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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마이산 금당사

 

마이산 안내문

 

마이산 남부주차장 식당가 1

 

마이산 남부주차장 식당가 2

 

마이산 금당사 표지석

 

마이산 금당사 전경 1

마이산 금당사 전경 2

 

마이산 금당사 전경 3

 

마이산 금당사 전경 4

 

마이산 금당사 대웅보전 앞 1

 

마이산 금당사 대웅보전 앞 2

 

마이산 금당사 대웅보전 1

 

마이산 금당사 대웅보전 2

 

마이산 금당사 대웅보전 3 (추녀)

 

마이산 금당사 대웅보전 4

 

마이산 금당사 미륵존불 1

 

마이산 금당사 미륵존불 2

 

마이산 금당사 법고 1

 

마이산 금당사 법고 2

 

마이산 금당사 삼성각

 

마이산 금당사 석탑 1

 

마이산 금당사 석탑 2

 

마이산 금당사 석탑 3

 

마이산 금당사 석탑 4

 

마이산 금당사 고금당 원경

 

마이산 금당사 극락전

 

마이산 금당사 지장전

 

마이산 가는 길1

 

마이산 가는길 2

 

마이산 가는길 3

 

마이산 가는길 4

 

마이산 탑영제 1

 

마이산 탑영제 2

 

마이산 원경 1

 

마이산 원경 2

 

마이산 원경 3

 

마이산 청소년야영장 건물

 

마이산 탑영제 오리보트

 

마이산 명려각 1

 

마이산 부부시비 안내문

 

마이산 명려각 2

 

마이산 명려각과 부부시비

 

마이산 경주김씨 계림군 11대, 12대 묘소

 

******마이산의 금당사---2010년2월22일 답사

백제 천년고찰이라고 하는데 번쩍번쩍 황금색이 빛나 최신 고찰 같음.

대웅보전 지붕 금칠, 사리탑 금칠, 미륵존불 금칠, 암사자상  역시 금칠 이다.

금당사 뒤의 마이산 가는길로 가니 저수지인 '탑영제'가 있음.

'탑영제' 저수지 잔잔한 물에 마이산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한폭의 예술작품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역암 같은 암반에 2월 겨울인 날씨인데도 회록색 이끼가 무성하고,

버드나무와 벚나무 수피에 초록색 이끼가 무성하고 공기 맑고 따뜻한 지역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금당사(金塘寺) 역사

금당사(金塘寺)는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41번지 마이산에 자리잡고 있다.

절의 창건은 650(백제 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 스님의 11제자 가운데 한 분인 무상(無上) 스님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 등과  함께 세 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보덕 스님의 행장을 통 해 절의 창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보덕 스님은 고구려 후기의 스님으로서 고구 려에서 열반종을 널리 알인 개조(開祖)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재위 642~668) 이 중국에서 도교를 들여와 받들뿐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왕에게 도교만 믿고 불교를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해질 것임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이 끝내 그의 말 을 듣지 않자 스님은 650(보장왕 9) 제자 11명과 함께 백제의 완산주(完山州)로 내 려와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를 지어 『열반경』을 강의하였고, 함께 온 11명의 제자 역시 절을 짓고 포교하였다고 한다.

금당사의 창건주인 무상 스님 역시 그 11명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데, 나머지 제자 중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지금의 임실에 진구사(珍丘寺), 지수(智數)는 경상북도 문경 사불산에 대승사(大乘寺),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 모악산 에 대원사(大原寺), 수정(水淨)은 정읍 칠보에 유마사(維摩寺), 사대(四大)는 제 자인 계육(契肉)과 함께 진안 성수산에 중대사(中臺寺), 개원(開原)은 충청북도 단 양 금수산에 개원사(開原寺),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창건된 당시의 절은 지금의 위치에서 악 1.5㎞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 다.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 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 절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1675( 숙종 1)의 일이다.

한편 또다른 창건설로는 814(현덕왕 6) 또는 876(헌강왕 2)에 중국인 혜감(慧鑑)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말도 전하는데, 문헌의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

절은 창건후 고려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완주에 자리한 경복사(景福寺)를 중심으로한 열반종(涅槃宗) 사찰로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한때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도 이 절에 머물며 수도해 도를 얻었다고 전한다.

조선에서는 억불정책으로 사세가 많이 위축된 데다가 임진왜란ㆍ병자호란 등을 껶으면 서 쇠락되었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어 중창을 이루게 되었다. 절 이름도 고금당에 있을 때의 옛이름인 금동사에서 유래된 금당사(金塘寺)로 바뀌었는데, 혹은金塘寺로 쓰기도 하였다. 현재 경내 왼쪽의 미륵입상 앞에 연못 이 있어 절 이름 그대로 금당(金塘)을 이루고 있다.

1682(숙종 8) 괘불을 조성하였는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는 공백으로 남는다. 1914 년에는 칠성탱화를 봉안하였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1976년 금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퇴락되어 각 전각에 대한 중건 불사를 하였다. 요사의 신축을 시작으로 1978년 명부전, 1987년 산신각, 그리고 1990년에 극락 보전을 새로 지었다. 또한 1985년 미륵입상을 조 성하였고, 1991년 산신탱화와 용왕탱화를 봉안하였다.

[출처 : 금당사 / www.geumdangsa.co.kr]

금당사(金塘寺) 연혁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 금당사의 창건은 백제 의자왕 10(65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 스님의 11제자 가운데 한 분인 무상스님이 제자인 김취 등과 세운 금동사(金洞寺)라는 절을 옛 모습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후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금동사는 보덕스님이 개창한 전주 경복사와 함께 열반종의 중심사찰로 호남 동부권의 그 종지를 선양하는 교종사찰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 금동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듯 한때 혈암사(穴巖寺)라 불워지기도 하다가 절을 옮긴 뒤 옛날의 사지는 고금당이라는 이름으로 남고 그 이름을 금당사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근래 월정, 양징, 정찬, 현각, 일주, 삼혜, 진혜스님이 주석하며 사격을 신장시키고 현 주지 성호스님과 사재부중의 원력으로 진안지역의 새로운 도량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진안군사』는 절의 이전 시기를 1675년 경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영산으로 태종이 직접 마이산에 내려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상기해본다면 창건 이후 고려 말 조선 초, 그리고 임진 ∙ 병자 난 후를 그 변동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금당사(金塘寺, 金堂寺) 이름의 혼동 또한 이러한 변동시기에 있었던 혼란이라 여겨지는데 숙종 8(1682) 금당사 괘불(보물 제1266)을 통해 금당사(金堂寺)를 확인 할 있다. 여러 차례 중수하였는데, 300여 년전에 현재의 대웅전이 건립되었다.

극락전에는 수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깎아서 만든 금당사목불좌(지방유형문화재 제18)과 괘불탱화(보물 제1266)가 있다. 이 괘불탱화는 단독의 관음보살상아 그려져 있으며 표현양식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의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으로 통토사의 관음보살 괘불탱화나 무량사의 미륵보살 괘불탱화 등과 함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이곳에는 고려 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당사 3층 석탑(지방문화재자료 122)이 연못 안에 놓여 있다.

[출처 :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 / 도선사 주지 선묵 혜자 지음]

 

사진 : 니콜라이

글    : 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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