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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정조가 직접 짓고 손수 쓴 은신군 신도비

정조가 직접 짓고 손수 쓴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 신도비

 

은신군 신도비문 - 정조

 

, 은신군이여 / 嗟哉恩信

평소 행동거지가 훌륭했었지 / 素履振振

효도하고 또 우애하고 / 旣孝旣友

공손하고도 신중했었지 / 亦克恭愼

 

인후하신 왕의 자손으로 / 宜爾麟趾

외로운 섬에 귀양 갔었네 / 乃鵩之賦

화와 복이 그리 무상한 것 / 禍福廻穴

그 까닭을 누가 알까 / 孰識其故

 

머나먼 남쪽 땅을 / 悠悠南服

가더니 오지를 않고 / 有去無歸

놀란 파도는 하늘에 닿고 / 驚濤黏天

비도 울고 바람도 흐느꼈네 / 雨泣風唏

 

군자는 말하기를, , 슬프다 / 君子曰噫

모두가 명임을 어찌하랴 한다네 / 命也如何

누굴 원망하고 탓하는 게 아니라 / 匪怨匪尤

내 감회가 매우 많다네 / 予懷孔多

 

경기 지역으로 반장하여 / 返葬于畿

우리 대궐과도 가까이 있고 / 邇我城闕

작록도 원상 회복되고 / 爵旣恩復

시호도 내려지고 위계도 올랐으니 / 易名增秩

그대 넋이여, 무슨 유감 있겠는가 / 魂兮奚憾

 

이 집 속에 고이 잠들게나 / 安此幽宮

이 비에다 사연을 새겨 / 立石鐫辭

슬픈 이 심정을 엮었다네 / 維以紓恫

 

     가족관계

할아버지 : 영조(英祖, 1694 - 1776)

백부 :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 - 1728)

아버지: 장조(莊祖, 1735 - 1762)

어머니(계모) : 혜경궁 홍씨(惠敬宮 洪氏, 1735- 1815)

이복형 :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 1752)

이복형 : 정조(正祖, 1752- 1800)

이복누나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 1821), [광은위 김기성에게 하가.

이복동생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 1802), 홍은위 정재화(鄭在和)에게 하가.

어머니(생모) : 숙빈 임씨(淑嬪 任氏, ? - 1773)

: 은언군(恩彦君, 1754~1801)

서모 : 경빈 박씨박빙애(景嬪 朴氏, ?- 1762)

이복동생 : 은전군(恩全君, 1759- 1776)

이복동생 : 청근옹주(淸瑾翁主, 1758- ?), 당은위 홍익돈(洪益惇)에게 하가.

부인 : 군부인 홍씨(郡夫人 洪氏, 1755- 1831329), 남양인(南陽人) 홍대현(洪大顯)의 딸, 홍대용의 종질녀

아들(양자) :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 1836), 인조3인평대군 후손 이병원의 아들.

양 할아버지 :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1699 - 1719, 증조부 숙종의 서자이다.)

양 아버지 :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1720 - 1737)

처조카 :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6음력 111 ~ 1771음력 329)조선시대의 왕자, 왕족이다. 영조의 손자로, 사도세자의 넷째 아들이자, 숙빈 임씨 소생으로는 둘째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 동생이다.

1769김귀주 등의 탄핵으로 제주도에 유배된 뒤 병사한다. 아들이 없어 인조3인평대군7대손 남연군 이채중(뒤에 구로 개명)을 양자로 삼아 가계를 이었다. 본관은 전주이씨, 시호(諡號)는 소민공(昭愍公)이며 조선 26고종의 증조부이다.

생애

이진은 1775사도세자(思悼世子)와 양제 임씨(良娣 林氏)[1]의 서() 차자로 태어났다.

1765 관례(冠禮)를 행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 은신군(恩信君)에 책봉 되었으며, 1767 현감 홍대현(洪大顯[2])의 딸인 남양 홍씨와 혼례를 치르고, 이듬해인 1768에는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임명되었다.

사도세자의 사후 출궁되었으며, 이후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1769김귀주(金龜柱) 등이 이를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탄핵, 1771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다닌다 하여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양사의 탄핵으로 인해 그는 이복 형인 은언군(恩彥君)과 함께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위리안치 되었다. 그러나 은신군과 그의 형 은언군이 유배당한 뒤에도, 그는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이상한' 죄목이 더해져 계속 탄핵당하였다. 유배 2년만인 1771음력 329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였다.

 

사후

1776 정조 즉위 직후 정조에 의해 (정조 1) 연령군에게 적통(嫡統)으로 입적(入籍)되었으며, 은신군 역시 아들이 없어 1815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가 양자가 되어 후사를 이었다.

이복형인 정조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1777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소민공(昭愍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786 정조는 그의 신도비를 직접 쓰기도 했다.

 

낙천군 제사 관련

일설에는 그가 낙천군(연령군의 양자)의 제사를 모시는 것을 꺼려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은신군은 사후 6년 뒤에 이복 형인 정조에 의해 연령군의 후사로 입양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서울 역사박물관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의 신도비 등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좌측 부터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 묘표, 은신군 신도비, 낙천군(은신군 양부) 묘표

 

 

서울역사박물관 흥선대원군 조부 은신군 신도비- 형인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손수 글씨를 써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