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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이광덕 (李匡德·1690~1748)

  • 이 광덕 (李匡德·1690~1748) 
  • 1690년(숙종 16)~1748년(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 [가계]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뢰(聖賴), 호는 관양(冠陽), 존제(尊齋)이다. 이경석(李景奭)의 현손이고, 탕평론을 최초로 주창하였던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자이며, 대제학 이진망(李眞望)의 아들이다.

  • [활동사항]
  • 진사로서 1722년(경종 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에 시강원설서로 임명되어 왕세제(王世弟:뒤의 영조)를 보도(輔導)하였다. 소론 중 완소계열(緩少系列)의 일원으로서 송인명(宋寅明), 조문명(趙文命), 정석삼(鄭錫三) 등과 함께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 김일경(金一鏡) 등과 갈등을 하였다.

    1724년에는 정언과 부교리를 거쳐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민진원(閔鎭遠)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遞職)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수찬·교리에 임명되었다가 1727년(영조 3) 호남에 기근이 심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돌아와 이조좌랑을 지냈다.

    조태억, 조지빈의 부자와 홍문관 관원의 천거 문제로 갈등하다가 조지빈과 함께 파직되기도 하였다.

    1728년 1월 호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 그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고 전라도 태인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박필현(朴弼顯)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감사로 부임한 뒤 지방재정, 부세제도(賦稅制度) 등에 일대 개혁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원성을 들었고, 1729년 부수찬 이양신(李亮臣)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소론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할 때에 함께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무고로 밝혀졌다.

    이듬해에는 이조참의를 거쳐 1731년에 승지를 지내고 1732년 다시 호남의 감진어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 대사헌을 거쳐 1739년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나라에 다녀왔고 대제학·예조참판을 지냈다.

    1741년 아우인 지평 이광의(李匡誼)가 국문을 받자, 이광의를 구하려고 변론하여 정주에 유배된 뒤 다시 친국을 받고 해남에 이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과천에 은거하던 중 1744년 서용(敍用)하도록 명이 내려 졌으나 관직을 사양하였다.

  • [저서]
  • 저서로는 『관양집(冠陽集)』이 있다. 그는 병려문과 시에 뛰어났다. 특히 그의 시는 꾸밈이 높고 날카로운 맛이 있으며, 의미가 정묘하므로 거의 한 시대의 으뜸으로 평가 받았다.

  • [묘소]
  • 묘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전주이씨 백헌공파에서 관리하는 묘역에 있다.

    [참고문헌]
    이규상(李奎象),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창작과 비평사, 1997)
    성남시사편찬위원회, 『성남시사』(성남시사편찬위원회, 1993)
    [관련항목] •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광덕

    [출처] 디지털 성남문화대전

     

    황혼(黃昏)

     

    황혼 뒤에 작은 달은 떨어지고
    푸득푸득 새는 날아 산 빛 속에 숨어든다.
    대청 앞의 늙은 파수꾼은 휘늘어진 나무
    성곽 넘어 고매한 어른은 우뚝 높은 산
    경박한 세상이라 뼈만 앙상한 몸을 멀리하고
    흐르는 세월은 젊은 얼굴을 앗아간다.
    나는 너와 은총과 원한을 다투지 않건만
    무슨 일로 벌레처럼 헐뜯으려 덤비는가?

    ―이광덕(李匡德·1690~1748)

    ☞ 카테고리 [시/한시/시조/동시: 황혼- 이광덕]과 연관

     

    이광덕과 기녀 가련(可憐)의 애달픈 사랑
    <이수광님의 소설 중 조선시대 한 여인 애달픈 사랑이 있어 옮겨 봄>
    이광덕(李匡德)은 학문이 뛰어나서 영조가 세자로 있을 때 이미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당쟁이 극심할 때 노론과 소론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에서 모두 미움을 받았다. 그는 청직을 두루 역임하고 전라도 어사,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뒤에 한때 벼슬에서 물러난 적도 있었으나 곧바로 강화유수를 역임하고 다시 복관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광덕은 사령들을 거느리고 비밀리에 함흥에 이르렀는데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도 어사가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관내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엇다.
    ‘내가 걸인의 행각으로 변신을 했는데 어사가 온다는 것을 어찌 알았다는 말인가?’
    이광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광덕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종자들이 소문을 누설한 것으로 판단하고 엄하게 신칙했으나 종자들은 종시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광덕은 공무를 모두 처리하고 나자 군리들을 선화당(宣化堂) 뜰에 정열하게 하고 소문의 진원지를 추적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어사가 온다는 것을 알았느냐?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형장을 칠 것이니 그리 알라!”
    이광덕이 함흥부의 아전들을 추궁했다.
    “관내에 소문이 파다하였사옵니다.”
    아전들이 바짝 긴장하여 대답했다.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밝히라.”
    이광덕이 추상같은 영을 내리자 군리들이 함흥 일대를 휩쓸고 다니더니 7세된 소녀를 데리고 왔다.
    “사또 소문은 이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함흥 판관이 댕기머리를 한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무슨 소리냐?”
    “이 아이가 처음으로 어사또가 왔다는 말을 내었다고 합니다.”
    아전의 말에 이광덕은 소녀를 쏘아보았다. 소녀는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입매가 야무졌다.
    “강보에 있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냐?”
    이광덕은 어이가 없었다.
    “아뢰옵니다. 소녀의 집이 길가에 있는데 한 번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걸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의복과 신이 다 헤어졌으나 손이 희었습니다. 소녀가 가만히 생각하니 헐벗고 굶주린 걸인이 어찌 손이 흴까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걸인 한 사람이 옷을 벗어 이를 잡은 뒤에 손이 흰 걸인에게 공손히 건네주자 손이 흰 걸인이 옷을 벗어 처음의 걸인에게 주고 손이 흰 걸인은 그 옷을 입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존비(尊卑)인 것 같았습니다. 소인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손이 흰 사람은 어사인 것 같았고 예를 다해 섬기는 걸인은 종복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이광덕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녀에게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소녀의 재지와 총명이 놀라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련(可憐)이라고 하는 동기(童妓)이옵니다.”
    “네가 기적에 있다는 말이냐?”
    “예.”
    소녀가 머리를 조아렸다.
    “너의 총명이 가히 여사(女士)가 될만하구나. 내가 절구 한 수를 주마.”
    이광덕은 지필묵을 준비하게 하여 가련이라는 소녀에게 시 한수를 써주었다.

    어린아이의 재주가 총명하니 문사라 부를만하고
    옥용이 아리따우니 한 떨기 꽃과 같구나
    아직은 봉오리가 열리지 않았으나
    만개하면 관북의 진랑(眞娘)이 되리라

    진랑은 송도삼절로 일컫는 황진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가련이 공손히 이광덕의 시를 받았다.
    “소녀는 어사또 나으리께서 주신 글월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사옵니다.”
    가련이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라?”
    “훗날 사또 나으리께서 소녀를 거두어주소서. 소녀는 감히 나으리께 일생을 의탁하겠사옵니다.
    “핫핫핫! 아주 맹랑한 아이로구나. 사람이 장차 어찌될 줄 알고 나에게 의탁한다는 말이냐?”
    “나으리께서 변하지 않는다면 소녀는 변치 않을 것입니다.”
    가련 의 말에 이광덕은 오싹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이광덕은 어사의 일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광덕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청직을 두루 역임했다. 10여년이 지났다. 이광덕은 소론의 탄핵을 받아 함흥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함흥의 한 초가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나으리.”
    하루는 이광덕이 만공에 걸린 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여인이 사립문밖에 나타났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광덕은 희디흰 달빛을 받고 서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소녀는 가련이라고 하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가련이?”
    “소녀가 어릴 때 사또께서 함흥에 출동하시어 글을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렇군. 이제 생각이 나는구나.”
    이광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련은 이미 여인의 자태가 완연했다.
    “헌데 네가 여기는 어인 일이냐?”
    “소녀는 나으리를 모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허허. 나와 같은 사람을 무엇 때문에 기다린다는 말이냐? 그것은 벌써 10년 전의 일이 아니냐?”
    “소녀는 이미 나리께 일생을 의탁하겠다고 맹세를 하였으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옆에서 나으리를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너의 뜻은 가상하다만 나는 나라에 죄를 입은 몸이라 여색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어찌 더 기다리지 못하겠나이까? 소첩은 나으리의 죄가 풀릴 때까지 가다리겠사옵니다.”
    가련이의 말에 이광덕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가련은 과연 이광덕이 함흥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를 했다. 이광덕은 가련이 자신을 받드는 정성은 고마웠으나 그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늙은 것이 아까워서 출가하라고 몇 번이나 권했다. 그러나 가련은 한결같이 정조를 지키고 이광덕을 위하여 모든 수발을 들었다. 달 밝은 밤이면 누대에 올라 제갈공명의 공명 가와 출사표를 읊는데 그 소리가 요요하고 맑아서 마치 학이 우는 소리와 흡사했다.

    <옮기면서 덧붙여 쓴 것임>
    공명가(工明歌 서도잡가(西道雜歌)의 하나 지은이 연대미상)

    공명이 갈건야복으로 남병산올라
    단높이 뫃고 동남풍빌제
    동에는 청룡기요 북에는 현무기요
    남에는 주작기요
    서에는 백기로다 중앙에는 황기를 꽃고
    오방기치를 동서사방으로 좌르르르 버리워꽃고
    발벗고 머리풀고 학창흑대띠고
    단에올라 동남풍 빌은후에
    단하를굽어보니 강상에 둥둥둥둥 떠오는
    배 서성정봉의 밴줄로만 알았드니
    자룡의 배가 분명하구나 즉시 단하로
    내려가니 자룡선척을 대 하였다가
    선생을 뵈옵고 읍하는말이 선생은
    체후일향 하옵시며
    동남풍 무사히 빌어게시나이가 동남품은 무사히
    빌었으나 뒤에 추병이 올듯하니
    어서 배돌리어 행선을하소서 자룡이
    엿자오되 소장하나 있사오니
    무삼염려가 있아오리가 즉시 배를타고
    -하 생략-

    出師表 - 諸葛亮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罷弊 ,
    선제창업미반, 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파폐,

    선제(유비)께서 왕업을 시작하신 지 아직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중도에서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익주가 오랜 싸움으로 지쳐 있으니,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차성위급존망지추야. 연시위지신, 불해어내, 충지지사, 망신어외자,

    이는 진실로 위급하여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모시고 지키는 신하들이 (궁중)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뜻이 있는 무사들이 밖에서 자기 몸을 잊고서 애쓰는 것은,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개추선제지수우, 욕보지어폐하야. 성의개장성청, 이광선제유덕,

    대개 선제의 특별히 두터웠던 대우를 추모하여 이를 폐하에게 갚고자 함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성스러운 폐하의 귀를 열고 펴시어, 그것으로써 선제가 남긴 덕을 빛나게 하여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회홍지사지기, 불의망자비박, 인유실의, 이색충간지로야.

    뜻 있는 선비의 의기를 넓고 크게 해야 하고, 망령되이 스스로 덕이 없다고 여겨 비유를 끌어대 의를 잃어, 그것으로써 충간의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하 생략-


    판소리중 적벽가(赤壁歌)

    군사들이 승기(勝氣)내어 주육을 장식하고,
    노래 불러 춤추는 놈 서럽게 곡하는 놈 이야기로 히히 하하 웃는 놈 투전(鬪霜)하다 다투는 놈 반취(半醉) 중에 욕하는 놈 잠에 지쳐 서서 자다 창 끝에다가 턱 꿰인 놈, 처처(處處) 많은 군병 중에 병노직장위불행(兵勞則將爲不幸)이라. 장하(帳下)의 한 군사 전립(戰笠) 벗어 또루루 말아 베고 누워 봇물 터진 듯이 울음을 운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울음을 우니,

    한 군사 내달으며,
    "아나 이애 승상(丞相)은 지금 대군을 거나리고 천리 전쟁을 나오시어 승부를 미결(未決)하야 천하 대사를 바라는데, 이놈 요망스럽게 왜 울음을 우느냐 우지 말고 이리 오느라 술이나 먹고 놀자."
    저 군사 연(然)하여 왈,
    "네 설움 제쳐 놓고 내 설움 들어 보아라."

    -중 생략_

    이내 설움 들어 봐라. 나는 부모 일찍 조실(早失)하고 일가친척 바이 없어 혈혈단신(孑孑單身) 이내 몸이 이성지합(二姓之合) 우리 아내 얼굴도 어여쁘고 행실도 조촐하야 종가대사(宗家大事) 탁신안정(托身安定) 떠날 뜻이 바이 없어 철 가는 줄 모를 적에 불화병 외는 위국땅 백성들아 적벽으로 싸움가자 웨는 소리 나를 끌어내니 아니올 수 있든가. 군복 입고 전립(戰笠) 쓰고 창을 끌고 나올 적에 우리 아내 내 거동을 보더니 버선발로 우루루루 달려들어 나를 안고 엎더지며, 날 죽이고 가오 살려두고는 못 가리다. 이팔 홍안 젊은 년을 나 혼자만 떼어놓고 전장을 가랴시오. 내 마음이 어찌 되겄느냐. 우리 마누라를 달래랄 제 허허 마누라 우지 마오 장부가 세상을 태어나서 전장출세(戰場出世)를 못 하고 죽으면 장부 절개가 아니라고 하니 울지 말라면 우지 마오. 달래여도 아니 듣고 화를 내도 아니 듣던구나. 잡았던 손길을 에후리쳐 떨치고 전장을 나왔으나 일부지전장 불식이라. 살아가기 꾀를 낸들 동서남북으로 수직(守直)을 허니 함정에 든 범이 되고 그물에 걸린 내가 고기로구나. 어느 때난 고국을 갈지 무주공산 해골이 될지 생사가 조석이라. 어서 수이 고향을 가서 그립던 마누라 손길을 부여잡고 만단정회 풀어볼꺼나 아이고 아이고 내 일이야.


    가련이 적벽가를 노래할 때는 마치 천군만마가 질타를 하는 듯이 웅장하다가 출사표를 노래할 때는 간장을 끓을 듯이 애절하여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내가 옛날에 소를 배운 일이 있는데 약간의 흥취를 도울가 하노라.”
    이광덕은 귀양을 올 때 가지고 온 통소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가련이 살포시 미소를 지은 뒤에 다시 낭랑한 목소리로 출사표를 읊기 시작했다. 가인은 출사표를 읊고 선비가 퉁소를 부니 비장한 선율이 달빛을 희롱하는 듯 바람을 희롱하는 듯 애절했다.
    가련은 시간이 있을 때면 이광덕을 찾아와서 출사표를 읊었다.
    이광덕은 가련이의 목소리가 애절하여 7언 절구의 시를 지었다.

    咸關女俠滿頭絲 爲我高歌兩出師
    함관여협만두사 위아고가양출사

    唱到草廬三顧地 遂臣淸淚萬行垂
    창도초려삼고지 수신청루만행수

    함흥의 여협은 머리에 실이 가득한데
    나를 위해 출사표를 높이 부르네
    읊다가 세 번 초려를 찾은 곳에 이르면
    귀양온 신하의 눈물이 만 줄로 흐르네.

    이광덕과 가련은 애잔한 사랑을 나누었다. 육체관계가 없는 순수한 사랑이었다. 가련이의 사랑은 공명의 출사표에 절절하게 담기었고 이광덕의 사랑은 퉁소 가락에 실렸다. 이광덕은 몇 년만에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광덕과 가련은 만난 지 여러 해만에 처음으로 운우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제 나는 성상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죄에서 용서를 받아 들어가는 네가 너를 데리고 돌아가면 대간들의 탄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한양에 올라간 뒤에 반드시 너를 부를 것이니 조금 늦는다고 탓하지 말고 기다리라.”
    이튿날 아침, 이광덕이 가련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는 오로지 나으리만 기다리겠어요.”
    가련이 울면서 말했다. 그러나 이광덕은 한양에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제학을 역임하고 병으로 죽고 말았다. 가련은 이광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을 하고 울었다.
    ‘아아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나으리를 만나 사랑을 나누려고 했는데 먼저 가시니 날 더러 어이하란 말인가? 나으리께서 좋아하시던 출사표를 불러 혼백을 모시리라.’
    가련은 이광덕의 제사상을 차린 뒤에 소복을 입고 공명의 출사표를 불렀다. 그러잖아도 비장한 공명의 출사표에 사랑하는 임을 잃은 가련이의 애통한 심정이 실리니 마치 혼백이 노래를 하는 듯이 애절하고 처량했다. 가련의 출사표가 전날보다 더욱 애절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가련은 출사표를 모두 부른 뒤에 자결하여 죽었다. 함흥 사람들이 가련이 불쌍하다고 하여 장사를 지내주었다.
    ‘애절하구나. 어찌 이런 기구한 사랑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비석을 세워 여협의 혼백을 위로하리라.’
    여러 해가 지났을 때 어사 박문수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함관여협가련지묘(咸關女俠可憐之墓)라고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수광님의 소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연애 사건 중에서-


    이광덕 (李匡德 1690∼1748(숙종 16∼영조 24))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성뢰(聖賴), 호는 관양(冠陽). 본관은 전주(全州). 1722년(경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로 중용되어 왕세제(王世弟;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노론·소론 사이의 당쟁이 격화될 때 탕평론(蕩平論)을 주장, 조태구(趙泰耉)·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급진세력으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1724년(경종 4)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민진원(閔鎭遠)을 구하려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遞職)되었으며, 영조가 즉위한 뒤 수찬·교리·호남별견어사(湖南別遣御史) 등에 임명되었다가 1728년(영조 3)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이인좌(李麟佐)의 난 주역 가운데 하나인 박필현(朴弼顯) 등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관찰사로서 이인좌 난의 모의를 미리 알았으리라는 노론의 무고로 삭직(削職)당함과 동시에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 뒤 대제학·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41년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이 일어났을 때 아우인 지평 광의(匡誼) 가 김복택(金福澤)을 논죄하다가 국문을 받자, 광의를 구하려고 변론하여 정주에 유배된 뒤 다시 친국을 받고 해남에 이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과천에 은거하던 중 1744년 서용(敍用)하도록 명이 내려 한성부우윤·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였다.
    만년에는 급소계열로 당을 바꾸었으나 쓰이지 못한 채 죽었다.
    저서로는 관양집(冠陽集)이 있다.


    소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연애 사건 저자 이수광
    소설가. 1983년 <중앙일보>에 <바람이여 넋이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제14회 삼성문학상 소설 부문, 미스터리클럽 제2회 독자상, 제10회 한국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한국 역사의 미인》, 《나는 조선의 국모다》,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천년의 향기》, 《신의 편작》, 《춘추전국시대》, 《파워 엘리트를 위한 지략》,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외 다수의 작품이 있다.

    [출처] 다음

     

    베게에게/ 이광덕

    나무를 깎아 베개를 만들었다. 길이는 한 자 다섯 치, 폭은 다섯 치, 두께는 세 치였다. 그 베개에 머리를 고이고 누워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아주 편하게 잠을 잤다. 그렇지만 낮에는 베개를 밀쳐놓거나 던져버렸고, 어떤 때는 궁둥이를 받치고 걸터앉기도 했다. 그날 밤에 베개가 노기를 띤 얼굴로 꿈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기둥을 뒤흔들어도 나는 괴로워하지 않았고, 그대의 쇳덩어리 같은 두개골과 두꺼운 이마가 산악처럼 무겁게 나를 짓눌러도 나는 힘들어 하지 않았으며, 그대가 침을 흘리고 땀을 쏟으며, 때와 기름기로 갈수록 나를 더럽혀도 나는 조금도 더러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크나큰 수고를 베푸는 내게 그대는 되레 욕을 보이다니! 아! 이렇게도 모질게 굴다니!”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꾸짖었다.

    “너는 물러나라! 너는 나무에 불과하다. 산마루 앞뒤에는 기(杞)나무와 노나무, 소나무와 녹나무가 숲을 이뤄 위로는 하늘로 솟구쳐 구름과 해를 찌를 기세요, 아래로는 소와 말을 뒤덮을 기세다. 톱을 잡아 잘라내고 도끼를 휘둘러 찍어내면, 너 같은 물건은 하루아침에 만 개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또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특이한 재질의 목재나 상서로운 빛깔과 찬란한 광채가 나는 무늬목도 바람에 휩쓸리고 폭우에 넘어져서 꺾어지면 썩은 흙이 되나니, 그런 나무도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다. 그런데 너만은 요행히도 사람 손에 걸렸고, 더군다나 요행히 마루 위에 올라와 머리를 떠받치는 물건으로 쓰였으니 너의 영광은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때 욕을 보았다고 해서 너는 어째 그리 투정을 부리느냐? 관부(灌夫)¹도 형틀에 묶였고, 강후(絳侯)²는 문서 뒷장에다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을 물었으며, 이광(李廣)³은 술에 취한 하급관리에게 모욕을 당했다. 화복(禍福)과 영욕(榮辱)이 번갈아 드나드는 것은 군자조차도 모면하기 어렵다. 네가 화를 내는데 어찌 너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느냐?”

    1) 관부는 한(漢)의 인물로 오초(吳楚)의 반란 때 용맹을 떨쳤다.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의협심을 발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거실에서 모욕을 당한 일이 있다. 형틀에 묶이는 모욕을 당한 사람은 관부가 아니라 위기후(魏其侯)이다.
    2) 강후는 한(漢)나라 개국공신 주발(周勃)이다. 여씨(呂氏)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문제 때 역적으로 조사를 받으며 옥리에게 뇌물을 주어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옥리가 문서의 뒷장에 방법을 써주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3) 이광은 한무제 때의 명장이다. 그 역시 술에 취한 하급관리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다. 이상 세 경우는 모두 사마천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나오는 내용으로 뛰어난 인물도 곤경에 처한 때가 있음을 말한다.

    말을 마치고 잠을 자다가 불현듯 자신의 허물이 떠올랐다.

    “내가 베개를 꾸짖은 것이 옳기는 옳다. 그러나 내 나이 서른에 아직도 포의(布衣) 신세니, 남들이 나를 천하게 여기고 짓밟는 것이 마땅하다. 옛사람의 글을 읽은 것이 적지 않고, 천하의 이치를 탐색한 것이 얕지 않으며, 화복(禍福)과 영욕(榮辱)의 사연을 잘 설명하여 갖추지 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며 남들이 던지는 귀에 거슬리는 한 마디 말을 들으면 금세 발끈하여 마음에 화가 나고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바뀌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듯이 제 자신을 다그치는 일에는 너무도 관대하면서 남을 책망할 때는 너무 가혹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선비가 돼 가지고 선비로서 할 만한 직책을 얻지 못했지만, 나무는 베개가 되어 베개로서의 용도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내가 거슬리는 말을 듣고 속이 뒤집히는 것은 참으로 망령된 짓이지만, 베개가 천대를 받고서 노기를 띠는 것은 아무리 봐도 패악한 짓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베개를 들어 사람처럼 세워놓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무가 아니고 황금이나 주옥으로서 유리와 마노의 재질을 갖고 화려한 자수로 갑을 하고 비취새의 깃털로 꾸민다고 치더라도, 머리를 고이고 누워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편안한 잠을 자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다. 가져다 쓰는 데에는 귀하고 천한 차이가 없지마는 예우할 때에는 후하고 박한 차별이 있었다. 베개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 이광덕(李匡德), 〈사침(謝枕)〉, 《관양집(冠陽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09집 《관양집(冠陽集)》 19권 잡저(雜著)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광덕(李匡德, 1690~1748)이 30세에 쓴 글이다. 이광덕은 영조시대의 사대부로 전라감사와 대사헌, 대제학을 지낸 분이다. 이진망(李眞望)의 아들로 당대의 소론명문가 출신이다. 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벼슬하기 이전 젊은 때에 쓴 글이다. 자신이 베는 목침과 대화를 나눈 사연을 썼으므로 우언(寓言)이다.

    날마다 접하는 일용품인 베개를 매개로 하여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못 되는 문제와 그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한 글이다. 30년 세월 동안 갖은 노력으로 공부도 했고, 남 못지않은 능력도 갖추어 이제는 세상에서 내게 어울리는 위치를 차지할 만도 하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그런 자부심을 갖지 못하란 법이 없다. 그러나 그런 자리가 오기는커녕 귀에 거슬리는 말만 들으니 “발끈하여 마음에 화가 나고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세상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 이광덕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 그도 밤마다 자신의 쇳덩어리 같은 두개골과 커다란 이마를 받치는 베개에게는 폭군처럼 군다. 자리를 주지도 않고 거슬리는 말을 한다고 세상에 화를 내는 자신과 같은 성품을 가졌다면 베개는 화를 낼 이유가 충분히 있다. 베개의 입장이라면 내게 화를 낼 법도 하다. 그로서는 사과하지 않을 수 없다. 베개의 눈으로 자신을 보니,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제는 결국 세상에서 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우울하고 답답한 심경의 자신을 위안하는 내용이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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