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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생의 벼랑끝을 오르내린 흥선대원군, 그는 왜 난그림을 그렸을까?

생의 벼랑끝을 오르내린 흥선대원군, 그는 왜 난그림을 그렸을까?

 

임금의 생부(生父)를 뜻하는 대원군(大院君)은 조선을 통틀어 4명이 있었고, 임금의 통치 당시 생부가 살아있는 경우는 흥선 대원군이 유일 했다.

 

흥선군(興善君) 석파(石坡)이하응(李昰應 1820-1898)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는 그다지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흥선군의 아버지가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로부터 이어지는 왕가의 가계에 편입되어 왕위와 가까워 졌다.

 

당시 실권을 휘두르는 안동김씨는 똑똑한 왕재보다는 정치에 문외한인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을 왕으로 옹립했다. 안동 김씨들은 왕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을 끊임없이 견제했고, 견제는 역모라는 무서운 누명으로 이어 졌다. 이 때문에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흥선군 이하응이 택한 목숨 부지 책은 건달처럼 행세하는 것이었다.

 

그는 야심 없는 파락호를 자처하고 시정의 무뢰한들과 서슴없이 어울렸고, 궁도령”.“상갓집 개라는 치욕적인 모욕을 참아가며 야망을 키워갔다. 종친으로서 이름뿐인 유사당상을 지내던 석파는 농묵(弄墨)이나 하면서 안동 김씨를 더욱 안심시킬 작정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28세 위인 추사 김정희를 찾아갔다.

 

영조의 어머니인 정순왕후가 추사(秋史;金正喜)11촌 대고모였기 때문에 석파와 추사는 촌수를 따지자면 내외종간의 먼 친척뻘 이었다. 당시 추사는 석파에게난보(蘭譜)”한권을 보내주며 난초를 그리는 자세에 대해 진지한 가르침을 내렸다.

 

이 후 추사가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지자, 석파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하지만 추사 나이 63세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석파 이하응 이었다. 이 때 그는 난초 그림에 한창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파의 난 그림은 추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러한 석파가 자신이 그린 난초 그림을 추사에 게 보내 품평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림을 받아 든 추사는 멋진 난초그림에 감격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제가 좋아하는 이의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격찬을 했다.

 

용기를 얻은 석파는 자신의 난초그림을 한권의 화첩으로 꾸몄고, 여기에 화제(畵題)를 써달라고 부탁하자 추사는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격려를 잊지 않을 만큼 석파의 난 그림을 높게 평가 했다. 결국 석파는 스승을 뛰어넘은 단군 갑자 이래 최고가는 난초 그림의 대가가 되었다.

 

추사와 석파의 교류는 추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추사의 가르침은 난초 뿐 만 아니라 글씨에서 까지 미치게 되었으므로 석파는 추사 서파(書派)의 빼놓을 수없는 후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석파 이하응은 철종이 후사 없이 병약한 것을 간파하고 자신의 2남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왕가의 가장 큰 어른인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에게 은밀히 접촉을 했다.

 

안동 김 씨들 로부터 핍박을 받던 풍양 조씨 조대비는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석파의 2남으로 후사를 지명했다. 이로써 고종이 등극했다. 석파는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는 대원군으로서 조선조 말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추사는 석파가 대원군이 되기 7년 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석파와 인연의 끝을 맺어야 했다.

 

석파의 난 그림은 사의(寫意)를 중요시 한다. 다시 말해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파의 난은 끊어질 듯 유려하게 이어지는 거친 바람에 흩날리는 품새가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밀접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처절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야망과 숱한 좌절로 인해 섬뜩할 정도로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한 난은 그를 적절히 표현해 준다.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고 또 예서 에서도 대가였으니 당대에도 석파의 난 그림은 매우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제자인 윤영기 에게 난을 그리게 하고 석파는 낙관만 찍어 시중 유통 시키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원군 생존 시 부터 난 그림은 가짜가 성행했다는 것이다.

 

작품성에 대원군이라는 이름이 더해지면서 석파의 난 그림 가격은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고가의 그림은 가짜 작품을 성행 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심지어 현존하는 석파의 난 그림 중 80%는 가짜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왕의 아버지로써 아들을 대신해 왕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궤적 많 큼이나 가짜 그림을 양산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1894년 권력투쟁에 밀려 중국으로 망명한 흥선대원군은 그 곳의 문인화(文人畵) 화가들과 사군자를 그리며 쓸쓸히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