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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바람벌―이호우(1912~1970)/무당거미외 4장

 

바람벌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 보자고 아아 살아 보자고.

욕(辱)이 조상(祖上)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를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江山)이 눈물겹다.

벗아 너 마자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旗幅)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祖國)의 밝음을 기약함에 아니던가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福)되기도 했어라.

 

―이호우(1912~1970)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시조(2012.6.26)이다. 정수자 시조시인의 평이다.

 

푸른 산하(山河)에 붉은빛이 문득문득 비치는 때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뼈아픈 기억 때문일까, 우리 강산은 왠지 피가 더 스민 것만 같다. 물론 지금도 자신들의 땅을 피로 물들이는 파괴와 살육의 역사는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증오가 판치는 세상은 모두가 외롭다. 사람도 자연도 파멸의 연쇄 고리다. 시인의 개탄은 그래서 새삼 우뚝하다. 사랑의 회복만이 서로 사는 길임을, 어금니 꽉 물고 다시 외친다. 우리 모두 '꽃같이 살아 보자고 아아 살아 보자고!'

 

이호우 [李鎬雨]

1912. 3. 1 경북 청도~ 1970. 1. 6.

시조시인.

 

한때 시조시인들의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평론을 발표해 한국시조시단에 경종을 울렸다. 호는 이호우(爾豪愚). 누이동생이 시조시인 영도(永道)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명학당을 거쳐 밀양보통학교를 마쳤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신경쇠약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929년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에다 위장병까지 겹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8·15해방 후에는 잠시 대구일보사를 경영했으며,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1946년 〈죽순〉 동인으로 참여했고, 1968년 〈영남문학회〉를 조직했다. 1940년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시조 〈달밤〉이 〈문장〉에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발표한 〈개화〉·〈휴화산〉·〈바위〉 등은 감상적 서정세계를 넘어서 객관적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노래하고 영탄하던 종래의 시조와는 달리 평범한 제재를 평이하게 노래했으며 후기에는 인간의 욕정을 승화시켜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조를 썼다. 작품집으로 1955년에 펴낸 〈이호우시조집〉 외에 누이동생 영도와 함께 1968년에 펴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가 있다.


 

 무당거미

 

무당벌레를 잡아먹고 있는 무당거미(?)

 

호랑거미

 

먹이를 거미줄로 휘감아 먹고있는 긴 호랑거미

 

긴호랑거미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