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항복(李恒福)이 살던 곳- 원남동
호동에는 선조 때 정승인 백사 이항복이 살았다. 젊어서 필운동의 장인 권율장군의 집에서 살았는데 중년이 넘어서 우연히 이곳을 지나치다가 좌우를 살펴보니 둔덕에 둘러싸여 항아리 속같이 생겼으므로 천하의 명당으로 보고 바로 이사하였다. 그가 이곳에 이사한 후 얼마되지 않아 조정에서 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여인이 말 앞을 바로 지나가자 하인들은 정승의 행차에 무례하다며 여인을 꾸짖고 땅바닥으로 밀어부쳤다. 넘어진 여인을 뒤로 하고 일행이 집에 당도하자 이항복은「아무리 내가 정승이기로서니 퇴청하는 길이어서 바쁠 것도 없고 사람을 밀어 땅에 넘어뜨리게 한 것은 너희들이 내 권한을 빙자한 월권이고 나는 백성에게 잘못한 것이니 추후로는 백성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며 엄중하게 야단을 쳤다. 그런지 얼마되지 않아 넘어졌던 그 여인이 뒤쫓아 와서 집앞 소용골 언덕에서 악을 쓰며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머리 허연 늙은 것이 종을 풀어 길가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길을 온통 차지하는 것이 정승이냐. 네가 정승으로 나라에 무슨 일을 했기에 이런 위세를 부리느냐」고 하자 주위에서는 그 여인을 잡아들이라 하며 쑤군거렸다. 그러나 이항복은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하인들을 집밖으로 나서지도 못하게 엄명을 내렸는데 때마침 찾아온 손님이 욕설을 하는 여인을 왜 ?아내거나 잡아들이지 않느냐는 반문을 하였다. 그러자 이항복은「머리 허연 늙은 내가 먼저 잘못했으니 저 여인이 성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그 여인이 욕을 하고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 여기서 호동은 갑오개혁 당시 지명으로 원남동에 속해있던 곳입니다.. [출처] 다음 지식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친구가 된
오성[鰲城, 호(號)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호가 한음(漢陰)인 이덕형(李德馨)은 특히 선조의 신임이 대단했습니다.
임진왜란 동안 병조판서를 번갈아 맡았던 두 사람은
국난의 위기를 수습하고 대처한 조선 중기의 충신입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나중에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어,
그래서 백사인 호보다 오성으로 더 잘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병조판서, 이조판서,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이란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한음 이덕형은 1561(명종 16)년에 태어나 1613(광해군 5)년에 세상을 떠났고,
단짝 친구인 오성 이항복은 1556(명종 11)년에 태어나 1618(광해군 1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음 이덕형이 오성 이항복 보다 5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관직은
항상 한음이 오성의 뒤를 이었고 결혼은 같은 해에 했습니다.
오성은 권율장군의 딸을, 한음은 정승 이산해의 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오성이 권율의 사위가 된 일화로서,
오성의 집의 감이 아주 풍성하게 달린 감나무 가지 중 몇가지가
권율 대감집의 담을 넘어 갔다고 권율가의 노비들이 몽땅 따가니
오성가의 노비들은 주인이면서도 감을 제대로 수확을 못하는 지경에 처합니다.
당시 옆집 권율대감집은 세도가 당당하여 오성의 집안에서는
감히 따질 수가 없지만, 이 사실을 노비들에게 우연히 전해들은 오성은
권율대감 집으로 몰래 들어가 권율대감이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주먹을 문종이 사이로 푹 집어 넣습니다.
권율은 갑자기 문종이가 찟어지면서 손이 들어오니
상당히 놀라지 안을 수가 없었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느 놈의 짓이냐고 호통을 치자~~~.
그 때 오성은
"대감님 이 손이 문을 넘어오기는 했지만 누구의 손입니까?"하자
"그야 네 손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
(뭘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투로)
"그런데 감나무의 큰 가지가 대감님의 담을 넘어왔다고
몽땅 가져가면 어쩌나요---?"
결국 이런 일화로 인해 권율의 사위가 되었지만~~~.
한편, 한음이 당시 세도가 당당한 이산해의 사위가 된 사연은
토정비결을 만든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
한음이 어릴적 길에서 노는 것을 우연히 보고
장차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인물이라는 것을 예감하고서,
그 당시 영의정이던 조카 李山海(이산해)에게 사위감으로 천거하자
결국 한음은 17세 때 네 살 아래인 이산해의 둘째 딸(당시 13세)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하니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예언가이지만,
역시 토정(土亭)의 안목이 대단하지요!
평생을 친구로 지내며 우정을 나눈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재치 있는 장난을 잘 쳤는데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답니다.
한번은 대궐에서 오성과 한음이 서로 내가 "아비"라며
농담을 하는 것을 본 선조 임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는데---.
“대체 누가 아비이고, 누가 아들이오?”
임금의 우스갯소리에 오성과 한음은 서로 더욱
자기가 아비라고 우겼답니다.
그러자 선조임금은,
"그럴 것 없이 오늘은 내가 아비와 아들을 확실하게 가려 주겠소."
선조 임금은 신하를 시켜 종이 쪽지 두 장에
한자로 "아비 父" 자와 "아들 子" 자를 쓰게 한 후,
오성과 한음에게 뒤돌아 앉으라고 하더니
그 종이 쪽지를 접어서 두 사람 등 뒤 바닥에 하나씩 놓았습니다.
"자, 이제 돌아 앉아서 앞에 놓인 종이를 한 장씩 집어서 펴 보시오."
오성과 한음은 얼른 종이 쪽지를 집어 펴 보더니,
먼저 한음이 “제가 아비입니다” 하며
"아비 父" 자가 써진 종이를 펼쳐 보이며 즐거워 하자,
오성도 역시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싱글벙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임금이,
"그대는 `아들 子` 자를 집었을 텐데 뭐가 좋아서 그리 싱글벙글하오?"하며
오성에게 물으며 의아해 하자,
오성은 무릎 위에 펴놓은 종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무릎 위에 앉혔으니,
이 아비의 마음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오성의 재치 있는 농담에 선조는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고 말았답니다.
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율곡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 중인 와중에
율곡 선생님과의 오성의 대화 한 토막~~~.
"선생님 남녀의 어린 시절엔 그 것을 "자지, 보지"라 하다가
어른이 된 후엔 왜 그 것을 "좆, 씹"이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하자
다른 유생들은 당황스러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율곡 선생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합니다.
잘 들어라,
우선 여자의 "보지"는
"걸어다녀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보장지(步藏之)"라는 말이
변해서 된 이름이고,
남자의 "자지"는
"앉아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좌장지(坐藏之)"라는 말이
변해서 된 이름이다.
또한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는 그 것이 항상 말라있어야 되기에
"마를 조(燥)"자를 쓴 것이 발음 편의상 "좆"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여자는 그 것이 항상 젖어 있어야 하기에
"습할 습(濕)"자를 쓴 것이 된발음이 되어 "씁"이 되었다가
발음 편의상 "씹"이 된 것이다.
또 남자의 그것을 "자지"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아이 즉 자식을 낳는 나무요, 또 가지를 치는 것"이라 하여
"아들 子"자와 "가지 枝"자를 써서 "자지(子枝)"라 이르고,
여자의 그것은, 자식을 담아 기르는 보배스런 못이라고 하여
"보배 보(寶)"자 와 "못 지(池)" 자를 써서 "보지(寶池)"라고도 한단다.
당시의 사회 통념상, 율곡 선생님이 소인배 같았으면 호통을 쳤으련만
이렇게 자상하게 가르쳐 준 것을 보면
역시 "그 제자에 걸맞은 그 스승"이 아닌가 합니다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설화.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석간적이란 표현은 한양오백년가에 나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나서 중국에 구원병을 청하게되었는데,
이때 장수로 온 사람이 이여송이었습니다.
그는 흉노와 싸우다가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다시 조선이 나가라고 하니 화가 나서
가지 않은 트집을 잡느라고 압록강 앞에서
백사 이항복에게 세 가지 요구 조건을 내겁니다.
용의 간, 석간적을 내놓고 소상반죽으로 먹게 해주면
전쟁애 참여하겠다고 합니다.
이항복이 압록강에 가서 하늘에 빌어 용의 간을 얻고
주머니에 있던 소상반죽을 내어 놓습니다.
석간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말은 한자어로 石間炙이라고 쓰는데
이 말의 뜻은 돌 사이에 나온 것으로 구운 부침개
입니다.
돌 사이에서 나온 것은 바로
맷돌을 통해서 나온 것이니
콩으로 만든 두부를 말합니다.
그것으로 구운 부침개를 바로 석간적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우리말입니다.
두부 부침개와 용의 간을 소상반죽으로 먹은 이여송은 할 수없이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정도로 설명드립니다.[출처] 다음 지식
종군행(從軍行)-이항복(李恒福)
군대를 따라
西湖轉粟當嚴冬(서호전속당엄동) : 서호에서 곡식을 운반하는데 엄동설한을 만나
萬民難給千夫膳(만민난급천부선) : 만백성이 성인 천 사람의 식량도 공급하기 어렵다.
師到南原拍馬廻(사도남원박마회) : 군사가 남원에 와서는 말 채찍질하여 돌아가는데
賊衆猶屯求禮縣(적중유둔구례현) : 적의 무리는 아직도 구례현에 주둔하여있다.
萬竈貔貅霜滿野(만조비휴상만야) : 수만의 군사 용맹하고 서리는 들에 가득 끼어
天兵搜粟疲人泣(천병수속피인읍) : 천병의 곡식 요구에 피폐한 백성 울어댄다.
懸知本爲活我來(현지본위활아래) : 본래 우리를 살려내려 왔음은 충분히 알지만
不耐妻兒眼前急(불내처아안전급) : 처자식의 당장 급한 처지를 견뎌낼 수 가 없도다.
沙塵捲地野微明(사진권지야미명) : 모래 먼지가 땅을 말아 들판이 희미하고
鐵騎千群曉撇挨(철기천군효별애) : 철기병 천여 명이 새벽부터 뛰어 달리는구나.
師行千里日兼程(사행천리일겸정) : 천리 행군 이틀 길을 하루에 가노라니
石上斑斑馬蹄血(석상반반마제혈) : 말발굽의 피가 흘러 돌 위에 얼룩졌도다.
曠野無煙風怒號(광야무연풍노호) : 넓은 들판에 인적은 없고 바람만 거센데
將軍曉發哀笳咽(장군효발애가인) : 장군이 새벽에 출발하니 호가 소리에 목멘다.
腥雲和雨撲人顔(성운화우박인안) : 비린내 나는 구름은 비와 섞여 사람의 얼굴을 때려
凍作征夫萬鬢雪(동작정부만빈설) : 수많은 군사의 귀 밑머리에 고드름을 얼린다.
고우(苦雨)
장마
苦雨連旬夜徹明(고우련순야철명) : 장마비 열흘 동안 주야로 계속 되어
曉庭雲物太縱橫(효정운물태종횡) : 새벽 뜰의 구름 안개 너무나 자욱하다.
牀牀避漏人何限(상상피루인하한) : 침상마다 새는 새는 비 피하는 사람을 어찌 원망하며
種種緣愁髮幾莖(종종연수발기경) : 종종 시름으로 백발은 몇 줄기나 더했는가.
沙捲洑流穿竈入(사권보류천조입) : 모래는 봇물에 밀려서 부엌까지 들고
蛙隨驚犬上墻鳴(와수경견상장명) : 개구리는 놀란 개를 따라 담장에 올라 울고 있다.
鍾城戰血今如海(종성전혈금여해) : 종성의 전쟁의 피가 지금 바다와 같아
天厭頑胡爲洗兵(천염완호위세병) : 하늘이 싫어하여 오랑캐 군대를 비에 젖게 하는구나.
무제(無題)
簾外遊塵映隙曛(렴외유진영극훈) : 주렴 밖의 떠도는 먼지는 햇살에 비치는데
春情無賴對黃昏(춘정무뢰대황혼) : 춘정을 달랠 길 없어 황혼을 마주 바라본다.
王孫獵罷歸來晩(왕손렵파귀래만) : 왕손이 사냥 끝내고 저물녘에 돌아오니
活火金壺麝酒溫(활화금호사주온) : 타는 불 위에 금 술잔의 사향주가 따뜻하다.
楚臺春夢未分明(초대춘몽미분명) : 초나라 누대의 봄꿈은 아련하지만
雲雨猶堪惱半生(운우유감뇌반생) : 운우의 정이 오히려 반평생을 괴롭게 한다.
人世此歡應勝夢(인세차환응승몽) : 인간 세상의 이 즐거움 꿈보다 나으련만
却嫌行樂不多情(각혐행악불다정) : 도리어 행락의 다정하지 못하여 싫어하노라.
산수도(山水圖)
江虛月露明(강허월로명) : 강은 비어있고 달 아래 이슬은 밝고
夜久松杉寂(야구송삼적) : 깊은 밤, 소나무 삼나무는 고요하다
漁人未歸來(어인미귀래) : 어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浪擊溪頭石(랑격계두석) : 물결은 시냇가의 돌을 치는구나.
驢後小兒隨(려후소아수) : 당나귀 뒤에는 어린아이 따라가고
驢前風日好(려전풍일호) : 당나귀 앞에는 살랑거리는 바람 날씨가 좋다
無人語所思(무인어소사) : 생각난 것 이야기 나눌 사람 아무도 없어
獨自行長道(독자행장도) : 혼자서 먼 길을 가야만 하는구나
落雁帶斜景(락안대사경) : 내려앉는 기러기 석양빛을 띠고
雲濤浮遠空(운도부원공) : 구름 같은 파도는 먼 공중에 떠 있도다.
無心坐篷底(무심좌봉저) : 무심히 봉창 아래 앉으니
何處是江東(하처시강동) : 어느 곳이 곧 강동 땅이란 말인가
江閣觀雨(강각관우)
강가 누각에서 내리는 비를 보다
雲間日脚漏靑蕪(운간일각루청무) : 구름 사이로 햇발이 새어나와 순무를 비추고
雲外靈珠一點孤(운외령주일점고) : 구름 밖에 영주봉이 한 점 가물거린다.
風自遠峯來有響(풍자원봉래유향) : 먼 봉우리에서 바람소리 들려오고
朦朦吹雨過平湖(몽몽취우과평호) : 흠뻑 비를 날리며 평평한 호수를 지나간다.
雨中偶吟(우중우음)
비 내리는 속에서 우연히
急雨鳴山攪客眠(급우명산교객면) : 소나기 산을 울려 나그네 잠을 깨우고
檻前屛壁忽蒼然(함전병벽홀창연) : 난간 앞에 병풍처럼 늘어선 벽이 갑자기 푸르다.
雀因鬪粟翻階散(작인투속번계산) : 참새가 밤을 다투어 섬돌 앞에 날개 펄럭이고
蛛爲遮蜂結網懸(주위차봉결망현) : 거미는 벌을 잡아 거미줄에 매어단다
等把勝輸推物理(등파승수추물리) : 뛰어난 암시를 얻어 사물의 이치 생각하니
不將癡黠較機權(불장치힐교기권) : 어리석고 약은 지혜로 기회를 저울질하지 말라.
年來自斷吾生久(년래자단오생구) : 스스로 나의 생이 긴 줄로 알았으나
行止非人況問天(행지비인황문천) : 행하고 그치는 것 사람의 것 아닌데 하물며 하늘에 물으랴.
[출처] 다음지식
민속촌 소경~ 좌측 끝에 맷돌...잡는 나무(어처구니)가 없습니다...ㅜㅜ...^-^
맷돌 사이에서 콩을 갈아 만든 두부...그것으로 구운 부침개를 '석간적'이라고 한답니다...ㅠㅠ...^-^
민속촌 소경~ 좌측 끝에 맷돌...잡는 나무(어처구니)가 없습니다...ㅜㅜ...^-^
그 옆으로 여물통, 절구통이 있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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