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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화신(花信)- 홍사성

 

화신(花信)

 

무금선원 앞 늙은 느티나무가

올해도 새순 띄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별것은 없고

세월 밖에서는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말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는 말씀.

 

그러니 가슴에 맺힌

결석(結石) 같은 것은 다 버리고

꽃도 보고 바람소리도 들으며

쉬엄쉬엄 쉬면서 살아가란다.

 

 - 홍사성 -

 

30년 평생 불교언론인 외길을 고집한 홍사성(60). 느닷없이 시인으로 등단하더니 4년만에 첫 시집을 냈다. 쉰일곱편의 시는 말그대로 주옥(珠玉)같이 빛을 발한다.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해서 거슬리는 바가 없다’는 이순(耳順) 나이가 힘을 발휘했는지, 시 구절구절 편하고 따듯한 기운이 넉넉하다.

 

신경림 시인은 “부처님 앞에 무료하게 앉았을 때처럼 편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시들”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한 대목 한 구절 그냥 지나가지 않고 번쩍 정신나게도 만들고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한다”고 평했다.

 

시인은 눈부신 가을날 온몸을 흔들며 반야심경을 외고 있는 늙은 은행나무 앞에서, 그동안 자신은 그저 욕망만 앞선 채 ‘빈 염불만 하는 떠돌이’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이제 ‘떠돌이’의 세월을 갈무리하고 ‘대나무 쪼개지듯 이목’이 열리는 순간을 상상하고, ‘내 몸으로 하는 설법 내가 듣게’ 되는 경지를 꿈꾸는 시인.

 

 

나의 반야심경

 

햇살 노란 가을, 양평 용문사 앞 늙은 은행나무

온몸 흔들며 반야심경 외운다

 

봄볕에 새순 틔워 이파리는 마른 가시 속에 들었다고

갈바람으로 우수수 낙엽 지게 하고는 푸른 잎이 노란 잎과 다르지 않다고

 

 한 뼘 노을에 정신 팔려 은행잎에 새긴 말씀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맡고 싶고 먹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빈 염불만 하는 떠돌이

 

물구나무서서 헛꿈 꾼 세월 참 길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천년 은행나무가 보이고 계곡 물소리까지 들린다

눈 뜨지 않아도 보이고 귀 대지 않아도 들린다

 

혹시 모르겠다, 이러다간 어느 날 갑자기 대나무 쪼개지듯 이목(耳目)이 열려

내 몸으로 하는 설법 내가 듣게 될지.

 

 - 홍사성 -

목어

 

속창 다 빼고

빈 몸 허공에 내걸었다

 

원망 따위는 없다

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

 

먼지 뒤집어써도 그만

바람에 흔들려도 알 바 아니다

 

 바짝 마르면 마를수록

 맑은 울음 울 뿐

 

 - 홍사성 -


그의 쉰여섯 시편에 깔린 생의 근원적 깨달음이 ‘목어’ 한 마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 자체에 대해 사유하면서 동시에 ‘자연’과 ‘가족’과 ‘이웃’을 통해 다다른 생의 구체적 덕목과 궁극적 이치에 주목한다. 사유와 주목의 후경(後景)에는 그 특유의 불교적 시선과 태도가 지속적으로 관류한다. 자신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시공간과 사람들에 대한 일정한 사랑과 그리움을 진하게 담아내면서, 동시에 어떤 깨달음을 통해 인간적 완성형을 갈망하는 태도다.

은행나무 수꽃

 

은행나무 수꽃

 

은행나무 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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