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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조선/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보름치 일기 실종'은 허구/경희궁 숭정문 5장

 

['보름치 일기 실종'은 허구, '병사 9000명 전사'는 사실]

조선일보 문화 전병근 기자 입력 : 2012.10.03 03:04

[역사학자 2인에게 물었다, 영화 속 광해와 실제 광해 차이는]
한명기 교수의 견해 - '조세 개혁' 대동법 물꼬 트고
강대국 명과 후금 사이에서 편중되지 않고 '중립 외교' 주도
오항녕 교수의 견해 - 궁궐 건축 집착으로 재정 파탄
'중립 외교'는 결과론적 이야기, 日식민사학서 광해 재평가 시작

한명기 교수(사진 왼쪽), 오항녕 교수.
'실제 그는 어떤 왕이었을까' '광해군일기 15일분이 없다는 건 사실일까'….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팩션(faction)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관객 500만을 넘기면서 당대 역사에 대한 일반의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1575~1641)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제주도 유배 중에 숨진 비극의 주인공. 역사학자 두 명에게 '영화 속 광해와 역사 속 광해군'의 쟁점에 대해 각각 다른 주장을 들어봤다. 한명기(50) 명지대 교수는 광해군을 "대동법이라는 세제 혁신의 물꼬를 트고 사대에서 벗어난 실리 외교를 시도한 군주"였다고 평가한 반면, 오항녕(51)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재정 파탄과 군정(軍政)을 방치한 판단력 흐린 왕"이라고 비판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한 교수는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10) 등을,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오 교수는 '조선의 힘'(2010)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2012) 등을 썼다.

실제 광해군은?

한명기="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났기 때문에 인조 이후의 실록에 입각한 평가는 한계가 있다. 굉장히 소심하고 예민하면서도 때로는 앞뒤 안 재는 과단성도 있었다. 영화 속 실제 광해군이 신하들 반대에 신경질적으로 대한다거나 감정 표현이 적나라한 것 등은 기록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후궁의 자식으로 나서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 지명됐다가 선조가 급서하자 16년 만에 왕이 됐다. 나름대로 준비된 왕이었다. 하지만 술사(術士)들에 꾀어 거대 궁궐을 짓는 공사에 집착하다가 민심 이반에 직면했다."

오항녕="광해군일기를 인조반정 이후 승자들의 기록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광해군일기의 기록 95% 이상은 인조반정 이후가 아니라 광해군 때 남긴 기록이다. 명(明)에 대한 지원을 '사대(事大)'라고 비판하고, 당시 후금(後金)과의 사이에서 중립을 취했어야 한다는 입장은 결과론적 이야기다. 만일 광해군 대에 궁궐 공사 안 하고 민생과 군비에 힘썼다면, 그래도 조선이 후금에 그렇게 쉽게 당했을까? 광해군을 처음으로 높게 평가한 것은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기치이다. 새로 일어선 힘센 나라에 붙어야 산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우리가 순종하는 식민지 백성이 될 테니까. 무엇보다. 영화의 대전제인 '15일치 광해군일기 실종'은 완전한 허구다."

대동법과 광해군

오항녕="대동법은 공물인 특산물을 토지세로 바꾸는 것이라 땅이 많은 사람은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불명확해진 경지(耕地) 상황을 조사하고, 공물을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영화에서 산골에 사는 사월이네 집에 바다에서 나는 전복을 내라고 배정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단, 특산물이 생산되지 않아 사거나 남에게 비용을 주고 부탁하여 내는 방납(防納)이 있었는데, 그 고통이 컸다. 특히 광해군 주변의 왕실과 핵심 북인(北人) 세력이 방납의 주체였기 때문에 대동법 시행이 어려웠다."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가 500만 관객을 넘어서며 대동법 실시, 명의 요청에 의한 파병 등 영화 속 역사적 사실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되고 있다. /CJ E&M 제공

한명기="당시 대동법은 혁신적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먼저 실시해 전국 확대까지 100년 가까이 걸렸다. 광해군은 필요성에 동의는 했지만 신하와 연결된 상인·자산가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확대하는 데 용단을 내리지는 않았다. 광해군의 전체적인 톤은 소극적이었지만 실시에 물꼬를 튼 것은 치적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

명·청 사이 중립 외교

한명기="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직접 전쟁을 겪었고 명 장수들과도 접촉이 많았다. 고려 시대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에도 식견이 높았다. 당시 신하 중에는 명을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명과 만주 사이에서 시간을 벌면서 상황을 넘기려 했던 것이 광해군의 입장이었다. 광해군은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 편들기의 위험성을 잘 안 것이다. 광해군의 외교를 문제 삼아 인조반정이 이뤄졌지만, 병자호란 때 인조는 삼전도에서 '오랑캐 추장'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오항녕="광해군 10년, 명의 요청으로 파병을 할 때, 훈련도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병사를 보냈다. 그래서 1만3000명(영화에서는 2만 명) 중 9000명이 전사했다. 나머지는 후금 농장에 노예로 투입됐다. 이게 '중립 외교' '실리 외교'의 실상이었다. 그 시점에 광해군이 걱정한 것은 궁궐이 언제 완공되느냐였다. 광해군 11년 명 황제가 후금에 패한 뒤 조선의 전사자와 부상자 가족에게 전해라고 은 1만 냥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마저 궁내(宮內)로 들어갔다."

영화 '광해'를 보니

오항녕="궁궐의 전문직인 나인들을 희화하고, 왕이 직접 읽지 않았던 교지(敎旨)를 읽는 대목 등 고증이 잘못된 부분이 많아 조선 시대에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보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다."

한명기="대동법 실시나 명나라 원군 파병 등을 둘러싼 논란을 토대로 왕의 애민적 측면을 가짜 광해로 보여준 짜임새 있는 영화다."

팩션 사극의 장단점

오항녕="백성을 위하는 임금이 제일이라는 영화 '광해'의 메시지에는 공감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 같은 역사학자들이 먼저 더 탄탄한 연구를 내놓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역사'를 다루려면 최소한의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관점이나 해석의 경우는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겠지만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명기="팩션 사극이 팩트를 큰 줄기로 품되 흥미를 위해 디테일에서 상상을 더하는 것은 영화의 성공을 위해 용인될 수 있다고 본다. 국사를 배운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내용을 담는다면 관객이 관심 있게 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작년에 인기를 끈 '최종병기 활'의 경우 포로들이 탈출하는 것은 병자호란 중에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다만 너무 팩트의 기본 줄기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이나 방향을 잡으려는 것은 피했으면 한다."

 

 

보고있나팩션(faction)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관객 500만을 넘기면서 당대 역사에 대한 일반의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실제 그는 어떤 왕이었을까' '광해군일기 15일분이 없다는 건 사실일까'….

 

한명기(50) 명지대 교수는 광해군을 "대동법이라는 세제 혁신의 물꼬를 트고 사대에서 벗어난 실리 외교를 시도한 군주"였다고 평가한 반면, 오항녕(51)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재정 파탄과 군정(軍政)을 방치한 판단력 흐린 왕"이라고 비판했다.

 

 

한명기="굉장히 소심하고 예민하면서도 때로는 앞뒤 안 재는 과단성도 있었다. 영화 속 실제 광해군이 신하들 반대에 신경질적으로 대한다거나 감정 표현이 적나라한 것 등은 기록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 지명됐다가 선조가 급서하자 16년 만에 왕이 됐다. 나름대로 준비된 왕이었다. 하지만 술사(術士)들에 꾀어 거대 궁궐을 짓는 공사에 집착하다가 민심 이반에 직면했다."

 

="당시 대동법은 혁신적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먼저 실시해 전국 확대까지 100년 가까이 걸렸다. 실시에 물꼬를 튼 것은 치적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

 

오항녕="광해군일기의 기록 95% 이상은 인조반정 이후가 아니라 광해군 때 남긴 기록이다.  광해군 대에 궁궐 공사 안 하고 민생과 군비에 힘썼다면, 그래도 조선이 후금에 그렇게 쉽게 당했을까? 광해군을 처음으로 높게 평가한 것은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기치이다. 새로 일어선 힘센 나라에 붙어야 산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영화의 대전제인 '15일치 광해군일기 실종'은 완전한 허구다."

 

="광해군 10년, 명의 요청으로 파병을 할 때, 훈련도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병사를 보냈다. 그래서 1만3000명(영화에서는 2만 명) 중 9000명이 전사했다. 나머지는 후금 농장에 노예로 투입됐다. 이게 '중립 외교' '실리 외교'의 실상이었다. 그 시점에 광해군이 걱정한 것은 궁궐이 언제 완공되느냐였다. 광해군 11년 명 황제가 후금에 패한 뒤 조선의 전사자와 부상자 가족에게 전해라고 은 1만 냥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마저 궁내(宮內)로 들어갔다."

 

="궁궐의 전문직인 나인들을 희화하고, 왕이 직접 읽지 않았던 교지(敎旨)를 읽는 대목 등 고증이 잘못된 부분이 많아 조선 시대에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보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다."

 

- 2012년 10월13일 토요일 오후 4시30분...수산나 -

 

서울 역사박물관 경희궁 금천교

홍예교로 2개의 아치로 구성...난간의 돌짐승이나 홍예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나쁜 기운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인 역활을 한다....^-^ 

 

서울 역사박물관 경희궁과 금천교 안내문

경희궁은 1617년(광해9)에 창건하여 1620년(광해12) 완공...3년만에 완공 했네요...ㅎㅎ...^-^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다...또한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궐' 이라고도 하였다...^-^   

 

경희궁 숭정문 1

경희궁에는 숙종, 영조 임금이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경희궁에 대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경희궁 숭정문 2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광해군이 빼앗아...지금의 '경희궁'을 지었다고 합니다...ㅠㅠ...^-^

그러고 보니 정말 왕기가 서려 보입니다...ㅋㅋ...^-^

 

경희궁 숭정문 3

뒤에 '숭정전' 이 보입니다...장희빈의 부군 '숙종' 과 사도세자의 아버지이며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ㅎㅎ...^-^ 

 

 

광해는 풍수로 망했다...광해는 점보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대신들이 좌도(잡술)를 삼가라고 간언할 정도였다...특히 관상감 소속의 술사 정사륜에게 의지하여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점을 치고 나서 실행에 옮겼다. 광해는 인왕산 아래 세 개의 궁궐을 짓는 대역사를 일으켰다. 기존의 경복궁과 창덕궁 터가 불길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정원군(인조의 아버지) 집터인데,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빼앗은 것이다(지금의 경희궁). 세 개의 궁궐이 조성된 것도 지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에 그 의견들을 모두 수용한 결과였다...ㅠㅠ...^-^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빼앗아...지금의 '경희궁'을 지었다고 하니 왕이란 무소불위 권위를 휘두른 존재이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