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서 삽사리 꼬리 기쁨이 마중나왔다 안에서 내 마음이 마중나왔다
철모를 벗고 총을 내려 놓았다 탄띠를 풀었다
황소가죽 워커를 벗고 왼발부터 양말을 벗었다 맨발 둘이 새싹인 듯 불쌍하게시리 나와 있다
아내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울음이 이루어졌다
―고은(1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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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시(2012.5.30)이다. 장석남시인의 평이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인가? 역사인가? 르포르타주인가? 저 행간은 한껏 젖어버린, 들추기 무서운 이야기가 가득한 빈집이다. 제 집에 맘 놓고 들어설 수 없는 사내, 기웃거렸으리. 그때 기르던 삽사리의 마중에 비로소 마음 내려놓는 집, 그 순간의 환한 자유! 잠시 명령에서 벗어나, 소가죽 워커(걷어차고 걷어차였으리!)에서 벗어나 맨발이 된 이 사나이. 맨발이 되어서야 비로소 둘이 되는, 둘이란 게 불쌍하리만큼 반가운 빈집. 혼자서 온 식구가 된 집. 잠깐 사이 거짓처럼 비어버린 집.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아내의 사진에서는 왜 울음이 솟는가.
울음을 이루는 집이니 그 처마마저 흐느꼈으리. 참으로 긴 시다.
맨발 둘이 새싹인 듯 불쌍하게 나와 있고, 울음이 이루어진 아내의 사진...?...사망?...*-* | |
고은 [高銀]한국 시인 | 브리태니커
본명은 은태(銀泰), 법명은 일초(一超). 여러 재야단체와 집회에 참가하면서 주로 사회비판의식이 담긴 시를 썼다.
아버지 근식(根植)과 어머니 최점례(崔點禮)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43년 미룡국민학교에 들어가 조기졸업하고 1946년 군산중학교에 수석 입학해 미술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6·25전쟁 때 3개월 동안 강제동원되어 비행장 복구작업을 한 뒤 자주 정신착란을 일으켜 가출했다. 1·4후퇴 때 선유도로 피난했다가 군산으로 돌아와 군산북중학교 교사 등을 지냈다. 그뒤 방황을 거듭하다가 1952년 불가(佛家)에 들어가 탁발하는 등 많은 기행(奇行)을 남겼는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여러 곳에서 나올 지경이었다. 1962년 환속해 폭음과 방랑을 계속하다가 제주도에서 도서관을 설치하고 고등공민학교를 여는 등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서울 선학원(禪學院)·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주지대리 등을 지냈다. 1969년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잠시 근무한 것이 유일한 직장 경험이다. 1974년부터 민족민주운동에 앞장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운동단체에 참여했다. 1977년 조태일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민주청년협의회 고문,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79년 6월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했다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0·26사태를 감옥에서 맞이했다. 1979년말 석방되었으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대구교도소에서 복역중 귀 수술을 받았다. 1982년 건강이 악화되어 8·15 특사로 풀려난 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 의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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