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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산성·조선왕릉

수원 화성행궁과 화성 <팔달문~ 화서문~ 장안문>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 5, ()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 화서문(보물 제403),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달문 1

 

팔달문 2

 

팔달문 3

 

팔달문 4

 

팔달문 5

 

팔달문 6

 

팔팔달문 7

시설물명 : 팔달문(八達門)

지정번호 : 보물 제402

지정연도 : 1964 9 3

시  대 :  조선 1796(정조 20)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

상세정보 :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팔달문 안내문

 

팔달문 서남암문 1

 

팔달문 서남암문 2

 

팔달문 서남암문 3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집의 제도는 사방 1간이고 높이는 8척 5촌이다. 여기에 온돌 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설치하고 그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었는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화성행궁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정조 14∼19)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성행궁 신풍루 1

 

화성행궁 신풍루 2

 

화성행궁 신풍루 처마 잡상

 

화성행궁 신풍루 현판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화성행궁내 느티나무 고목

 

화성행궁내 거중기

조선후기 정조시대에 왕의 명령아래, 수원화성을 쌓으려면 엄청난 길이에 과학기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동이 편리하고,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기기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안한 것이 거중기 이다.

그 당시의 토목기술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수려하고 견고하면서 비교적 적은 경비로 2년 반이란 짧은 기간에 성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계획 당시부터 실학자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등의 경륜과 지혜를 참작하고 지게에서 거중기 등 우리 고유의 각종 기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 기술의 장점을 응용하였고, 거중기 같은 기계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한편 다량의 석재를 가까이에서 채취하고 벽돌(전돌)을 구워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특히, 정조는 축성기술을 얻기 위하여 중국 가는 사신에게 명하여 구하고자 했던 "사고전서"는 구하지 못했지만 "고금도서집성" 5,022권을 거금 2150양을 주고 들여와 이중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5000근이나 되는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근대 실학 정신을 투영해 성벽중 특히, 주요 방어시설을 모두 벽돌로 쌓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축성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손수 점검하고 결정하면서 무엇보다도 민폐가 없는 인화와 장인 솜씨를 발휘토록해 아름다운 벽돌성이자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 불리우는 수원화성이 탄생하였다.

 

화성행궁내 연기자 2명

 

화성행궁 중앙문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화성행궁 좌익문 1

 

화성행궁 좌익문 2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화성행궁 집사청 1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저 있다.

 

화성행궁 봉수당 1

 

화성행궁 봉수당 2

 

화성행궁 봉수당 3

 

화성행궁 봉수당 단청

 

화성행궁 봉수당 내부 1

 

화성행궁 봉수당 내부 2

 

화성행궁 봉수당 내부 3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화성행궁 장락당 1

 

화성행궁 장락당 2

 

화성행궁 장락당 뒷편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화성행궁 복내당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화성행궁 복내당의 소쿠리

 

화성행궁 유여택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화성행궁 보의문

 

화성행궁 공진루

 

화성행궁 연휘문?

 

화성행궁내 우물과 장독대

 

화성행궁내 장독대

 

화성행궁 뒷편 1

 

화성행궁 뒷편 2

 

화성행궁 정조대왕 행차도 1

 

화성행궁 정조대왕 행차도 2

 

화성행궁 노거수- 향나무?

 

화성행궁 낙남헌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관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화성행궁 노래당

 

화성행궁내 아궁이

 

화성행궁 봉수당 뒷편 굴뚝 1

 

화성행궁 봉수당 뒷편 굴뚝 2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화성행궁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화성행궁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화성행궁 화령전

 

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1

 

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2

시설물명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北雉) 위에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벽돌로 삼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둔다. 그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를 만들고 나무 사닥다리를 사용하며, 위아래에 공안(空眼)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불랑기(佛狼機) 백자총(百子銃)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이 제도를 본떠서 치()에다가 돈()을 설치하였는데, 치의 높이 15, 서북 이면(二面)에 각각 현안(縣眼) 2구멍을 내었고, 그 위에 벽돌로 쌓아서 그 속을 비게 하고, 위에다 가로 세로 2간의 집을 지었다.

벽돌로 쌓은 것이 높이 18, 아래의 너비 사방 23, 위의 줄어든 너비 사방 21척이다. 상청판(上廳板)과 하청판의 2판을 설치하여 누()일 경우에는 2층으로 하고 포()일 경우에는 3층으로 하여 층마다 벽돌로 된 면에 불랑기를 쏘아댈 포혈(砲穴)[사방 1]을 내었다.

상층의 벽돌로 된 면 위 쪽은 판자로 둘렀으며 문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중층과 상층에는 각각 청판(廳板)을 여는 사방 3척의 덮개판 하나를 만들어, 밀고 당겨서 열고 닫게 하여 나무 사닥다리로 된 오르 내리는 길과 통하게 하였다.

아래 층 안쪽에는 벽돌로 된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내었다.

 

화성 화서문 1

 

화성 화서문 2

 

화성 화서문 내부

시설물명 :  화서문(華西門)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화서문[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묘좌(卯坐) 유향(酉向)에 자리잡고 있다.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꺽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협도는 둘을 세웠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 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화성 화서문 안내문

 

화성 서북공심돈

 

화성 서북공심돈 안내문

 

화성 북포루 1

 

화성 북포루 2

시설물명 :  북포루(北鋪樓)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북포루는 북서포루의 서쪽 129 5척의 거리에 있다.

()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 나왔다. 외면의 너비 27, 5량 집을 지었다. 사방 2간인데, 구조는 동북포루와 같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했다.

 

화성 북포루 안내문

 

화성 북서포루 1

 

화성 북서포루 2

시설물명 :  북서포루(北西砲樓)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에 치성과 같이 성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배지붕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화성 북서포루 안내문

 

화성 북서루  

 

화성 북서적대 1

 

화성 북서적대 2

시설물명 :  북서적대(北西敵臺)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북서적대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정조 19)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왔다.

좌우의 아래 넓이는 8.8m 위는 7.3m로서, 이 적대의 상부는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 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또한 전면의 좌우에도 넓이 2.4m의 성가퀴를 쌓고, 그 안에 1.5m 폭의 공간을 만들어 적대위로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화성 북서적대 안내문

 

화성 장안문 1

 

화성 장안문 2

 

화성 장안문 3

 

화성 장안문 안내문

 

화성 장안문 1층 내부 1

 

화성 장안문 1층 내부 2

 

화성 장안문 남측

 

화성 장안문 천정

 

화성 장안문과 외벽 사이 1

 

화성 장안문과 외벽 사이 2

 

화성 장안문 북측 1

 

화성 장안문 북측 2

 

화성 장안문 외벽 천정

 

화성 장안문과 외벽 사이

 

화성 장안문

시설물명 :  장안문(長安門)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 5, 너비 16 2 ,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된 것을 무사라 한다]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 8, 높이가 23 5, 왼쪽과 오른쪽의 와장대(臥長臺)는 각 32 4, 섬돌은 각 23층 너비는 17 2촌이다.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 높이가 23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 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쌓았는데, 두께는 4촌이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너비 1척 깊이 5]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안쪽의 평여장(平女墻)은 너비 88 7, 높이 4 3, 두께 2 5촌이고 바깥 쪽 여장의 높이 두께도 같으나 너비는 동서장 밖으로 각각 7 4촌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는 높이가 6척이 되어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며 타구() 10[() 11]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네모의 한 쪽 길이는 8촌이며, 첩마다 1 개를 뚫었고, 가운데에 있는 1개의 첩에는 2개의 총혈을 뚫었음]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너비 3 5, 높이 5 6, 중앙에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는데 높이는 6 5촌 너비는 6척이다. () 안에는 2층의 누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2 9, 아래 위 각각 10(), 가로 너비는 5간 세로 길이는 2간이다.

아래 층[안은 7, 바깥은 5] 정면 간의 너비는 22 5촌인데, 바닥[높이 1]에는 널판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둘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이며, 세로 길이 2 간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간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간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에는 연다].

위층[안팎 모두 7]은 정면의 간과 좌우 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이며, 그 세로가 2간 전체 길이는 18척인데 모두 널판지를 깔고, 사면에 널판지 문을 달았다. 그리고 3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려 호로전안(葫蘆箭眼)[널판지마다 구멍이 하나씩 있는데 경() 3촌 직봉(直縫) 역시 3촌이다]을 뚫었는데 안 쪽에는 태극을 그렸다. 단확()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문 안 서쪽 가에는 수문청을 별도로 세웠다.[협도(夾刀) 넷을 세웠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위에 적루(敵樓)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정문 좌우의 무사에서 각각 7보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17척 안쪽 둘레는 159 6촌 바깥 둘레는 209 척이고, 아래는 두께가 15척이고 위는 줄어 들어서 12척이다.

바깥 쪽에 현안(懸眼) 16개를 뚫었다[각각 길이 2, 지름 2 2]. 안 쪽에 벽돌로 된 홈통 8[지름 각 5]를 설치하였다. 옛 제도에는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한쪽 문만을 열었으나 지금은 사방으로 열리고 팔방으로 통한다는 뜻을 취하여 중앙에 문을 설치하여 정문과 마주하게 하였다. 양문의 사이는 10 3척이며 돌로서 안팎으로 홍예를 만들었다.

안쪽의 홍예는 너비가 18, 높이 19척이고 바깥 홍예는 너비가 16척 높이가 17 5촌이며 안팎 홍예의 사이는 좌우 높이가 21척이고 양 선문(扇門) 안에는 쇠로서 빗장이 설치 된 것이 정문과 같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세 가지 물건으로 쌓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때 물을 내려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오성지 위에는 성가퀴 9첩을 설치하였는데, 전체 너비 38 척이고, 그 좌우는 1층을 낯추어서 모양의 성가퀴 7첩을 설치하였다. 너비는 각각 10 2촌이며 높이는 모두 5척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으로 높이는 3 5, 두께는 모두 2 6촌이다.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문의 양 옆은 평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10 7촌이다.

북성의 적대는 2개로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옛 제도에는 70보 되는 곳에 1대를 세우고, 활화살 화창(火槍)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대략 이 제도대로 하면 대의 높이는 2척으로, 원성의 성가퀴와 나란하고 반은 성 밖으로 나오고 반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깥 쪽의 아래 너비는 26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1척이다.

현안(懸眼)[각각 길이는 20척이고, 지름은 5촌이다] 3개 있다.

좌우의 아래 너비는 각각 29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4척이다. 모양의 성가퀴로 둘렀는데, 바깥 3면은 11()이 있는데 높이는 5척이고 두께는 2 8촌으로 각각 총안[사방 6]을 뚫었다. 내면은 좌우 평평한 성가퀴에 각각 1첩씩인데 높이는 8척 이고 가운데 5척은 속이 비게 하여 돌계단을 설치하여 대 위와 통하게 하였다.

 

화성 장안문 북서적대 외벽측

 

화성 장안문 북서적대 측면

시설물명 :  북서적대(北西敵臺)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북서적대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정조 19)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왔다.

좌우의 아래 넓이는 8.8m 위는 7.3m로서, 이 적대의 상부는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 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또한 전면의 좌우에도 넓이 2.4m의 성가퀴를 쌓고, 그 안에 1.5m 폭의 공간을 만들어 적대위로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화성 장안문 북서포루

 

화성 장안문 북서포루 45도 측면

시설물명 :  북서포루(北西砲樓)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에 치성과 같이 성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배지붕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화성 북포루 1

 

화성 북포루 2

시설물명 :  북서포루(北西砲樓)

유  형 :  건축

소 재 지  :  경기도 수원시 화성성곽 내 위치

상세정보 :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에 치성과 같이 성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배지붕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화성 복원 정화 기념비

 

화성 토목학회 인정 기념비

 

화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기념비

 

[화성시설물 소개 출처 :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 hs.suwon.ne.kr]

 

사진 : 니콜라이

글    : 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