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6월 30일 월요일[(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본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8,16-33
사람들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을 16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
○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시니
이 성찬례가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또는>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본당 주보에 ‘치유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명단’이 있습니다. 작년에 와서 명단을 매주 읽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회복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분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 크기도 다양합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아들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몇 번의 수술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들도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걷고 있습니다. 근육 무력증이 찾아와서 지금은 손가락만 움직이는 형제님도 있습니다. 형제님은 눈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30년 넘게 신장 투석을 하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늘 자매님의 투석을 도와주었던 형제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투석이 걱정된다고 하였습니다. 30년 넘게 간 이식을 기다리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기증자가 나타났고, 30년 만에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매 주일 ‘치유를 청하는 명단’을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성경이 있습니다. ‘욥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고통이라는 손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병든 가족을 돌볼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또는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짓눌릴 때,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욥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병까지 얻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분명히 네가 잘못한 게 있겠지. 하느님은 공정하시니까 너의 죄를 벌하시는 거야.” 이런 논리를 ‘상선벌악’과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말합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신학을 거부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고통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의 신비, 창조의 위대함을 보여주시며 인간의 지식과 이성의 한계를 일깨워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고통의 이유를 가르치기보다는,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부재하시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신앙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을 거두어 보십시오. 그러면 저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시던 분도 주님이시요, 거두신 분도 주님이시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 고백은 인간의 연약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다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외적인 복이 아니라, 욥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였고, “귀로만 듣던 주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욥처럼 이해 안 되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 실망하거나, “왜 하느님이 이러시나!” 하고 하느님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욥은 끝까지 하느님께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향해서 울고, 따지고, 물어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너는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먼저 따지고 계산하는 길이 아니라, 먼저 따르는 길입니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하느님을 믿는 길, 바로 욥이 걸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때로 욥처럼 이유 모를 고통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저는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이유 모를 일들이 많지만, 그 순간마다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고, 더 깊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3주 월요일
복음: 마태 8,18-22
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합시다!
성인(聖人)들이 지녔던 성성(聖性)의 덕목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극단적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 보스코 역시 청빈한 삶과 관련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길거리 가난한 청소년들의 보금자리 마련과 교육을 위한 모금에 전념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호주머니 속에는 동전 한 푼조차 없었습니다.
청빈 생활과 관련해서 돈 보스코께서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소박한 식사를 하는 것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크나큰 영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을 때 청빈생활과 관련해 저희 수도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과 교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고 해를 끼치는지 모릅니다.”
교회의 미래인 예비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뼈아픈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신부나 수녀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제 개인비서 신부님은 어딜 가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고급 승용차를 갖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단을 구성해서 3년 가까이 전도 여행을 하셨는데, 모든 것을 잘 갖춘 여행단이 아니라
하루하루 도움의 섭리에 맡기는 그런 형태였습니다.
이곳 저 곳 다니시다가 환영하면 머무시고, 여의치 않으면 노숙생활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렇게 극단적 청빈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1)
청빈의 서원은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정말이지 큰 도전이고 풀어야할 과제입니다.
청빈과 관련해서 우리 수도자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형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청빈을 외치지만 절대로 청빈한 법이 없습니다.
수도자들 역시 청빈을 서원하지만 결코 청빈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청빈을 덕을 자신의 삶과 비교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부를 죄악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된 부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이자 선물로 여기셨고,
그 축척된 부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가난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가난을 찾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가난은 자랑꺼리요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하다보니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습니다.
사실 가난은 뭔가 결핍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가난입니다.
오늘날 이 물질만능의 세상 앞에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느끼게 만드는 악령과 싸우는 일입니다.
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하는 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13주 월요일
복음: 마태 8,18-22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8,18 참조).
곧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 지라 군중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겠다고 나서는 제자입니다.
여기에서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가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 안에서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 8,20)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삶이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임을 밝히십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삶이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8,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썩어 묻힐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을 따르는 길임과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아니. 대체 어디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혹 여전히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에 애착하고 매여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나를 따라라.”
(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기둥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29.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교황주일)
사도12,1-11 2티모4,6-8.17-18 마태16,13-19
더불어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교회의 반석 성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입당성가 291장입니다. 오늘은 가톨릭교회의 양대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자 ‘교황주일’입니다.
오늘 대축일 미사중 다음 감사송 역시 앞서의 입당성가처럼 이 두분 사도의 참 좋은 보완관계를 잘 드러내며
복된 생애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 얼마나 서로의 삶은 물론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지요,
모두 달라도 일치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하기에 평생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음을 봅니다.
우열관계나 우선순위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이니 저절로 경쟁의식보다는
서로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고백의 모범이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일치의 중심인 그리스도께 대한 베드로의 고백과 이어지는 주님의 축복이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평생 따르고 믿어야할 분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전히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신앙고백입니다.
믿음은 고백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께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찬미를, 감사를 고백하면서 날로 굳건해지고
새로워지는 믿음이자 성소요, 주님과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갈 때 참나를 알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면 나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한 주님의 감격에 벅찬 칭찬과 더불어 축복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주님을 고백했을 때 ‘베드로’라는 이름의 신원을 선사받습니다.
신앙고백과 더불어 우리 또한 또 하나의 베드로가 되고 이런 우리의 반석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실 것이니
우리 또한 복된 책임감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제1대 교황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여 교회 일치의 표징이 되는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요,
근거한 교황주일입니다.
이어지는 축복도 베드로 사도를 계승한 가톨릭교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땅과 하늘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졌음을 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 때, 땅과 하늘이 하나로 이어진
지상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봅니다.
믿음의 여정이자 믿음의 전사인 베드로 사도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순탄대로의 믿음의 여정이 아니라 믿음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삶을 통해 진전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믿음의 기적이자 삶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님의 기적입니다.
알게 모르게 주님의 기적같은 보호가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존재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의 은총입니다.
인명은 재천이라 우리의 생명도 하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기적에 앞서 교회 공동체의 열렬하고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기에 주님은 당신 천사들을 보내시어
베드로 사도를 살려 주셨음을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이래서 혼자의 믿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립된 개인신앙은 약하지만 교회공동체의 신앙은 강합니다.
교회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께 깊이 뿌리내릴수록 푸른솔같은 믿음입니다.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믿음의 전사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우리의 믿음에 신선한 충격이 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날마다 하루를 마칠 때 마다 이런 고백을 바칠수 있다면 마침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봅니다.
오늘날 베트남의 초석을 이룬 국부로 존경받는 호치민의 “우리는 싸워야 할 때 싸웠고, 기다려야할 때 기다리며”
매사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다산 현자의 체험적 고백도 그가 얼마나 믿음의 전사답게 치열히 살았는지 보여줍니다.
“어른이란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다. 꾸미고 감추려는 마음을 덜어내야 진짜 어른이 된다.”
“어른이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날마다 몸부림치는 존재다.”
하루하루 날마다 삶의 여정에 얼마나 충실한 다산의 삶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삶역시 이러했을 것입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기적과 더불어 주님께 찬미와 감사의 고백을 드리는 바오로의 기도도 감동적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그대로 주님의 전사로 날마다 영적 싸움중인 우리의 기도로 바쳐도 전혀 손색이 없겠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양대 기둥이자 주님의 전사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시기까지 시종여일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였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두 사도를 닮아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게 해주십니다.
끝으로 교황주일에 ‘교황을 위한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모든 믿는 이들의 목자요 인도자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일꾼 레오 14세를
교회의 목자로 세우셨으니 그를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맡은 양 떼를 잘 보살피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30(월)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욥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였고, “귀로만 듣던 주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욥처럼 이해 안 되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 실망하거나, “왜 하느님이 이러시나!” 하고 하느님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욥은 끝까지 하느님께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향해서 울고, 따지고, 물어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저는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이유 모를 일들이 많지만, 그 순간마다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고, 더 깊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조재형 신부)
2. 가난은 뭔가 결핍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가난입니다.
오늘날 이 물질만능의 세상 앞에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느끼게 만드는 악령과 싸우는 일입니다.
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하는 일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나를 따라라.”
(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기둥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가톨릭교회의 양대 기둥이자 주님의 전사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시기까지 시종여일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였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두 사도를 닮아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게 해주십니다.
끝으로 교황주일에 ‘교황을 위한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모든 믿는 이들의 목자요 인도자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일꾼 레오 14세를
교회의 목자로 세우셨으니 그를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맡은 양 떼를 잘 보살피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이수철 신부)
6/30(월)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나를 따라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나를 따라라.”
(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기둥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6얼30일(월) 8시3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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