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서린 망경대의 조견(趙狷)
***** 조윤(趙胤)은 고려 말엽의 문신으로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의 한 사람인 조준(趙浚)의 아우이다. 일찍이 형인 조준이 혁명에 가담하려는 것을 알고 눈물로써 말렸으나 형은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벼슬을 내렸지만 받지를 않았다. 그리고서 이름인 윤(趙胤)자는 견(犬)자가 들어간 견(狷)으로 고쳤으며 자를 종견(從犬)이라 스스로 불렀다.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함은 개와 같은 것이며, 또한 옛 주인을 잊지 못함은 충실한 개와 같다”는 뜻이다.
그 후에 산 속으로 깊숙이 숨어서 멀리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경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통곡하며 지냈다. 조견이 광주군 언주면에 있는 청계산 봉우리에 올라 하염없이 눈물지으며 송도를 바라보았다 해서 그 봉우리를 망경대(望京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에 태조가 그의 충절을 높이 여겨 옛 벗의 예를 갖추고 직접 산으로 그를 찾아갔으나 태조를 만나서도 절 한 번 하지 않고 말하기조차 부끄럽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태조는 조견응 가엾이 여겨 “산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으면 네 마음대로 하라.”하고, 석실을 지어서 거처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윤은 태조의 그와 같은 호의를 물리치고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양주(楊州)에 있는 송산(松山)으로 숨어 버렸다.
서하(西河) 임규(任奎)가 찬한 송산공 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의 초휘는 윤(胤)이고, 여조(麗朝)의 거경(巨卿)인 정숙공(貞肅公 : 仁規)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공부에 힘썼고, 예의를 잘 지켰으며, 포은 정공(圃隱 鄭公) 몽주(夢周)와 더불어 친히 사귀었다. 장성함에 이으러 포은이 추천한 바 되어 화관(華貫) 벼슬을 하고 왕께서 글을 읽을 때 출입하여 지신사(知申事)란 벼슬에 이르렀다. 고려 말에 정치가 혼란하여 나라 일이 날로 어지러울 때에 공의 형님 준(浚)이 난을 일으킬 뜻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하고 일찍이 눈물을 머금고 일러 가로되, “우리는 나라에서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흥하고 망하는 것을 국가와 같이 할 것이요, 또한 달가(達可 = 정몽주의 호)는 국가의 주석(柱石)이니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의 생각과 다른 길을 구한다면 이는 곧 국사(國事)를 방해하며 나라가 망하는 것을 재촉하는 일이라” 하며 그 언사가 심히 격절(激切)하니, 형님 준이 그 지조(志操)가 굳고 굳어 가히 앗을 수 없음을 알고 조정에 의논하여 공으로 하여금 영남에 출안(出按)케 하였다. 공께서 일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오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가로되, 일국이 병이 나서 이를 물리쳐야 하겠는데 이제 윤은 일을 다 마치지 않고 총총히 돌아온 것이라 이르고 또 다시 공으로 하여금 출안케 하니 이후로는 공이 내직에 있지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하고 공께서는 영남루에 다시 올라 우국시(憂國詩)만 홀로 읊었다. 그러던 중 고려조의 운명이 다하였으므로 공이 황황히 두류산(頭流山)으로 은거하니 태조가 그 재질을 가석히 여겨 호조전서(戶曹典書)에 명하고 글로써 부르니 공께서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고 답하여 가로되, “송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는 것이 소원이요, 성인(聖人 – 임금)의 신하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고, 이름을 견(狷), 자를 종견(從犬)으로 고치니, 이는 나라는 망하였는데 구차히 목숨만 살아있으니 개와 같고 또한 개도 주인을 연모하고 의리를 좇는다는 데서 취한 것이다. 두류산으로부터 청계산(淸溪山)으로 옮기니 이곳은 정숙공이 마음 편히 정양하던 곳으로 영당(影堂)을 모신 곳이다. 여기 와서는 때로 높은 봉우리에 올라 탄식도 하고 혹은 맑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때로는 구름 한 줄기가 송악(松岳)으로부터 청계에 연해 뻗치니, 이는 공의 애국심과 충성심에 하늘이 감동한 바라 하여 사람들이 그 산봉우리를 망경대(望京臺)라 칭하고 그 후에 ‘망경대가(望京臺歌)’ 가 세상에 전하여 불려졌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어느 날 준(浚)과 더불어 수십 기의 말 탄 사람을 데리고 청계에 행차하여 봉영당(奉影堂)에 이르러 공과 만나기를 청하니, 공은 서편 방에 누운 채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끝내 명 받을 기색이 없으니 준께서 이불을 어루만지며 가로돠, “나와 서로 보지 못한 지가 수년인데 형제간의 그리운 정이 매우 섭섭하고 안타깝지 않은가” 하니 공께서 이불 속에서 답하여 가로되, “나라가 깨지고 집안이 망하였으니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습니다” 하니 준이 가로되, “군명(君名)이 이미 훈축(勳軸)에 들었으니 어찌 무군(無君)이라 하는고!” 하므로, 공께서 답왈, “훈축 명하(名下)에 서명을 누가 하였습니까? 하니 준께서 슬퍼하시며 잠시 후 또 다시 “내 어찌 너의 절조(節操)를 더럽히겠느냐. 우리 형제 여섯 사람이 세상에 있지만 서로 의지할 사람은 나와 자네뿐인데 내 목전에서 자네가 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자네가 견(狷)자로 개명한 것을 듣고 여러 공신들이 공훈을 집행함에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가히 일리로다” 하고, 인하여 태조께 나가 고하되, “신의 아우의 성격이 굳고 좁아 한 번 먹은 마음은 변치 않으니 막무가내입니다” 하였다. 태조 가로되, “나를 아니 보고자 함은 우리 조정에 신하로서의 일을 아니할 의사이니 나로 더불어 전에 친구로서의 사귐이 있으니 주빈지례로 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니 준이 명을 받고 다시 들어가시어 이불을 걷고 손을 잡고 나오니 태조가 준을 보고 명하여 앉은자리에서 후면으로 피하게 하였다. 이는 아우와는 주빈의 격으로 형과는 군신의 격으로 서로 보는 것이 예의상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공과 더불어 서로 읍하고 마주앉아 가로되, “나를 도와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이 어찌 백성의 복이 아니 되리요” 하니 공께서 눈을 쏘고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북면(北面)하여, “여조(麗朝)의 신하로 여조를 섬기던 기억을 하십니까?” 하고 전의 일을 말하면서 그 말투가 불손하였다. 태조가 웃으면서 그를 용서하고 크게 탄식하며 가로되, “조견의 지조가 금석과 같이 굳으니 가히 앗을 수가 없다.” 하고 말을 몰고 내려오며 가로되, “청계 일대를 조견을 위하여 봉지로 내리고 구 사이에 석실(石室)을 지어 그 정절을 숭포(崇表)하라” 하였다. 지금 원통통에 있는 석축이 곧 그 유지이다. 공께서는 이 석실을 새로 된 왕의 명으로 지은 것이니 구신(舊臣)니 살 바 아니라 하고 즉시 양주 송산(楊州 松山)으로 옮기고 혹 가다가 송도에 들르면 선죽교(善竹橋)며 만월대(滿月臺)의 터를 돌아다니며 성곽이 퇴락한 것을 보고 탄식하고 비장히 여기며 한숨을 쉬고 나라가 망한 한탄에 발을 굴러 땅을 치고 흐느껴 울며 참을 수 없어 돌아가니 남은 백성이 보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 공이 송산(松山)이라 스스로 호를 지은 뜻은 ‘소나무는 마르지 않고 사시 푸르며, 산은 제자리를 옮길 줄 모른다’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고, 고려의 서울 송악(松岳)을 잊지 않는다는 절조(節操)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공이 자손에게, “조선조에는 벼슬을 하지 말고 여조의 은혜에 보답하라” 는 훈계를 남기고, 또한 “내가 죽은 뒤에 묘비에 고려안렴사(高麗按廉使)라 새기고 조선개국공신호(朝鮮開國功臣號)는 새기지 말 것” 을 명하고, 또 다시 두 아드님 이름을 석산(石山)과 철산(鐵山)으로 개명하니 이는 곧 굳은 절개의 의미를 가르친 것이다. 공이 서거하매 세종(世宗) 임금이 그 부음을 듣고 심히 애통해 하며 둔촌근록(遁村近麓)에 장례하라 명을 내렸다. 모든 자제들이 유명(遺命)을 굳이 지키지 못하고 조선조에서 내린 벼슬 이름을 새겨 비를 세웠더니 그 날 밤에 뇌성벽력이 나서 그 비를 부셨는데 조선에서 내린 벼슬 이름 있는 데까지만 부서져 버리고 조공지묘(趙公之墓)란 네 글자만 남아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현재는 公之墓 세 글자만 남아 있다).
공이 고려 왕실이 장차 망할 것을 짐작하고 개연히 일어나 회복할 의지를 품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니 수백 명이 앉을 만한 넓은 석굴이 있어 공이 잠시 그 굴 옆에서 쉬었더니 약간 어두워질 무렵 짐승 말 형상을 한 사람이 호랑이와 표범과 사슴과 노루 등 수백 마리를 몰고 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짐승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여조가 망하는 것을 가히 구하기 어렵도다” 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공이 지신사(知申事)의 직무로 계속하여 영남에 갔다. 조정에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때 조선(朝鮮)이 천명(天命)을 받았으니 공의 나이 42세 때였다. 통곡하며 두류산에 피해 숨었다가 광주 땅 청계산에 옮겨 살았으니 그곳은 삼세영정(三世影幀)을 걸어 모신 봉영루(奉影樓)가 있고 그 누 옆에 정숙공이 임금을 축원하던 절이 있으며, 절 뒤에 공이 송경을 바라보던 망경대(望京臺)가 있다. 태조가 친히 나와 석실을 짓도록 명하였던 터가 지금에도 원통동(圓通洞)에 남아 있다』하였다.
조견의 역사가 남은 곳은 청계산 상봉의 망경대,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의 묘소, 충남 공주시 우성면 보홍리 사당,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봉암리 정절사(旌節祠),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마을에 송산사(松山祠)가 있다. 조견과 이백유(二伯由)는 동서지간이다. 그래서 이백유와 조견은 여수동에 고이 잠들었는지 모른다.(끝)
관련 문화재
문화재명 : 송산 조 견선생 묘
지정번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
소 재 지 :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지정년월일 : 2001. 2. 20
보호구역 : 13,941㎡
규 모(격) : 묘 1기(석물16점 포함)
소 유 자 : 평양조씨송산공종회
관 리 자 : 평양조씨송산공종회
묘소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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