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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우연히 읊다―윤선도(尹善道·1587~1671)/오우가와 유적지

 

우연히 읊다

누군들 처음부터 선골(仙骨)이었나

나도 본래 번화한 삶 좋아했었지
몸이 병들자 마음 따라 고요해지고
길이 막히자 세상 절로 멀어지더군
구름과 산은 나를 끌어 부축해주고
호수랑 바다는 갈수록 어루만지네
선계(仙界)로 가는 열쇠를 부러워 말자
봉래산은 어김없이 갈 테니까

―윤선도(尹善道·1587~1671)

偶吟(우음)

誰曾有仙骨(수증유선골)
吾亦愛紛華(오역애분화)
身病心仍靜(신병심잉정)
途窮世自遐(도궁세자하)
雲山相誘掖(운산상유액)
湖海與漸摩(호해여점마)
鐵鎖何須羨(철쇄하수선)
蓬萊路不差(봉래노불차)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시조(2012.6.23) 이다. 안대회 교수의 평이다.

 

시조시인으로 이름난 고산(孤山) 윤선도가 59세 때인 1645년에 지었다. 정계에서 물러나 전라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외지고 아름다운 골짜기에 머물며 그는 ‘산중신곡(山中新曲)’을 지어 산수(山水)에 묻힌 행복을 노래하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산수를 그냥 좋아해서일까? 이 시에서는 세상에 부대끼며 사느라 몸도 병들고 벼슬길도 막힌 막다른 상황을 피해서 온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곳의 자연은 병든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마지못해 들어왔어도 몸과 마음이 웬만큼 치유되었고 스스로도 선골(仙骨)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윤선도처럼 고백할 노년의 인생이 지금도 적지 않을 것이다.


**  윤선도, 돼지띠...천수(天壽)인 돼지띠...그 옛날 평균 수명 40세(?)즈음일 때 84세 까지 살았으므로 성공(?)한 인생 아닐까 싶다...^-^

서인 송시열과 정쟁, 1차 예송논쟁 후 오랜 유배생활하여 '오우가' '어부사시사'  남김...유배지 문학(?)의 3인으로써 송강 정철, 다산 정약용에 비견된다...^-^

 

** 雲山相誘掖(운산상유액)
        湖海與漸摩(호해여점마)

구름과 산이 나를 부축해주고, 호수와 바다가 나를 달래주네...이 구절이 제일 마음에 든다...^-^

 

 

윤선도

 
생몰: 1587년 ~ 1671년 (향년 84세) | 돼지띠

161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경상도 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현종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1]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숙종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2]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고, 오우가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고산윤선도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고산의 불후의 명작을 다 열거 하지 않아도 단지 "오우가" 한편 만으로도 고산의 위대함을 말하고 남는 다 ! 할 것 입니다.

또한 주옥 같은 어부사시사 <춘하추동>40수를 보면서 경탄의 심사를 밝혀둡니다.

오우가는 해남군 현산면 구실리 금쇄동에서 지으셨습니다.

오우가는 고산 윤선도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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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나의 벗이 몇인가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동산에 달이 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水)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서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좋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빨리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다가 누르는가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 뿐인가 하노라

(松)

더우면 꽃 피우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 서리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 그로하여 아노라

(竹)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곱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 - 녹우당 탐방을 마치고 ~~~

이동하려는 순간 ! 노송사이로 석양의 녹우당 낙조가 ...한폭의 그림처럼 연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