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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심온 이야기

< 심온~ 조선시대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아버지는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그의 딸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 의랑(議郞)·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 겸 판통례문사(上護軍兼判通禮門事)가 되었고, 이후 좌부대언(左副代言)·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했다. 1408년 딸이 충녕군(忠寧君 : 나중에 세종)의 비가 되었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414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호조판서·판한성부윤·좌군도총제·이조판서를 역임했다. 태종의 선위(禪位)로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141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는데, 이때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과 그의 동생인 도총제(都摠制) 심정(沈泟)이 금위(禁衛)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상왕인 태종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태종은 분노하여 이들과 함께 병조판서 박습(朴習) 등을 참수하게 했다. 심온은 당시 명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주모자로 지목되어 귀국하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된 후 사사되었다. 뒤에 이 사건은 심온이 국구(國舅)로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習)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1424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등이 청하여 관작이 복귀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는 안효(安孝)이다.

[출처]브리태니커

 

< 심온의 처형- 자결 >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로서 왕이 된 아들의 탄탄치 못할 것만 같은 입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충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배후에서 큰 공을 세운 장인인 심온과 강상인, 류정현, 윤회등의 권력남용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중 태종의 경계 대상 1호는 바로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었습니다.

심온은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11살의 어린 나이에 과거급제를 하는 등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출세가도를 달리던 인물로 그의 나이 서른넷에 왕의 셋째아들인 충녕을 사위로 받아들이는 행운까지 얻게 됩니다만 다른 시각으로 볼 땐 음모와 술수가 만연했던 왕의 외척이 되기위한 피의 레이스에 참가하는 티켓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양녕이 폐위되기까지 발생한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에 항상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와 함께 심온의 이름이 거론될 수밖에 없었는데요. 다시 말해서 이때부터 태종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즈음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관계에 대해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상왕에게는 보고하지 않자 이에 진노한 태종이 강상인과 박습을 귀양보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일이 마무리된 후 심온은 사은사로 명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사사로 떠나는 그를 전송하기 위해 명실 공히 최고의 세도가인 그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던 사대부와 백성들로 인해 과장하자면 장안이 텅 비어버린 일이 발생하는데 이일을 계기로 태종은 심온을 처단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미 사사된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와는 달리 심온의 행적엔 꼬투리를 잡을만한 구실이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 심온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박은, 안헌오 등이 예전에 있었던 강상인과 관련된 일의 배후에 심온이 있다는 보고를 합니다. 태종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가신(家臣)으로서 신임을 받아 세종 원년 병조참판까지 이르렀으나 앞에서의 불미스런 일로 유배를 당했던 강상인은 이 일로 다시 끌려와 박습과 심온의 아우 심정과 함께 국문을 당하게 되는데 고문을 견뎌내지 못한 그는 다음과 같이 거짓 진술을 하게 됩니다.
"신이 박습과 함께 도성 밖에서 심정을 만났는데 심정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금원의 결원이 많아 시위가 허술한데 왜 보충해주지 않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군사가 만일 한군데 모이기만 한다면 무슨 많고 적다 하겠는가 했습니다."

또한 심온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만 잡혀온 전이조참판 이관도" 이 역모를 주도한 것은 심온의 짓입니다. 권력을 한 손에 쥐려는 모반행위이오니 심온을 소환하여 처형하심이 가할 줄 압니다."라고 문초를 견디지 못해 허위자백을 하고 맙니다.
박은은 명나라에 간 심온이 돌아오면 그 계략이 탄로날까봐 심온이 돌아오기 전에 강상인, 심정, 박습의 처형을 서둘렀는데 강상인은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조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지에 밧줄을 매달고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묶어 극형에 처해졌으며 심정과 박습은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심온 또한 명나라에서 돌라오던 중 의주에서 체포되었으며 이미 그의 무죄를 항변할 이들이 처형당한 터라 순순히 태종이 원하는 대로 자백을 합니다. 외척이 세도를 가장 경계하는 상왕의 노파심과 신흥세력을 몰아내려는 박은 일파의 음모로 심온은 자백한 다음 날 자결로 비운의 생을 마감하며 그의 집안 또한 천민으로 몰락하게 됩니다.

[출처] 다음 지식

 

< 세종의 장인 '심온' 태종에게 처형을 당하다.>

태종이 세종대왕에게 전위할 무렵,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418년(태종18) 6월 3일.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세웠다. 6월 9일. 동지총제 원민생(元閔生)이 세자를 봉하기를 청하는 주본(奏本)을 가지고 명나라에 갔다.

그 주본의 내용을 보면 당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신(臣; 태종을 가리킴)의 장자 제를 1405년 (永樂 3)에 삼가 주준(奏准; 황제에게 아뢰어 허가를 받는 일)을 세워서 세자로 받았는데, 지금 보니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는데도 그 행동하는 바가 후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 많으므로 부득이 외방에 내보내어 안치하였습니다. 제2자 보(補; 효령대군)는 자질이 유약하여 중임을 부탁하기가 어렵고 제3자 도(충녕대군)는 성질이 자못 총명하고 지혜롭고 효제(孝悌)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한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조리 모두 촉망(屬望)하니, 후사로 세우기를 청합니다. 신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삼가 갖추어 주문합니다”

주문사 원민생을 떠나보내고 8월 6일, 조정은 곧 왕세자가 황제에게 조현(朝見)할 날을 의논하여 8월 28일로 결정하고 임금의 재가까지 받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8월 8일. 전위가 이루어졌다. 명나라로부터 왕세자를 인준한다는 허락이 도착도 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왕세자가 임금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다시 조정은 왕위 세습의 허락을 청하는 청승습주문사(請承襲奏聞使)를 파견하기 위한 준비로 부산해졌다.

9월 1일. 주문사로 박신(朴信)이, 사은사(謝恩使)로 심온(沈溫)과 부사 이적(李迹)이 임명되었고 태종은 심온에게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9월 8일. 태종과 세종대왕, 그리고 왕비가 각각 환관을 보내어 연서역(延曙驛)에서 심온을 전송하게 하였다.

실록은 이 날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전송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다른 기록에는 “심온의 환송식에 나온 사람들이 가져 온 말과 마차가 일으키는 먼지가 한양성을 뒤덮을 정도였다”고 되어있다.
권력의 축이 심온에게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력의 누수를 병적으로 싫어했던 태종에게 비상신호가 켜진 셈이다. 경계의 눈초리로 주변을 살피던 태종에게 강상인(姜尙仁), 심정(沈正), 박습(朴習)등이 걸려들었고 배후인물로 심온이 지목되었다.

태종은 곧 명령을 내렸다. 역관 전의(全義)로 하여금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연산참(連山站)으로 가서 심온을 기다려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잡아오되, 연산참을 지나가지 말고 심온이 만약 명나라사신과 함께 오거든 어머니의 병을 핑계하고 불러 내어서 잡아오게 하라고 하였다. 연산참은 명나라 땅에 있는 동팔참(東八站)의 하나로 조선 사신들이 지나다니며 들르던 곳이다. 압록강 너머 구련성(九連城)에서 약 200리 가량 떨어져 있다.
동팔참이 지나는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지역의 백성들은 대개 옛 고려인들로 명나라 관청에 가서는 한어(漢語)를 사용하나 집에서는 조선어를 쓰는 조선백성들이었다.

태종은 이들을 믿고 군사를 보내고자 명령하였으나 국경을 넘는 일은 국가간 분쟁을 초래할 수 있는 민감하고도 심각한 일이었다. 그만큼 심온을 잡아들이는 일이 중요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무렵 근거없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며 태종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자신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면 심온은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중국에 거짓을 꾸며 하소연하여 변란을 일으킬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가만히 돌아와 당을 결집하여 난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온은 태종이 보낸 또 다른 체포조인 판전의감사 이욱(李勖)에 의해 12월 22일, 의주(義州)에서 압송되어 한양으로 왔다.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심온에 대한 국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심온이 말하기를 “이 일은 신이 중국으로 간 뒤의 일인만큼 한번 대면하기를 원하옵니다”하니 태종이 사람을 시켜 심온에게 이르기를 “박습 등이 이미 죽었으니 누구와 대면하겠느냐?” 하고는 의금부진무 이양(李揚)을 시켜 수원(水原)으로 압송하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심온이 죽기 직전에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대대로 박씨와는 서로 혼인을 하지말라”고 했다 한다. 이는 박은이 자기를 죽이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온은 청송(靑松) 심씨이고 박은은 반남(潘南) 박씨다. 하지만 590년전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다.

극중에서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가 아버지 심온에게 국내의 긴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궁녀를 국경너머로 보내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1418년 12월 5일조 기록에 보면 심온의 아내가 종을 보내 귀국 길에 있는 심온을 만나게 한 것으로 되어있다.

 

 

운보의 집 분재

 

운보의 집 분재

 

운보의 집 분재

 

운보의 집 분재

 

심온선생 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