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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영조와 여인들

영조와 여인들

 

영조는 숙종의 2남 서자로 태어나 1699년(숙종 25) 6세에 연잉군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 왕세제로 책봉됐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직급이 낮은 가장 낮은 무수리 출신이었다. 어미의 천한 신분 때문에 그는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인 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오랜동안 궁궐 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

 

1. 소령원 - 영조의 생모 화경숙빈 최씨의 능-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영조의 효심은?

영조의 어미에 대한 효심을 전하는 한 설화를 소개해본다.

숙종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최씨는 빈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양주 땅 어느 산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가 매우 초라했다. 때문에 이를 아파했던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오랜 노력 끝에 어미묘를 소령원(昭寧園) 으로 승격시켰다.☞ 칭호도 화경숙빈 최씨로 예우...

어느날 영조가 궁을 나와 잠행하던 중 향나무를 팔고 있는 나무꾼에게 어디서 나무를 캐왔느냐 물으니,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능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왔노라" 했다.  무식한 나무군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해 능이라고 말했는데, 항상 어미묘를 능으로 바꾸고 싶어했던 영조는 소령능이란 소리에 감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나무를 비싼 값에 사주고 나무꾼을 능참봉에 제수했다고 전한다.

 

2. 사도세자의 뒤주에서의 죽음 - 사도세자 죽음의 사건 진상은 어땠을까?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괴소문은 항상 소론의 은밀한 조롱거리였다. 1755년(영조 31) 나라를 비난하는 글이 나주객사에 붙여진 벽서사건이 발생했다. 영조 즉위초 나주로 유배된 소론 윤지가 국문과정에서 영조의 왕세제 때 일을 또 발설하였다. 이때 노론은 영조의 노여움을 이용해 소론을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 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가 벽서사건 해결에 나섰는데 그는 부왕와의 분노와 노론의 간계 를 간파하지 못하고 소론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정치적 열세에 있던 소론과 남인등이 세자를 옹호하고 나섬으로서 영조와 세자간에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세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 자신들에게 미칠 불이익을 우려하던 노론은 66세이던 영조가 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면서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때 세자는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고 궁을 빠져나가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여승을 궁에 끌어들이는 행동으로 노론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정순왕후는 세자의 난행을 영조에게 과대포장해 부자사이를 이간질하여 개인적으로 편애가 심했던 영조는 세자를 더욱 멀리하며 갈등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노론은 세자를 폐위코자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올렸는데, 이를 보고 분노한 영조는 세자에게 자진을 명했으나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폐서인으로 강등시키고,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붕당정쟁이 불러온 왕실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이후 영조는 뒤늦게 후회하며 세자의 죽음을 애도 하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조를 왕세손으로 삼아 자신의 생존시 정치를 맡기고 노론을 견제토록하여 왕위를 물려줌으로서 자식을 죽인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했다

 

3. 서오능 홍능 -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달성 서씨의 능 - 2살 연상 조강지처 정성왕후에 대한 영조의 마음은 어떠했는가?

영조는 연잉군 시절 10세 때 2살 연상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숙빈 최씨를 극진히 모셨으며 사도세자를 귀애하였다고 한다. 사도세자 뒤주에서의 죽음으로 병을 얻어 66세에 승하하였다고 전한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왕궁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 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영조는 정성왕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위의 행장에 잘 드러나 있다

 

4. 파주 삼릉 영릉(永陵) - 정빈 이씨에게서 낳은 아들 - 효장세자

영조는 연잉군 시절에 정빈(靖嬪) 이씨에게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아버지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7살에 세자가 되니 바로 '효장(孝章)세자' 이다. 영조는 효장세자를 세운 후에도 원비 정성왕후 서씨에게서 대군왕자를 고대했다. 비천한 후궁 아들인 자신을 생각하여 적통왕자가 태어난다면 세자를 바꿀 생각이었으나 그러나 적자는 소식이 없고 후궁들은 옹주만 낳았다.

효장세자가 10살이 되던 해 풍양 조씨와 가례를 올렸는데 이튿날부터 이상이 생겼는데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계속 설사를 하며 만약 백방이 무효였다.

4살 연상의 세자빈은 시집오던 날부터 병구완으로 날을 지새게 되었으며 결국 얼마 후 세자 책봉 4, 결혼 두 달 만에 효장세자는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 세자빈 조씨는 청상과부로 23년을 외롭게 지내다 37세때 시아버지 앞에서 죽고 만다. 이들 세자와 세자빈을 모신 곳이 파주 삼릉의 영릉이다.

 

 

5. 서오능 수경원 -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 생모)의 능, 서대문구 신촌에서 1968년 이장, 영빈이씨는 69세 사망

-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생모이다. 어려서부터 궁녀생활을 하다 귀인이 되었으며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고, 1730년 (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4명의 옹주와 후일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를 출산하고 그 밑으로 옹주 하나를 더 낳았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되는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녀의 능은 현재 서울시 신촌에 조영되었으나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가 인근에 개교하고 확장하면서 교내에 수경원이 위치하게 되어 1968년 6월 현재 서오능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 일화~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사 입구에는 본래 영빈 이씨 묘소인 수경원이 위치해 있던 연세대학교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버리고개' 또는 '벌고개'라 부른다. 영조는 각별히 총애했던 영빈이씨가 세상을 떠나지 크게 애통해 하며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수경원을 조영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수경원의 主龍에 해당하는 산능성을 사람들이 넘어 다니게 되면 등성이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 된다하여 통행을 금지 시켰고 만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벌을 내렸으므로 '벌(罰)고개' 라 했다. 이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버리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6. 영조의 제 3계비 정순왕후 경주 김씨 - 영조보다 52세 어린 정순왕후의 15세 때 간택될 때는 어떠했을까?

영조는 4명의 후궁의 몸에서 2남11녀를 득출했지만 대군으로 왕통을 잇고자 하는 열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어느덧 정성왕후와 사별한지 2년이 돼갔다.마침내 영조는 새 장가를 가기로 결심했다. 1759년(영조 35) 66세 임금이 52세나 어린 15세 경주 김씨와 재혼의 가례를 올리니 바로 계비 정순왕후다. 영조가 83세에 승하 했으니 17년간 중전으로 있었으며 정순왕후 그때 나이 32세였고 61세에 승하, 7살 어린 정조보다 오래 살았다.

왕비 간택할 때의 일화가 후대에 전해진다. 왕비 삼간택 당시 영조가 세처녀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첫번째 질문이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에 앉지 않느냐?" 하니 "딸이 어찌 아버지를 깔고 앉겠습니까!"

두번째 질무이 "고개 중에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든고?" 하니 "보릿고개 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질문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의 마음 이옵니다"

네번째 질문이 "세상에서 어떤 꽃이 가장 아름다운가?"  하니 "목화꽃 이옵니다"

왕비로 책봉되고 나서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며 상궁을 꾸짖었다 하니 어린나이에도 범상치 않았던 정순왕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7. 서오능의 홍능-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홍씨의 능 - 영조를 홍능에 조성하지 않고 파묘인 동구능 원능에 안치한 정조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영조의 장례위원장인 정조가 할아버지의 수릉지로 정해 놓은 명당을 제쳐두고 동구능의 효종이 있었던 자리 - 파묘라고 꺼리던 자리에 능지를 택하자 신하들의 반대가 잇달았다. 하지만 정조는 이를 애써 외면하고는 파묘터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노쇠해진 영조가 세손에게 자신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목숨만은 부디 보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겨 그 유훈을 따라 왕대비 정순왕후를 의식한 정조가 선왕을 원비 곁인 홍릉에 묻지 않았다는 설이 있으나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정조의 복수심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결국 영조는 동구릉의 원릉에 묻히고 계비 정순왕후는 29년이 지난 61세에 승하 하여 1805년(순조 5) 영조 곁에 나란히 잠들게 되었다  

 

8. 동구릉 원능 -영조와 나란히 쌍분으로 자리잡은 제3계비 정순왕후 경주 김씨 - 순조의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가졌던 정순왕후는 어떻게 정치를 했는가? 

정순왕후와 7살 아래였던 정조 사이는 늘 편치않는 긴장관계가 유지됐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양측이 갈등을 벌였다는 실록의 기록은 찿아볼 수 없고 오히려 정조가 정순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정조는 벽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순왕후는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4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스스로 女君과 女主로 자칭하며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녀는 정조 장례가 끝나자 마자 자신과 대립되는 소론 시파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의 오라비인 홍낙임 등이 처형되었다. 이듬해에는 정조가 묵인했던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해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이러한 탄압정책은 정조의 천주교 묵인론을 정치적으로 부인하여 남인과 시파를 제거하고자 벌린 숙청이었다. 이로인해 정약용 등의 남인과 시파를 축출하고 국왕친위대인 장용영을 혁파해 정조가 다져놓은 정치틀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녀의 친정인물인 김관주와 김용주 등 노론 벽파가 뒷받침 했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소론 시파인 김조순의 여식을 순조비로 책봉했으나, 1803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정세가 바뀌게 되었다.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와 정순왕후의 친정세력이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허망한 말년을 보내며 수렴청정을 거둔지 1년뒤인 1805년(순조 5) 1월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의 일기를 마감하여 원릉 영조 곁에 잠들게 되었다.  

 

 

서오릉 홍릉 안내문 - 영조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단능

 

 

서오릉 수경원 안내문 - 영조 후궁 영빈이씨의 묘 - 사도세자<장조로 추존>의 생모

 

서오릉 홍능(영조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단능) 전경

홍살문, 망료위, 참도, 정자각, 비각, 보이고 멀리 능침 보인다 - 수복방은 사진에 안 보인다

 

서오릉 수경원(영조 후궁 영빈이씨의 묘 - 사도세자<장조로 추존>의 생모)

곡장이 담처럼 둘러있고, 곡장안에 석호 석양 각1쌍, 상석, 비석, 장명등 각1좌씩, 문인석과 석마 각1쌍씩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