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인 문정왕후에 눌려 눈물로 왕위를 지킨 명종
명종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로 그의 이복 형 인종이 즉위하면서 1544년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12세 나이로 조선 제13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친인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에 눌려 한평생 눈물로 왕위를 지켜야 하였고 20세까지 8년간 수령청정을 받아야 하였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지자 조정의 대세는 그녀의 친동생인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권력을 독점한 윤원형은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 후 사사 시키는가하면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을 독살하고 노비출신인 정난정을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정난정은 봉은사 주지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주었고 이로 인하여 한때 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에 집이 15채나 되었으며 노예와 전답을 빼앗은 것은 그 수도 없을 만큼 많았으며 죽고 사는 문제도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윤원형의 이런 세도가 계속되자 명종은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을 중용하였다. 하지만 이량도 청렴하지 못하여 축재에 열을 올려 집안이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량을 윤원형과 심통원과 함께 조선의 3흉(三凶)이라 불렀다. 이량은 한 때 평안도 관찰사로 쫓겨났다가 이조참판, 공조, 예조, 이조판서가 된 뒤 권력 남용은 극에 달하였다.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여 사리사욕에 급급하여 사회는 어수선하고 민심은 병들어갔으며 흉년이 겹치어 민간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도적떼가 판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국방이 허술하여졌고 남쪽에는 왜구가 기승을 부려 삼포왜란 이래 을묘왜변이 일어나 민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은 조선의 혼란은 문정왕후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유교사회를 표방하는 조선에서 승려를 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정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였다. 1565년 마침내 그녀가 죽자 승려 보우와 윤원형은 가장 먼저 철퇴를 맞게 되었다. 승려보우는 관직을 박탈당하여 제주도에 유배 중 죽었으며 윤원형은 애첩 정난정과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진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일파가 사라지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데 주력하였다. 점차 조정은 안정되고 사회도 질서를 되찾아갔지만 명종은 그동안 국정에 시달린 탓으로 병을 얻어 문정왕후가 죽은 뒤 2년 만인 1567년 3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를 비롯하여 7명의 부인을 두었고 순회세자를 두었으나 13세 어린나이로 죽게 되어 후사도 남기지 못하였다. 따라서 왕위는 11대 중종의 9째 아들 덕흥군이 낳은 셋째아들 하성군이 이어 받았다.
명종은 재위 기간이 22년이었으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기간이 8년이었으며 친정 후에도 모후의 끊임없는 간섭과 왕권이 실추되고 사회 혼란이 가중되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임꺽정의 난, 을묘왜변이 그것이다.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의 하나로 명종 즉위년(1545년)에 왕실의 외척들 간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명종은 모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하였고 조정의 권력은 소윤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 대윤들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윤임, 윤관, 유인숙, 계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을사사화라 하고 윤원형 일파는 문정왕후가 죽기 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였다.
양재역 벽서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벌린 정치 숙청사건이다. 1547.9월에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 이라는 익명의 벽서가 발견되어 임금에게 보고 하였다. 이에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 일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여 생긴 것이라 하며 잔당세력을 척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난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명이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대단하지도 않은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임꺽정의 난은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 떼가 들끓던 명종시대의 대표적인 도적의 두목 임꺽정이 일으킨 도둑 사건이다. 임꺽정은 분명 도둑의 두목이었지만 백성들은 의적으로 통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힘이 장사였고 용맹스러웠으며 날쌔고 양반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있고 흉년이 겹치고 있는데 민간은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꺽정은 처음에는 도당 몇 명과 민가에 도둑질을 하다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 구월산에 본거지를 두고 경기도, 황해도 일대의 관아를 습격,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적으로 둔갑하였다. 그의 무리들은 개경과 한양까지 나타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임꺽정 체포령이 내렸지만 붙잡을 수가 없었다. 사건이 점차 커지자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등 각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하여 책임지고 도둑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리게 되었고 1562년 정월에 곽순수, 홍언성이 민가에서 임꺽정을 붙잡게 되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임꺽정을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라 하였다.
을묘왜변은 1555년 왜구가 전남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간에 엄청남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었다. 그 이전에 1544년 사량진 왜변으로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켰다가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재개 허용을 간청하여 1547년에 정미조약을 맺고 왜인들의 내왕을 허용하였다. 그 후 왜구들은 다시 남해안에 노략질이 늘어나다가 1555년 5월 선박 70척을 앞세우고 전남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고 어란도, 장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행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로,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급파하여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이처럼 명종 22년 재위동안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였고 문정왕후의 섭정과 간섭으로 제대로 크게 숨 한 번 쉬지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불운의 왕이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리 철학의 선구자 회재 이언적과 조선 성리학의 큰 산 퇴계 이황선생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태강릉의 태릉(문정왕후 능)
홍살문, 침도(신도/어도), 정자각, 능침이 보인다
태강릉의 태릉(문정왕후 능)
침도(신도/어도), 정자각 중앙에 있고 우측에 비각, 수복방이 보인다
태강릉의 태릉(문정왕후 능) 능침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문인석과 석마, 무인석과 석마 보이고, 곡장 앞에 석양, 석호 보인다
태강릉의 태릉(문정왕후 능) 안내문
[태강릉] 태릉과 강릉이다. 두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소재하고 있다. 근처에 태릉선수촌이 있다.
[교통] ● 서울 지하철 6호선, ● 서울 지하철 7호선 태릉입구역.
[태릉] 문정왕후의 능 ~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인공 문정왕후.... 전인화가 문정왕후, 윤원형은 이덕화, 정난정은 강수연이 출연했다...^^
남편 중종은 서울 선정능의 정능인데 단능으로 사후 홀아비 신세이다..... 중종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요절한 장경왕후의 옆 서삼릉의 희릉에 묻혔으나 .....
문정왕후가 이를 못마땅히 여겨 선릉 옆 정릉으로 옮겼는데 이 자리는 물이 차는 흉지라고 한다....그래서 문정왕후는 태릉에 안치되고... 중종은 정릉에...제2계비 장경왕후는 희릉에 따로따로 있다.... ㅠㅠ....^^
[강릉] 문정황후 윤씨의 아들이자 조선 왕조 제13대 임금인 명종(明宗, 1545∼1567년 재위)과, 그의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1532∼1575년)의 능이다. 강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나란히 마련한 동원(同原) 쌍봉릉(雙封陵)이며, 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강릉은 현재 원형 보존을 위해서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죽어서도 모친 문정왕후의 기에 눌려 모친인 태능(문정왕후 능)만 공개되고 강릉(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은 공개되지 않는가 보다......ㅠㅠ.....^^
서오능 순창원 ~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묘소 ~ 순회세자는 13세에 사망
서오능 순창원 전경 ~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묘소 ~ 순회세자는 13세에 사망
명종은 그동안 국정에 시달린 탓으로 병을 얻어 문정왕후가 죽은 뒤 2년 만인 1567년 3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를 비롯하여 7명의 부인을 두었고 순회세자를 두었으나 13세 어린나이로 죽게 되어 후사도 남기지 못하였다. 따라서 왕위는 11대 중종의 9째 아들 덕흥군이 낳은 셋째아들 하성군이 이어 받았다....덕흥군은 드라마 '여인천하'에 나왔던 창빈안씨의 아들이다...창빈안씨 능은 국립현충원에 있는데 묘자리가 좋아 손자가 왕(선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ㅠㅠ^^
문정왕후, 그녀는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유교사회를 표방하는 조선에서 승려를 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정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였다. 1565년 마침내 그녀가 죽자 승려 보우와 윤원형은 가장 먼저 철퇴를 맞게 되었다. 승려보우는 관직을 박탈당하여 제주도에 유배 중 죽었으며 윤원형은 애첩 정난정과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진하였다.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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