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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화성 용주사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습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출처 : 용주사 / www.yongjoosa.or.kr

 

가람의 구성


 

화성 용주사 사천왕문

 

화성 용주사 사천왕 1

좌측 서방 광목천왕 : 광목천왕은 부릅뜬 눈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나쁜 말을 굴복시킨다.

                             인간의 선악을 살펴 그것에 상응하는 상과 벌을 준다.

                             손에 용과 여의주를 잡고 있어 조화를 부린다.

우측 북방 다문천왕 : 다문천왕은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불법을 듣는다는 뜻에서 다문천왕이라고 한다.

                             손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보탑을 들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인간에게 많이 알려주는 역활을 하고 있다.

 

화성 용주사 사천왕 2

좌측 동방 지국천왕 : 지국천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손에 비파를 들고 항상 음악을 연주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니 나라는 자연적으로 부강해지고 안락하여 스스로 나

                             라가 지켜지는 것이다.

우측 남방 증장천왕 : 증장천왕은 불자들의 지혜의 덕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장시키는 것이 주된 임무이다.

                             그래서 들고 있는 칼로 인간의 번뇌를 끊어 버리면 바로 지혜가 나오므로 번뇌를 끊는 취모검을 들고 인강의 지혜

                             와 복덕을 늘려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화성 용주사 입구

 

화성 용주사 입구 홍살문

 

화성 용주사 홍살문 안내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화성 용주사 홍살문과 소나무

 

화성 용주사 홍살문과 삼문

 

화성 용주사 삼문

 

화성 용주사 삼문 현판 1

 

화성 용주사  삼문 현판 2

 

화성 용주사 삼문 뒷면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됩니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습니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습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입니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입니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합니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합니다.

 

화성 용주사 천보루 1

 

화성 용주사 천보루 2

 

화성 용주사 천보루 3

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납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습니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입니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됩니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합니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습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民家)의 건물양식 그대로입니다.

 

화성 용주사 천보루 밑으로 본 대웅보전(경기문화재자료 제35호)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경기문화재자료 제35호) 현판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경기문화재자료 제35호) 측면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킵니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습니다.

 

화성 용주사 향나무 1

 

화성 용주사 향나무 2

 

화성 용주사 범종각 1

 

화성 용주사 범종각 2

 

화성 용주사 범종각 3

범종은 사원건물에서 쓰는 종을 가리킵니다.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신묘하여 예불의식 등에 쓰이게 되었는데 범종의 소리는 중생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합니다. 이처럼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난다고 하여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을 향하면 정면에 법고각과 마주 보고 있는 범종각이 있습니다.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하였으며, 이 전각안에 있는 범종은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범종을 살펴보면,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唐座, 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습니다.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용통은 연주문(連珠紋)을 돌렸습니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습니다.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습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半圓圈)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종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또 하대의 무늬에 당초가 한번 돌아 갈 때마다 그 중앙에 8엽 내지는 9엽의 연꽃무늬를 독립하여 배치하고 유곽의 문양대는 안쪽과 바깥쪽의 작은 띠 주변에 연주무늬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서로 연결되는 당초무늬 띠를 둘렀습니다. 유두는 둥근 연꽃잎 위에 도드라져 각 유곽마다 아홉 개씩 있습니다. 종신 아래 둥그런 당좌의 가운데 부분은 8엽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밖으로 연주무늬띠를 도렸습니다. 그리고 연주무늬를 다시 두르고 가장 바깥의 띠에도 연주무늬를 돌려 새김으로써 마무리 하였습니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하였으며 보살의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줍니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追刻)한 명문에 의하면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고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하였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습니다. 불기 2950년 7월 주지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종의 크기는 총높이 144㎝, 입지름 87㎝, 두께 5.8㎝ 상대너비 11㎝, 하대너비 12㎝, 당좌 지금 17㎝이며, 900여 년전의 이른 새벽, 막 동터오는 화산(花山)에 울려 퍼졌을 그 우렁차고 은은한 소리는 아마도 무명에 헤매이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일깨웠을 것입니다.

 

화성 용주사 석탑

 

화성 용주사 용주사 대웅보전(경기문화재자료 제35호) 후면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후면 전경

 

화성 용주사 법고각 주변 전경 1

 

화성 용주사 법고각 주변전경 2

 

화성 용주사 나유타료

 

화성 용주사 나유타료 주변 전경

 

 

화성 용주사 천불전

 

화성 용주사 홍제루

 

화성 용주사 법고각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보통 북이라고 합니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四物)의 하나로서 짐승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냅니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북은 조석예불에 쓰이므로 대개 사물과 함께 보관되나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법고각과 범종각이 마주보고 서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지옥중생을 위한 범종, 축생을 위한 북, 물고기를 위한 천보루의 목어, 그리고 하늘의 조류를 위한 만수리실의 운판이 함께 어우러져 온갖 중생을 지혜의 세계로 인도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인지 용주사에는 늘 각종 새가 끊이지 않고 날아듭니다.

 

화성 용주사 범종각

 

화성 용주사 범종 안내문

 

화성 용주사 용주사 범종(국보 제120호)

 

화성 용주사 천불전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입니다. 이 자리에 최근 3년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룹니다.

 

 

 

건물은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습니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습니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하여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습니다.

 

 

 

 

 

 

화성 용주사 시방칠등각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입니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합니다.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합니다.

 

화성 용주사 부모은중경탑 1

 

화성 용주사 부모은중경탑 2

 

화성 용주사 지장전 정면

 

화성 용주사 지장전 측면

 

화성 용주사 전강대종사 사리탑 1

 

화성 용주사 전강대종사 사리탑 2

 

수원 융릉(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과 건릉(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침사찰 이다

효성전에 이들의 위패를 모셨다. 그래서 능에 있는 홍살문이 있다.

재실 삼문이 좌우 7칸 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이 특징이다.

효성전 앞에 '부모은중경탑'이 있다.

'회양목'이 유명하다고 함.

 

용주사 연혁 1 

유형               : 유적

시대               : 고대/남북국

성격               : , 사찰

건립시기/연도 : 854(문성왕 16)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花山)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854(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광종 3)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1790(정조 14)에 사일(獅馹)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이 절은 전국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다. 그 뒤 1900년에 용해(龍海)가 중수하였고, 1911년에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안성·남양·죽산·진위·음죽·용인·고양·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1931년에 강대련(姜大蓮)이 중수하였고, 1955년 사찰 정화 뒤에 조계종 제2교구 본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관응(觀應)이 불교 전문강원을 개설하였으며, 196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다. 1966년 주지 희섭(喜燮)이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의 역장(譯場)을 두었고, 1969년 전강(田岡)이 중앙선원(中央禪院)을 설립하여 1975년 지장전을 중수하고, 1977년 일주문을 세웠으며, 1981 3층의 부모은중경탑을 세웠다. 1985년 불음각(佛音閣), 1986년 중앙선원 건물을 지었다. 1987년 대웅보전을 중수하고, 1988년 호성각을 지었다. 1993년 천불전을 짓고 만수리실을 개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장전(地藏殿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범종각·법고각(法鼓閣봉향각(奉香閣)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天保樓나유타료(那由他寮만수리실(曼殊利室삼문각(三門閣일주문·수각(水閣동별당(東別堂) 등이 있다. 또 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금동향로, 12호인 청동향로, 13호인 상량문, 14호인 전적수사본(典籍手寫本), 15호인 병풍, 16호인 대웅전 후불탱화, 17호인 동판·석판·목판의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 등이 있다.

참고문헌

『전통사찰총서 3-경기도Ⅰ(사찰문화연구원, 1993)

『용주사사지』(사찰문화연구원, 1993)

『용주사본말사지(龍珠寺本末寺誌)(본말사주지회, 1984)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권상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용주사 연혁 2

요약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의 화산(華山) 기슭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8 

본문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는데, 이곳에는 원래 854(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後佛幀畵)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밖에 당우로는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호성전(護聖殿독성각(獨聖閣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梵鐘)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doopedia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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