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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진종 소황제(추존왕, 효장세자) - 효순소황후

- 파주 삼릉  영릉(永陵) -

영릉(永陵) :추존왕 진종(眞宗),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쌍릉

추존왕 진종과 비 효순왕후의 쌍릉이다.

진종은 21대 영조의 큰 아들(사도세자의 이복형)7살에 왕세자가 되었으나 10살도 못살고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세자묘로 조영되었다가 훗날 정조가 즉위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 하고 능호를 영릉이라 하였다.

<조선왕릉에 영릉은 3곳이 있다. 여주에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 효종과 인선왕후를 모신 영릉(寧陵)과 이곳 파주삼릉 영릉(永陵)이다.>

 

 

효장세자 (孝章世子, 1719-1728)

영조는 연잉군 시절에 정빈(靖嬪) 이씨에게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아버지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7살에 세자가 되니 바로 '효장(孝章)세자' 이다. 영조는 효장세자를 세운 후에도 원비 정성왕후 서씨에게서 대군왕자를 고대했다. 비천한 후궁 아들인 자신을 생각하여 적통왕자가 태어난다면 세자를 바꿀 생각이었으나 그러나 적자는 소식이 없고 후궁들은 옹주만 낳았다.

효장세자가 10살이 되던 해 풍양 조씨와 가례를 올렸는데 이튿날부터 이상이 생겼는데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계속 설사를 하며 만약 백방이 무효였다.

4살 연상의 세자빈은 시집오던 날부터 병구완으로 날을 지새게 되었으며 결국 얼마 후 세자 책봉 4, 결혼 두 달 만에 효장세자는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 세자빈 조씨는 청상과부로 23년을 외롭게 지내다 37세때 시아버지 앞에서 죽고 만다. 이들 세자와 세자빈을 모신 곳이 파주 삼릉의 영릉이다.

 

 

이렇게 효장세자가 떠난지 7년 후 영조는 영빈 이씨에게서 아들을 얻게 되니 사도세자이다.

붕당정치의 희생물이라는 후대의 평가가 지배적인 가운데 뒤주에서 아들을 죽게 한 영조는 지나치게 경솔했던 자신의 처사를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이때 영조는 칠순을 1년 앞둔 노령에 노환까지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장헌(사도)세자 아들(정조)효장세자에게 입양시켜 대통을 잇게 한다. 즉 작은아들 사도세자는 죄인으로 죽었으므로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수 없다는 뜻으로 큰아들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든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양부(養父)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면서 으로 격상 시키고 또한 자신의 생부(生父)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융릉으로 모신다.

정조는 왕에 즉위하면서 (장헌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한다.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 (1715~1751)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는 1727(영조3) 13세에 가례를 올리고 1735년 현빈에 봉해졌다.

남편이 열 살에 죽어 소생은 없으며 1751(영조27) 창덕궁 건국당에서 37세로 승하했다.

죽은 뒤 1752년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76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장남(정조)을 입양 받아 승통세자빈(承統世子嬪)의 호를 받고, 정조의 즉위로 왕비로 추존되었다.

 

 

<조선닷컴 기사, 2011.7.19>

145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들이  2011.7.19일부터 두 달 동안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918일까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개최하는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을 통해서다. '현빈예장도감의궤' 71점의 외규장각 의궤를 중심으로 '강화부 궁전도' 등 관련 유물을 함께 배치해 총 165점을 전시한다.

소복을 입은 상여꾼 85명이 대여(大轝·국상 때 쓰던 큰 상여)를 메고 걷는다. 가마 좌우로 푸른 가림막이 길게 쳐 있다. 망자가 여성이라 일반인들이 상여를 보지 못하게 가린 것이다. 횃불을 든 사람, 곡을 하는 궁인(宮人), 죽산마(竹散馬·국왕과 왕비의 장례에 쓰인 말 모양의 제구) 등 각종 의장물.

 

1751(영조 27), 영조의 며느리인 현빈 조씨(1715~1751)의 장례 절차를 기록한 '현빈예장도감의궤(賢嬪禮葬都監儀軌)'이다. 필선은 섬세하고 색감은 또렷하며, 임금이 보던 어람용이라 붉은 선으로 테두리를 둘렀다.

특히 현빈예장도감의궤는 국내에 없던 유일본 중 하나로 조선 후기 세자빈의 예장 행렬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현빈 조씨는 1727년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나 이듬해 효장세자가 요절해 후사 없이 홀로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어린 나이에 홀로 된 며느리를 늘 안쓰럽게 여겨 1735년 현빈(賢嬪)에 봉했고, 사후에는 친히 애도하는 지문(誌文)을 짓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반차도(행렬 그림)는 세자빈의 시신을 모신 대여를 중심으로 22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등장인물은 1000여명. 대여를 포함해 1행렬에 사용된 가마가 무려 18대다. 향로를 실은 가마, 각종 부장품 및 장례에 사용하는 집기류를 실은 가마, 혼백함을 넣은 가마. 좁은 길을 지날 때 시신을 옮겨서 이동하기 위한 작은 크기의 '견여(肩轝)'는 상여꾼 47명이 메고 있다.

 

 

()에서 릉(), 다시 황제릉으로 추존

영릉은 세자와 세자빈의 예우에 따라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해 한결 간소하다.

정조는 즉위후 왕릉으로 추존하였고 추후 고종에 이르러 황제릉으로 추존되었으나 상설은 최초 그대로이다. 봉분 주위에 병풍석, 난간석 등이 없으며 석양, 석호도 한 쌍씩이다. 문석인은 세워져 있으나 무석인은 세워져 있지 않으며 하계는 생략되었다. 정자각은 영조의 지시에 의거 옛날 방식으로 세워졌다.

 

 

추존 진종소황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르면서 태조 이성계를 태조고황제 로 추존하고 이전 임금들 7명을 황제로 추존하는데

첫째 가 바로 진종소황제 이다. 때문에 영릉에는 비석이 3개 서있으며(세자, 추존왕, 추존황제) 상설은 그대로이다.

이는 고종의 조부 남연군 이 인조의 3남 인평대군 6대손이지만 사도세자와 숙빈임씨 소생의 은신군에 양자로 입적되어 장조 - 정조 - 순조 - 문조 - 헌종 - 철종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황제로 추존한것이며, 진종 은 장조의 이복형이자 정조를 양자보낸 양부이기때문에 황제추존의 첫째 가 된것으로 보인다.

 

 

참고) 고종이 즉위하면서 추존한 황제 (고종 이전 태조고황제 외 7)

태조 고황제 - 신의고황후, 신덕고황후

진종 소황제(추존왕, 효장세자) - 효순소황후

장조 의황제(추존왕, 사도세자) -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

정조 선황제 - 효의선황후

순조 숙황제 - 순원숙황후

문조 익황제(추존왕, 효명세자) - 신정익황후

헌종 성황제 - 효헌성황후, 효정성황후

철종 장황제 - 철인장황후

고종 태황제 - 명성태황후

순종 효황제 -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출처]조선왕릉답사

 

 

서울역사박물관 -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의 신도비 등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 왼쪽부터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의 묘표, 은신군의 신도비, 은신군 부친(양부) 낙천군 묘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