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장(尹致章) 의병장
***** 윤치장(1876~1971) 의병자의 본관은 남원이고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재옥(在鋈), 금토리(金土里) 94번지에서 출생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과천, 대왕, 낙생, 언주 일대의 의병 360여 명(혹은 70여 명)을 규합하여 이 지방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12월경(음) 광주군 묵동(墨洞)에 주둔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중군장 오사과(吳司果) 외 2명으로 하여금 광주군 언주면(彦州面 : 현 서울 강남구)에 사는 박승호(朴勝浩)에게 군자금 1백 원을 거두고 그를 의병에 입대케 하였다. 또한 그에게 40원을 주어 경성에 가서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명하고 허위, 이강년 등과 합세하여 경성 공격을 준비하면서 현 미아리 고개 부근에서 은신하던 중, 동 년 10월 11일 당시 의형제로까지 지내던 모씨가 왜놈과 결탁하여 기습적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윤치장 의병장이 용의주도하게 일본군을 공격하여 그들을 매우 난처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총독부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수삼 중, 일본 국왕 즉위의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일본국 공주 출생의 특사로 15년으로 감형되어 거의 만기를 채우다가, 1923년 다시 왕자 출생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출감 이후 광복이 되기까지는 가정을 포함한 모든 일을 제쳐두고 독립운동에만 전념하였고, 사망 후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는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8세 때 한문 서당에 입학한 후 19세가 되기까지 한문의 전과를 수료하였는데, 문자를 터득함에도 남들보다 항상 앞서서 끝내는 비범함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젊었을 때에는 담장을 훌쩍 뛰어 넘기도 하였고 90세 무렵에도 썰 한 가마니를 지고 다녔다고 전한다. 그가 남긴 ‘계자제시(誡子弟詩)’에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부지런히 살 것을 훈계하고 있어 그의 올곧은 심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묘소는 금토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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