이 이루어질 광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 언제일까요? ‘하나’가 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남녀가 하나 되는 시간을 영원히 지속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순간일 뿐입니다. 무언가 관계를 하나로 이어줄 광장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분열은 그것 자체로 같은 민족 안에 갈라져도 살아갈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새겨줍니다. 그런 것이 남북한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일치로 나아가는데 분명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이런 분리된 광장에서 누구와도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이명준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성지순례 하면서 느낀 것은 이 성지순례를 순례하는 분들이 일치의 광장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성패는 많은 곳을 보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성지순례 하면서 친구를 사귀고 하나로 일치한 사람이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친했던 사람과도 사이가 틀어진 사람입니다. 성지순례가 일치의 광장인 것처럼, 우리나라도 일치의 광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24.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49,1-6 사도13,22-26 루카1,57-66.80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 “성 요한 세례자”

<성소, 광야, 겸손, 선포>

 

요즘 흰연분홍 자귀나무꽃 은은한 향기가 가득합니다. 꽃말은 ‘환희 또는 가슴 두근거림’입니다.

 

“향기맡고

 뒤돌아 찾아 내는 

 은은한

 자귀나무꽃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다”<2025.6.24.>

 

오늘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의 겸손의 향기가 바로 이러합니다.

새벽 교황청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레오 14세 교황의 주일 삼종기도후 강론시 한 대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어느때 보다 더욱 오늘날 인간성은 평화를 절규하고 호소합니다”

(Today more than ever, humanity cries out and pleads for peace)

깊이 마음에 새기고자 괄호안에 영어를 병기합니다. 인간성 대신 하느님을, 예수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절규하고 호소하십니다. 

 

지구촌 어디서나 유형 무형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말 전쟁을 한다면 주님의 ‘평화의 전사’가 되어

영적전쟁만 해야 할 것입니다.

새삼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이란 성구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태양처럼 모셨던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선구자,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빼놓고 유일한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역시 예수성심성월 6월 중심부에 자리 잡음으로 예수님과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줍니다.

 

얼마전 까지 왕성했던 수도원 원내 성모자상 주위의 금계국꽃들을 잊지 못합니다.

오전에서 오후까지 태양따라 가는 해바라기 모습들이 너무 신기하여 써놓았던 글입니다.

 

“참 눈부시다

 주님인 태양을 반사하니

 황금빛 얼굴

 성모자상곁 금계국꽃들

 주님인 

 태양을 닮았다

 주위가 환하다”<2025.6.5>

 

요즘 수도원 배밭은 자매들의 배봉지싸기가 한창입니다.

흡사 배밭 하늘에 별들이 달리듯 희봉지를 쌀 때마다 떠오르는 눈부시게 빛나는 희망의 별들,

사랑의 별들처럼 생각됩니다.

바라 볼 때마다 참 평화롭고 마음이 따뜻합니다.

 

마치 성모자상 곁의 금계국꽃들처럼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태양처럼 흠모(欽慕)했던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하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이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예수님 없는 성 요한 세례자를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네 측면에 걸친 답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첫째, 성소입니다. 

요한 세례자가 그렇듯 우리 믿는 이들은 결코 무명의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불림받은 마치 ‘신의 한수’같은 귀한 성소자라는 것입니다.

우연처럼 보여도 지나고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요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예수님은 물론 요한 세례자 그리고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나를 부르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

 

하느님께 주어진 요한이란 이름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으로 즈카르야가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 썼을 때

그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자 하느님을 찬미했다 합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불림받은 존재임을 입증하는 복음입니다.

요한 세례자 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이스라엘입니다.

주님께 불림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존재로 주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광야입니다.

인생 광야 여정이란 말도 있고, 도시의 광야라는 말도 있듯이 예나 이제나 광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우리 삶의 본질은 함께 해도 내면은 외롭고 쓸쓸한 광야입니다.

예전 광야를 찾았던 사막의 수도자들의 목표는 둘이었으니 하나는 주님과 만나는 것, 하나는 악마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광야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을 만날 자리요 악마와의 영적싸움터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광야인생은 낙원인생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새롭게 탐구하며 배워야 할 광야의 영성입니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심신을 단련했던 요한 세례자는 광야에서 낙원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가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셋째, 겸손입니다.

광야영성의 진정성은 겸손의 덕에서 드러납니다.

겸자무적입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최고의 무기는 겸손입니다.

악마가 다 모방해도 겸손을 모방하지 못합니다.

끝가지 주님을 앞세웠던 요한 세례자는 참으로 자기를 알았던 지혜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를 언급합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와 더불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고백한 요한 세례자야 말로 겸손의 대가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에 대한 답도 겸손뿐임을 깨닫습니다.

요한 세례자가 물음이라면 예수님이 답이듯 우리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선 우리 존재의 신비는 해명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알게 하는 겸손이야 말로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입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겸손(humilitas)과 사람(homo)입니다.

흙처럼 겸손하여 사람이니 겸손은 참사람의 표지입니다. 

 

넷째, 선포입니다.

성소도 광야도 겸손도 궁극의 목표가 아닙니다.

궁극의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 복음의 선포요 이를 통해 완성되는 성소, 광야, 겸손입니다.

선포나 선교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타종교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란 정의가 바로 선포를 함축합니다.

오늘 이사야서 마지막 구절은 믿는 모두에게 부여되는 사명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각자 세상의 중심인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의 빛으로 사는 복음 선포입니다.

이래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라 하고,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 칭하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수도공동체 자체가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존재론적 복음선포에 충실한 여기 정주의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에서도 한결같음입니다.

‘느긋한 걸음이 가장 멀리 가니 먼 길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은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다산>.

그러니 우보천리, 호시우행의 자세로 소처럼 사는 것입니다.

1949년생 소띠라는 사실에 저는 만족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 요한 세례자를, 우리 예수님을 닮아 각자 삶의 자리 광야에서

충실히, 한결같이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25(수)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되새김 구절

 

1.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치유되기를 기도하며, 남, 북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외교가 먼저가 아닙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정치보다 깊은 것은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6월 25일,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면서도, 그 속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섭리를 믿으며 기도해 왔습니다. 이 기도가 언젠가 ‘민족 기쁨의 날’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우리가 먼저 이 미사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때, 민족의 아픔 속에서도 새로운 봄은 찾아올 것입니다. 그 봄은 무력이나 이념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1-22)

 

이 부분에 대해서 파블로 신부님은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닮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깊이 일치되어 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원수를 용서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용서하는 행위는 가장 순수한 무상성이 드러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양승국 신부)

 

3.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 언제일까요? ‘하나’가 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남녀가 하나 되는 시간을 영원히 지속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순간일 뿐입니다. 무언가 관계를 하나로 이어줄 광장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분열은 그것 자체로 같은 민족 안에 갈라져도 살아갈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새겨줍니다. 그런 것이 남북한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일치로 나아가는데 분명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이런 분리된 광장에서 누구와도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이명준이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4.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와 더불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고백한 요한 세례자야 말로 겸손의 대가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에 대한 답도 겸손뿐임을 깨닫습니다.

요한 세례자가 물음이라면 예수님이 답이듯 우리도 똑같습니다. (이수철 신부)

 

6/25(수)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오늘의 기도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1-22)

 

이 부분에 대해서 파블로 신부님은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닮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깊이 일치되어 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원수를 용서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용서하는 행위는 가장 순수한 무상성이 드러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은총을 제게 주소서.

아멘.

 

- 2025년 6월25일(수) 8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