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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8월1일수요일 복음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2012년 8월 1일 수요일[(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오랫동안 법학을 공부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 성인은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을 바르게 하도록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의 근처에 있는 고티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그는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말씀의 초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겪는 고통을 하느님께 하소연한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함께 있어 주실 것이며, 그를 시련에서 건져 내 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이나 좋은 진주와 같다. 하늘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이다(복음).

 

제1독서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습니까?”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5,10.16-21
복음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44-46

 

 

오늘의 묵상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는 보물을 사려고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았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 보물이 더 귀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물을 얻으려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보물은 세상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보물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 자신에게 이롭던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필리 3,7 참조).
우리 인생도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재주나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생각하는 더 좋은 것이나 귀한 것이 각기 다릅니다. 사람이 누리는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라지는 것이 많습니다. 반면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찰나적 기쁨을 누리려고 하다가 영원한 기쁨을 놓치고 맙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보물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비롯되는 기쁨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누리려면 그에 상당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는 기쁨을 얻는 데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분당 요한성당 벽화

 

 


 

2012-07-31 오후 4:14:38 조회수 65 추천수 0


8월1(화) 음6/14

聖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님..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8.1)
성인명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Alphonsus Mary de Liguori)
축일 8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설립자, 주교,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696-1787년
같은이름 알폰소, 알폰수스, 알퐁수스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Alfonsus Maria de Liguori)



성 알폰수스 마리아 데 리구오리(Alfonsus Maria de Liguori, 또는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1696년 9월 27일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근교 마리아넬라(Marianella)에서
주세페(Giuseppe de Liguori)와 안나 카발리에리(Anna Cavalieri) 사이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나폴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아버지 주세페는 나폴리 공국의 해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트로야(Troja)의 카발리에리 주교의 동생으로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던 성 알폰수스는 불과 16세 나이로 나폴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변호사로 일하면서 결코 패소하지 않는 변호사로 널리 알려졌다.
1723년 토스카나(Toscana) 대공과 어떤 공작 사이에 큰 돈일 걸린 소송이 벌어졌는데,
이 소송에 참여했던 성 알폰수스는
어떤 중요한 문서를 잘못 해석하고 서명한 사실로 패소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변호사로서의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기도하던 중
1723년 8월 28일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찾아갔다가 신비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성 알폰수스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1726년 1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2년 정도 나폴리 근방을 돌며 선교사로 봉직하였고,
1729년에는 나폴리의 중국 신학원에서 활동했다.
1730년 친구인 토마스 팔코이아(Thomas Falcoia)가 스칼라(Scala) 지방에 있는
카스텔라마레 교구의 주교가 되자, 성 알폰수스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스칼라에서 수녀들의 피정을 지도할 때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를 만났고,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그녀의 환시를 확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팔코이아 주교가 로마(Roma)에서 경험한 환시와 일치하였다.
그래서 1731년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환시에서 받은 규칙을 따라
여자 구속주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스칼라로 이주하여 팔코이아 주교, 파가노 신부와 다른
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남자 구속주회(Redemptoris)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공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님의 말씀 전파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였다.
본부는 스칼라 수녀회의 숙박소를 이용하였으며
명예원장으로 팔코이아 주교를 모셨다.

그런데 초창기에 중대한 알력이 일어나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떠나가서
포치아에 따로 수도원을 설립하고,
또 1733년에는 쿠르시오(Curtius)라는 수도자 한 명만 남고
모든 회원들이 다른 회를 설립하여 떠났다.
하지만 성 알폰수스는 흔들리지 않고 회를 지키면서 다른 회원들을 맞아
1734년에 빌라 데글리 스키아비에서 두 번째 창립을 맞이하였다.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수도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구속주회는 1749년 2월 25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열린 총회에서 수도회 종신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 여자 구속주회도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왕권주의를 내세워 수도회들을 적대시하던
왕과 타누치(Tanucci) 후작 때문에 나폴리 왕국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1752년 왕은
교황령과 시칠리아(Sicilia)만을 사목 활동 영역으로 한정한다는 조건으로
인가를 해주었다.
이 기간 동안 성 알폰수스는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설교 사도직을 열렬히 수행하였으며 저술 활동에도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
1762년 6월 20일 산타 아가타 데이 고티(Santa Agata dei Goti)라는
나폴리의 한 작은 교구장 주교로 알폰수스를 임명하였다.
그는 이 교구를 돌보는 13년 동안
성직자, 수도원 그리고 전 교구의 혁신을 계획하였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열정적 활동으로 중병을 얻었고,
또 죽을 때까지 괴롭혀온 류머티즘으로 마비될 때도 많았기 때문에
1776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의 허락을 받고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주교직을 사임한 후에도 그는 구속주회의 정립과 운영을 위해 주력하였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의 당국자들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예수회가 박해를 받은 이후 구속주회도 위험에 처하자,
성 알폰수스는 중개자를 내세워 당국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왕이 승인한 규칙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수도회를 인가한 교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므로 늘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교회와 나폴리 왕국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교황령 외의 지역에 있던 공동체들이
성 알폰수스의 관할권을 벗어나게 됨으로써 회는 두 계열로 분열되었다.

성 알폰수스는 둘로 분열된 수도회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1787년 8월 1일 살레르노(Salerno)에서 선종하였다.
구속주회는 성 알폰수스가 선종한 직후 다시 하나로 재건되어 발전하였다.
성 알폰수스는 윤리, 신학, 수학에 관한 놀라운 저서들을 남겼다.
특히 그의 윤리신학은 얀세니즘(Jansenism)과 반성직주의를 극복하면서
올바른 윤리관을 정립한 저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신심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책은 “마리아의 영광”이다.
그는 1816년 9월 15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71년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 후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50년 4월 2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고해사제들과 윤리 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함



남,녀 수도회를 창설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던
사제 성 알퐁소 님이시여

현세의 수도자들을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해와같이 찬란하고---사랑의 씨튼 수녀회


피데스(8.1) / 스페스(8.1) / 카리타스(8.1)
성인명 피데스(Fides) / 스페스(Spes) / 카리타스(Charity)
축일 8월 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2세기
같은이름


성녀 소피아(Sophia), 스페스(Spes), 피데스(Fides), 카리타스(Caritas)


하느님의 지혜인 피데스, 스페스(Spes)
그리고 카리타스(Caritas) 공경을 설명하는 동방의 한 은유에 따르면,
이들은 로마(Roma)의 과부인 성녀 소피아(Sophia, 9월 30일)
세 딸의 실제 이름이라고 한다.





이 딸들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하였다는 것이다(로마의 순교록).
순교 당시 피데스(신덕)는 12세로서 매를 심히 맞았으나 큰 상처를 입지 않자,
끓는 물을 부었고 그래도 별 효과가 없자 참수하였다.
그리고 스페스(망덕)는 10세였고, 카리타스(애덕)는 9세였는데,
용광로에 집어넣어도 죽지를 않아서 목을 베었다.
또 그들의 어머니 성녀 소피아(지혜)는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다가
3일 후에 운명하였다.

...........3 자매를 함께 기념함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함

 


성녀 소피아의 세 분 따님

성녀 스페스...<신덕> 님

성녀 피데스...<망덕> 님

성녀 카리타스...<애덕> 님

 

박해의 시대에 장렬히 순교하신 성녀 자매님들시여

성혈 제단에 뿌린 님들의 거룩한 희생의 은혜로

천상 낙원 영원의 기도 가운데 저희를 기억해 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