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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5월 18일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살며 춤추며"(7)(8)

2012년 5월 18일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부활 전 고통

 

말씀의 초대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환시 속에서 주님께 위로의 말씀을 듣는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지만 총독은 이를 유다인의 율법과 관련된 일이라고 여기며 관심을 두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해산의 진통에 비유하신다. 해산의 고통이 태어난 아이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바뀌듯이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의 고통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복음).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복음 <너희의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을 앞두시고 그들에게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과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로써 참된 기쁨은 고통 뒤에 찾아오는 것임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년에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병과 노쇠로 말미암은 많은 어려움을 신앙의 빛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십자가의 신비에 더욱 깊이 동참하였습니다. 그분은 병자와 고통 받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고 위로하였습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도 삶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산다는 것은 연속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 이성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도 없고 답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문제는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데 길들여진 사람은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명동성당 대성전 십자가의 길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니다

 

 

 


 

"자화상"
노인의 영광은 백발

정직하고 겁 없는 자화상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운을 선물하는
화가들만큼 이웃을 돌보는 모습을 훌륭하게
연출하는 사람도 드물다.

 

렘브란트는,
'표현기법의 연구를 위한 모델'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인간성이라는 매개체로
영성을 추구하고자' 예순 세 폭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인간존재의 신비를 뚫고 들어가려면
자신의 어두운 지하실과 밝은 거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렘브란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임을 알았다."

 

노년에 이르러 그는 인간경험의 핵심에 접근했고,
거기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고
'용기와 새로운 젊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적인 자기도취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끊임없이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 없이는 결코 이웃을
돌볼 수 없다.

 

이웃을 돌보려면 자신의 상처 받기 쉬운 나약함을
치료제로 내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늙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핀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늙어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몸소 체험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늙어가는 자신한테서 노인들에게 앞날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도록 이끄는 힘이 솟아난다.

 

"살며 춤추며"(7)- 유웅열 글.
헨리 나웬 신부 지음.

 

 

권하고 싶은 말씀:

다독(多讀)의 의미는,

여러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 또는 한 줄의 글을 여러번 읽어서,

그 글이 내포하고있는 뜻을 찾을 때까지
여러번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글이든지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의미와 진리가 그 안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묵묵한 지지 : -마음의 길-

 

압바 티도에스는,
"순례란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리는 것"
이라고 했다.

 

"순례는 곧 침묵이다."라는 말은,

"침묵이야말로 앞으로 올 세상에 있을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막 교부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침묵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사람을 죄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 금욕 주의적 가르침의 밑바닥에는
말이 우리를 세상 일에 빠지게 하고 얽혀들게 해
오염되지 않기란 무척 어렵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언뜻 들으면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주 토론장이나 회의장에서
또는 개인과의 대화나 모임에서 많은 말을 하고는
쓰디쓴맛을 느끼는가?

 

장황한 연설에서 알찬 열

매를 거둔적이
몇번이나 있는가?

 

우리가 내뱆은 말 가운데 차라리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지만
그렇게 해서 과연 얼마나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방식에 대해 말이 많다.

 

그런데 그 많은 말이
사람들과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우리는 틈만 나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한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그 내용을 스스로 이해하는가?

 

그리고 그 말들이 듣는 이들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준 적이 얼마나 있는가?

 

말은 자주 우리에게 내적 패배감을 안겨 준다.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사소한 절망에 빠지거나 마음의 창을 흐리게 하는
안개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은 주님을 섬기기보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여행길의 작은 주막에
오래 앉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순례는 곧 침묵이다.

 

"살며 춤추며"(8)- 유웅열.
헨리 나웬 신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