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수많은 왕들의 죽음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광해군 일가의 죽음일 것이다.
인조의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부인 유씨, 폐세자 이지와 세자빈 박씨등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됐는데, 광해군 내외는 강화부의 동문에, 폐세자 내외는 서문 쪽에 각각 분리시켰다.
이들이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 폐세자 이지의 땅굴 탈출사건이 벌어지니, 그 장면은 영화 '쇼생크 탈출'을 연상케 하는 대탈주극이었다.
인조 1년(1623) 5월 22일로 날아가니 폐세자 이지가 위리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서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나가다 나졸에게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폐세자가 처음 위리안치되었을 때 폐빈과 같이 죽기로 약속하고 15일이 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폐빈과 함께 목을 맨 것을 역졸이 바로 풀어 주어 구한 적도 있습니다.
전번에 서울에서 가위와 인두가 보내져 왔는데 이것으로 굴을 뚫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땅을 파서 빈(부인)이 자루에 흙을 담아 방 안에 두었는데, 시작한 지 26일 만에야 굴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폐세자는 유배가옥을 탈출, 나루터 쪽으로 나가다 체포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남편이 체포된 사흘 후 폐빈이 목을 매어 죽었고, 폐세자는 한 달 후 자결을 강요당했으니, 그의 최후를 목격하기 위해 인조 1년(1623) 6월 25일로 날아가 보았다.
- 폐인 이지에게 죽음을 내렸다. 이지는 몸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 관과 신발을 갖추었다.
이어 칼을 찾아 손톱과 발톱을 깎으려 했는데, 의금부 도사가 허락지 않으니 '죽은 뒤에 깎아 주면 좋겠다.' 했다.
자리를 펴고 촛불을 밝히고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했으며, 그의 부모(광해)가 있는 곳을 물어 서쪽을 향해 네 번 절했다.
그 후 방으로 들어가 가느다란 띠로 목을 맸으나 띠가 끊어지자, 다시 질긴 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광해군은 졸지에 아들 내외를 잃고 그 이듬해 부인 유씨도 홧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살다가 인조 19년(1641) 7얼 1일 제주에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그를 왕으로서의 예우를 갖춰 장사지내자는 편과, 연산군의 에에 따라 장사지내야 한다는 편으로 갈려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실록은 그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광해군이 이달 1일 제주에서 위리안치된 가운데 죽었다. 부음을 듣고 임금이 사흘 동안 조회를 쉬었다.
이때 이시방이 제주목사로 있었는데 즉시 열쇠를 부수고 들어가 염빈했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르다고 했으나 식자는 옳게 여겼다.
이현영(예조판서) : 광해가 번번이 인심을 잃어 천명이 전하에게 돌아왔는데, 전하께서 광해를 독실히 염려하셨으니 은혜와 예의가 모두 갖추어진 것입니다.
왕위를 내놓은 지 거의 20년에 천수를 마쳤으니 전하의 성덕은 옛날에 비추어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의리상 종사를 중히 여기고 신민들의 요청에 쫓긴 나머지 폐출시키는 거사가 있긴 했으나 상례에 있어서는 다른 종실과 비교하여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합니다.
임금께서 한 번쯤 내정에서 거림하시고 백관도 각 아문에서 변복하고 모여 곡하는 정도로 한다면 정리나 예의에 있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신경진(좌의정) : 일단 굉해가 천명을 스스로 배반하여 신민들에게 버림받은 처지라고 한다면 옷과 관을 구비해 주는 것만으로도 골육에 대한 임금의 은혜를 다했다고 말하기에 족합니다.
강석기(우의정) : 전하께서 골육의 정리로 대내에서 한 번쯤 거동하시는 것이 도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백관들까지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경솔한 의논이라고 봅니다. 연산의 사례에 이미 전례가 있으니 참작하여 거행토록 하소서
(인조 19년 7월 10일). 그리하여 광해군은 연산군의 전례에 따라 왕자의 죽음에 해당하는 장례를 지냄으로써 파란만장한 생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광해군은 강화 교동에서 제주로 유배지를 옮길 때 한 편의 시를 지어 남겼으니, 실록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이 시를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은 비감한 기분이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어쨌거나 광해군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보내는 동안 정묘호란, 병자호란
의 끔찍한 일들은 겪지 않아도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니었을까.
지금 SBS에서 '왕의 여자'가 방송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폭군이 아니라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폐세자 이지의 땅굴 탈출사건이 벌어지니, 그 장면은 영화 '쇼생크 탈출'을 연상케 하는 대탈주극이었다.
전번에 서울에서 가위와 인두가 보내져 왔는데 이것으로 굴을 뚫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땅을 파서 빈(부인)이 자루에 흙을 담아 방 안에 두었는데, 시작한 지 26일 만에야 굴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폐세자는 유배가옥을 탈출, 나루터 쪽으로 나가다 체포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남편이 체포된 사흘 후 폐빈이 목을 매어 죽었고, 폐세자는 한 달 후 자결을 강요당했으니,,,,
이지는 가느다란 띠로 목을 맸으나 띠가 끊어지자, 다시 질긴 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광해군은 졸지에 아들 내외를 잃고 그 이듬해 부인 유씨도 홧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살다가 인조 19년(1641) 7얼 1일 제주에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2012년 10월13일 오후 2시...수산나 -
탱자나무 꽃 1...'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로 울타리로 만든 집에 갇힌 것을 말함...^-^
탱자나무 꽃 2
탱자나무 5월의 열매
탱자나무 10월의 열매...'탱자'
탱자나무 줄기의 가시...'위리안치'하는 유배감옥은 탱자나무로 집을 에워싼다고 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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