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바 엔 (Glover Garden)과 푸치니(Puccini)의 ‘나비부인’
【1】 1859년 나가사키 개항
1853년 미국의 페리가 나가사키에 입항한 이후, 1858년 서구 열강제국들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요구라기 보다는 압력이었다.
(후에 일본은 우리나라 강화도로 운양호를 끌고 침범하는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압력에 밀린 에도 막부는 개방을 결심, 쇄국을 끝내고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1859년 나가사키는 개항을 하게 되었고, 외국과의 자유무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서양의 기술과 상품들을 앞세우고 몰려드는 외국 상인들. 이들 외국 상인들의 주거 및 활동거점의 확보가 필요해지게 되자 막부는 나가사키에 급히 매립・조성 공사를 시작하여
히가시야마테・미나미야마테・오우라・고조네・사가리마쓰・우메가사키・신치・데지마 등의 지역 일대에 외국인 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이후 거류지시대는 약40년 간 계속되었고, 나가사키는 이기간 동안 새 시대의 자유 무역항으로서 번성해 나갔다.
거류지는 해안에 가까운 곳 순으로 상등지・중등지・하등지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임대료가 비싼 상등지에는 무역을 위해 찾아온 외국상인들의 무역상관이나 창고가 건설되었으며, 그 뒷 편의 중등지에는 호텔이나 은행・병원・오락시설이, 산 쪽의 하등지에는 주택・교회・영사관 등이 건설되었다. 산쪽(야마테) 구역 중에서 미나미야마테(南山手)가 주택지로 이용된 것에 비해, 히가시야마테(東山手) 지구는 당초 포르투갈이나 프러시아 등 각국의 영사관이 즐비하였기에 “영사관의 언덕”이라 불렸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종류의 서양집들이 지어졌으며 “오우라 번드(大浦 bund)”라고 불리는 해안거리를 중심으로 거류지에는 특색 있는 거리들이 형성되었다. 외국인거류지는 1899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서양집들은 그대로 남겨졌으며, 이는 나가사키가 이국정취를 풍기는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2】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 1938~1911>
당시 나가사키에 들어 온 상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
‘일본 최초’라는 수식어를 남긴 인물이기도 한데, 최초로 증기기관을 가져온 인물이며, 최초의 개인전화 소유자로... 최초의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또한 그는 에도 막부시대 말기, 새로운 일본의 여명을 꿈꾸던... 그리고 명치유신을 이끈 지사들...서양학문에 뜻을 둔 젊은 이들을 후원하기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악명 높은 이토 히로부미도 글로버의 도움으로 영국에 유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기상이기도 했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 우리나라를 침범하는 운양호 역시 글로버가 영국으로부터 수입해 들여왔다고 한다.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 1938~1911>
스코틀랜드 출신의 글로버는 1859年 21세의 나이에 나가사키 개항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와 글로버상회를 설립하였다. 도쿠가와 막부末期、坂本竜馬(사카모토료마)를 주축으로한 지사(志士)를 숨겨주기도 하고,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등과 같은 젊은 개혁가들의 영국유학을 돕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사업가로서 근대과학기술의 도입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일본인 여성 쓰루씨와 결혼했으나 그사이에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양자를 한명 두었다. 그의 양아들 Thomas albert Glover는 미국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에 처음으로 트롤어업을 소개하여 일본 어업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참고자료:글로버園 안내 소개책자
【3】 구라바 엔 (Glover Garden)
구라바 엔이라 불리는 Glover Garden은 스코틀랜드人 무역상 Thomas Blake Glover가 살던 옛 저택을 중심으로 나가사키 시내에 산재해 있던 서양 건축물들을 이곳으로 移轉하여 재현해 놓았는데, 18-19세기 외국인들이 살던 거류지로서 당시 외국인들의 생활상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해 놓은 곳이다. 이곳은 나가사키 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미나미야마테(南山手)에 위치해 있다.
나가사키 市는 글로버 저택 등이 있는 미나미야마테 언덕을 정비하여
시내 곳곳에 남아 있던 갖가지 서양집(미쯔비시 제2도크 하우스, 구 알트저택, 링거저택 등등)을 이곳으로 옮겼고, 이로써 구라바 엔이 탄생한 것이다. 그 이후 구라바 엔은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사랑 받는 장소가 되었다.
글로버 가든 안에 있는 구 글로버주택은
1863년에 건설된 건축물로 현존하는 목조 서양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 오페라 작곡가 Giacomo Puccini(1858~1924)의 '나비부인'
이태리 오페라 작곡가 Giacomo Puccini(1858~1924)의 '나비부인'은
라 보엠, 토스카와 함께 그의 오페라 3대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일본여성 쵸쵸상과 미국 해군장교 핑커튼의 비련을 오페라화한 것이다.
나비부인의 무대가 일본 나가사키의 스코틀랜드인 토마스 글로버의 집이었고,
나비부인의 모델이 그의 부인이었던 일본인 야마무라 쓰루(山村 鶴 1848-1899)였다.
쓰루는 184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는데, 1862년 15세 때
오이타(大分) 사람 야마무라(山村國太郞)와 결혼 이듬해 센이란 딸을 낳았다.
그러나 결혼 2년 후 이혼했다고 한다. 그녀가 글로버와 결혼한 것은 다시 2년 뒤인1866년 19세 때였고, 당시 대단한 국제결혼이었다고 한다.
글로버 부인 쓰루는 항상 기모노를 입고 지냈는데, 오른쪽 팔 부분에 나비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어 이곳 외국인들 사이에선 그녀를 나비부인이란 애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비부인'은 원래 미국의 존 루터 롱(John Luther Long)이 1898년 미국 센츄리紙에 게재한 소설로 롱은 1890년 초, 나가사키 외국인 거주지인 히가시 야마테(東山 手)에 살고 있던 사라 제니 코렐(鎭西學院 교장부인)로부터 나가사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초로 하여 소설을 쓴 것이다.
(해외무역의 창구 역할을 했던 나가사키에는 일본 여성들이 외국인과 결혼을 많이 했는데,
한때 일본정부의 기독교 억압정책에 의해 외국인과 결혼한 일본여성과 그 자녀들은 마카오 등으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당시 '나비부인'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1900년 희곡으로 다시 써 뉴욕 헤럴드 극장 무대에 올렸다. '나비부인'은 연극으로도 흥행에 성공, 런던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린 푸치니가 오페라로 제작하게 되었고, 1904년 2월 27일 밤 ,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막이오르고 '나비부인'이 초연 됐지만 결과는 참패였다고 한다.
푸치니는 수정을 거쳐 3개월 후 다시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둔다.
암먹부전나비- 암컷의 날개 색깔이 '검은색' 이라 하여 암먹부전나비 이름이 붙음
날개를 접고 있으므로 암, 수의 구별을 잘 못하겠음...^-^
암먹부전나비- 수컷- 암컷의 날개 색깔이 '검은색' 이라 하여 암먹부전나비 이름이 붙음
암먹부전나비- 암컷- 암컷의 날개 색깔이 '검은색' 이라 하여 암먹부전나비 이름이 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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