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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예송논쟁-6번의 상복-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단릉-동구릉 휘릉

 

휘릉(徽陵) :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단릉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는 16대 인조의 계비이다.

 

1635(인조 13) 정비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15세의 나이로 1638(인조 16) 122일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49(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26세의 나이로 대비가 되었으며, 이후 자의(慈懿)의 존호가 추상되어 자의대비(慈懿大妃)가 되었다.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치는 동안 왕실의 어른으로 천수를 누리다가 1688(숙종 14) 82665세로 소생 없이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하였다. 슬하에 자식없이 쓸쓸한 여생을 보냈다.

 

 

귀인 조씨의 이간질

 

장렬왕후가 왕비가 되어보니 왕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정비 인렬왕후는 산후병으로 승하하였으며, 세자와 세자빈은 물론 둘째아들 봉림대군 부부까지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으며 인조는 이미 귀인 조씨에 빠져있어 조씨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특히 조씨는 세자부부를 미워하여 청나라에서 돌아오자 매일 인조에게 세자를 헐뜯고 모략하고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세자가 독살의 의심을 받으며 갑자기 죽고 만다.

 

갓 결혼한 장렬왕후는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어머니의 예로 삼년복을 입었다. 이후 조씨는 장렬왕후를 미워하여 결국 경덕궁으로 이어하게 하여 인조와 별거토록 하니 1649년 인조가 승하할 때 장렬왕후는 국모로써 인조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그 자리를 귀인 조씨가 대신했다. 후일 효종이 등극하여 귀인 조씨는 그간의 저주사건등이 밝혀져 관계자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2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諍)

 

장렬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살에 대비가 됐고, 10년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됐다. 효종은 등극후 귀인 조씨에게 너무 질린 탓인지 계모 장렬왕후를 대비로 극진히 모셨다고 하는데 그 효종이 승하하자 국장때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니 이를 <1차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이때는 1년만 착복하면 된다는 서인 송시열의 기년설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입어야 한다는 3년설을 제기하며 서인을 공격했다. , 부모상을 당하면 자녀가 3년복을 입고, 큰아들이 상을 당하면 부모가 3년복을 입는다는것인데 당시 예학의 최고인 이조판서 송시열은 효종이 둘째이기 때문에 1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조참의 윤휴는 효종이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고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했으니 장자의 예에 따라 재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둘째부터는 모두가 서자이고 효종도 둘째이니 그렇다고 해 기년복을 주장하고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져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두번째 예송논쟁은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또 시어머니인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제기된다.

 

남인은 기년설(1년 복상), 서인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했다. 서인은 중국 고례(古禮·사가의 풍습)에 맏며느리 상에는 기년설(1년복)을 입고, 둘째부터는 대공복(9개월복)을 입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남인은 국상에서는 큰아들과 맏며느리의 복제가 모두 1년이고 효종의 국상때도 1년을 입었다며 현재 임금 현종의 부모를 서자로 하느냐며 서인을 공격했다. 이에 임금 현종이 기년복으로 명하므로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이때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니 이를 <2차 예송논쟁>이라 한다.

 

 

6번의 상복

 

사실 예송논쟁은 예의절차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논리가 달라지는 정파들의 정권다툼이었다.

 

장렬왕후는 갓 결혼해서는 소현세자의 상을 치룬것부터 남편 인조의 국상과 서자 효종내외의 국상, 그리고 서손자 현종내외까지 모두 6번의 상복을 입었으니 조선왕실중 역대로 가장 많은 횟수로 전해진다. 그때마다 장렬왕후의 상복을 입는 문제때문에 조정은 당쟁으로 시끄러웠으니 그 많은 국상들을 직접 겪어야했던 서모(庶母)로서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병자호란이후 혼란한 시기에 자식들보다 어린나이로 왕비가 되었던 장렬왕후는 이후 대비, 대왕대비로 왕실의 어른이 되면서 인조, 효종, 현종, 숙종까지 4대 임금을 거치는동안 공경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본인은 후사도 없이 남편과 정비의 후손들을 먼저 보내면서 2차례나 예송논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그렇게 지내던 장렬왕후가 1688(숙종 14)에 세상을 떠나자 서증손인 숙종이 상주가 되어 국장을 치루게 된다. 국상때마다 상복문제로 정쟁의 당사자가 되던 증조할머니의 장례를 맡게되자 숙종은 역시 또 상복문제로 혼란에 빠진다.

 

당연히 국상 상복을 입어야하겠지만 '국조오례의'에도 친자, 친손까지는 나와 있으나 증손은 기록도 없고 선례도 없으니 서증조할머니의 경우는 더더욱 고민이 되어 결국 종친의 기년(1)으로 적용하였다.

 

 

- 장렬왕후 빈전도감의궤, 조선왕릉전시관

 

 

 

-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145년 만에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297권 가운데 지난 74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언론에 첫 공개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두꺼운 한지에서 세월의 흔적이 배어나온다. 인조의 둘째 부인 장렬왕후(1624~1688)의 장례 의식을 생생한 그림과 글씨로 보여주고 있다. )

 

 

소복을 입은 상여꾼 100여 명이 `대여(大輿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를 메고 간다. 그 옆에는 말을 탄 여섯 명이 의식에 쓰이는 깃발을 들고 가고, 또 그 옆에는 일반인들이 왕비 상여를 보지 못하도록 푸른 장막이 쳐 있다.

 

조선시대 왕실 장례 발인 행렬도다. 300여 년 전 왕실 장례 모습을 마치 눈앞에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방울을 흔들고 있는 가마 탄 사람 눈매와 수염이 매섭고도 날카롭다.

 

조선시대 최고 화원들이 그린 그림과 격조 높은 글씨에서 왕실 품위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이 의궤는 조선 16대 인조 둘째 부인인 장렬왕후 장례식을 기록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1688)`로 최근 145년 만에 프랑스에서 국내로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297권 가운데 한 권이다. 국내에 없는 유일본이자 임금이 보던 `어람용(御覽用)` 의궤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수백 년이 지나도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질 좋은 한지에 천연광물과 식물에서 채취한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동구릉에 홀로 묻히다

 

남편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후사도 두지 못한 장렬왕후는 상복 문제로 끌려다니다 당쟁의 명분만 제공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죽어서도 인조 옆으로 가지 못하고 동구릉 휘릉(徽陵)에 홀로 묻혔다.

 

인조는 파주 장릉(長陵)에 정비 인열왕후와 합장돼 있다. 그래도 동구릉의 중앙, 태조 이성계의 서편 바로 옆에 자리 잡았다.

 

손자며느리 현종비 명성왕후의 릉인 숭릉이 조성된지 5년만에 조성된 휘릉은 그래서인지 많은 부분이 숭릉과 비슷하다. 정자각은 숭릉처럼 3칸의 정전 좌우에 익랑을 붙여 5칸으로 만들었으나 지붕은 팔작이 아닌 맞배지붕이다. 능침은 3면의 곡장으로 둘러쌓였고 병풍석은 두르지 않았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상을 새겨 열 두 방위를 표시하였다.

 

또한 능침 앞에 놓인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이다.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 영릉 이후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된 것이다.

 

<조선국 장렬왕후 휘릉>이라 적혀있다.

 

예송논쟁(禮訟論諍)이 도대체 워 길래 ?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제일 따분하고 이해가 어렵던 대목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신권(臣權)이 왕권을 누르기 위해 성리학을 정치무기화 한 것이었다.

 

송시열이 왕보다 더 숭상한 것은 주자였고, 송시열이 영수였던 노론의 세력은 조선후기 230년간 기득권을 놓지 않았고, 송시열을 봉향하는 서원이 50여개 이르렀을 정도로 권력은 막강하였다.

 

후궁 귀인 조씨의 이간질로 인조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별거한 장렬왕후는 결국 남편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 후사도 두지 못하고 외롭게 평생을 보냈다.

 

그녀는 인조-효종-현종-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며 비록 천수를 다했다고는 하나 평생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상복논쟁 가운데서 보낸 여인.

 

그녀의 능호는 '아름다울 휘' 이다. 한마디로 외롭고 쓸쓸한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