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흥(南以興) 장군의 애국충절
***** 충장공 남이홍의 자는 사호(士豪)인데, 임인년에 무과에 올랐다.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전사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강한 적을 만나 죽는 것이 진실로 내 일이지만, 이것이 한스러울뿐이다”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고 그 충성을 애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남이흥 장군의 아버지 또한 충신이다. 아버지 남유(南瑜)는 무과에 올라 나주(羅州) 목사가 되었다. 정유년(1597) 난리에, 이순신과 함께 누선(樓船)을 타고 왜적을 쫓아 대승하였으나, 탄환에 맞아 죽었다. 충장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면 글만 읽어서 무엇하랴” 하고, 마침내 활 쏘기를 배웠다.
어릴 때 기상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 장난치고 놀 때에 혼자 높은 곳에 앉아서 여러 아이들을 좌우로 지휘하고,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면 반드시 벌을 주었다. 공의 외사촌 형 되는 두세 아이가 우물가에 모여서 놀다가, 한 아이가 넘어져서 빠지려 하였다. 공이 급히 그 소매를 잡고 두 발을 우물 돌에 버티고, 큰 소리를 지르니 집안 사람들이 놀라서 구하였는데, 여러 아이들은 곁에 있으면서 웃으며 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외조부 판서 유공(柳公)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위태한 것을 건지는 좋은 재목이 될 것이다” 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직전, 공의 아버지가 좋은 말을 기르고 있었는데 아직 달리는 것에 길이 나 있지 않았었다. 공이 매일 밤중에 타고 달렸더니, 말먹이는 하인이 말렸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마땅히 전쟁터에서 쓰일 것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웃더니 여름에 왜적이 들어 오자 그 아버지가 임진강 싸움에서 그 말 덕분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안주(安州)에 있을 때 중국 사람으로서 와서 사는 자들이 수천 호였는데, 공이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니, 중국인들이 사랑하며 두려워하였는데, 아이들이 울면 반드시, “남영감”이라고 하여 그치게 하였다. 항복해 온 왜인 백여 명이 역시 안중에 있어 오랫동안 공의 은혜를 입었고, 그들이 또 이괄의 심복이었는데, 몰래 서로 단속하기를, “우리 남영감은 다치지 않도록 하자” 하였다.
공의 주량은 아주 대단하였고, 친손과 외손이 60여 명이었다. 공은 천성이 호걸스럽고 준수하며, 국량이 넓고 용모가 풍후하여, 바라보면 웅장한 모양이 있었다.1)
1) 연려실기술 제29권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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