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광해군을 美化해선 안 되는 이유
조선일보 사내칼럼 이한우 기획취재부장 입력 : 2012.09.28 22:36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부제를 단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이란 책이 나온 것이 2000년이다. 이 책의 골자는 간단히 말하면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알고 보면' 대륙의 명(明)·청(淸) 교체기 때 실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중립외교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더라면 정묘·병자 두 호란(胡亂)은 적어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이런 주장은 묘하게도 출간 당시 반미(反美)에 사로잡힌 한반도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는 미국과, 신흥강국 청나라는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과 암묵리에 연결됐다. 자연스럽게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기보다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균형 외교를 강조하던 노무현 정권의 외교정책을 버텨주는 하나의 역사학적 기반을 이루기도 했다.
최근 개봉된 영화 '광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해는 정말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꿈꿨던 임금으로 그려진다. 이렇게 되면 광해군은 어느새 백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과 10여 년 전까지 조선을 도와 망국의 위기를 막아주었던 명나라를 배신하면서까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줄타기 외교를 구현하려 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가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만고의 역적'이 되는 셈이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탁월하기까지 한 임금을 내쫓고 양대 호란을 자초한 일개 당파에 불과하니 말이다. 여기서 서인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냥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광해군과 서인의 권력투쟁에서 광해군이 패배한 것이다. 문제는 임금과 신하의 권력투쟁에서 사실상 전권을 쥐고 있던 임금이 패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3일 반정 당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당시 반정군은 1500명을 넘지 않았다. 그중에 정규군이라 부를 수 있는 규모는 장단부사 이서가 이끌고 온 병사 700여명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말 그대로 오합지졸 민간인들이었다.
게다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이런저런 역모의 소식이 광해군에게 전해졌으나 광해군은 두려워만 할 뿐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지금의 홍제동 인근에 모인 1500명 병사가 경복궁 근처 창의문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결국 창덕궁으로 300명의 선봉대가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은 허겁지겁 후원으로 도망친 후였다.
이것만으로도 광해군을 옹호한다는 것은 역사의 기본을 망각하는 행위다. 총포로 무장한 정규군 규모가 얼마인데 오합지졸 1500명에게 멀쩡한 정권을 내줄 수 있단 말인가? 연산군이야 스스로 임금이기를 포기했으니 그렇다 쳐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광해군이 어째서 권력을 이처럼 어이없게 넘겨준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충분한 학문적 해명 없이 탁월한 외교 운운하는 것은 임금이 어떤 자리인지를 잘 모르고서 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자기 정권도 못 지키는 임금이 나라는 어떻게 지킬 것이며 또 백성은 어떻게 편안케 할 수 있다는 말인지. 드라마상의 역사 왜곡이 이제는 스크린으로까지 번진 듯하여 흔쾌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새삼 연산군의 니힐리즘을 극적으로 그려낸 영화 '왕의 남자'가 얼마나 뛰어난 작품이었는지 경탄하게 된다.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광해군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반면교사' 국가지도자일 뿐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히트를 치니 광해군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언론에 쏟아져 나온다...명과 청에서 줄다리기 외교가 실리를 위한 탁월한 선택이라는 것... 백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꾀했던 진정한 왕이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태평로]필자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오합지졸 1500명 반정군에게 멀쩡한 정권을 내준 찌질한...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반면교사' 국가지도자일 뿐이라고 소개했다...ㅎㅎ...^-^
읽어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다...하여튼 역사는 재미있다...ㅎㅎ...^-^
- 2012년 10월13일 토요일 오후 3시20분...수산나 -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중전 의인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덕흥 부원군 김재남의 딸을 중전으로 맞았다. 이때 새 중전은 19세, 선조는 51세, 왕세자인 광해군은 중전보다 9살 많은 28세였다. 이 새 중전이 인목 왕후요 훗날 인목대비가 되는 비극적인 주인공이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그때부터 인목 대비의 비극적인 삶이 시작된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 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 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했다. 이와같은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했다. 도중에 이이반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했다. 이서는 장단에서, 이중로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반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했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다가 잡혀 서인(평민)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침, 정인홍, 이위경등 수십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 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 공신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후 남인 이원익이 영의정에 편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했다.
광해군은 15년 임금노릇하다가...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 갔네요...^-^
인목대비가 광해군에 의해 폐위되고 유폐된곳은 지금의 석어당 건물 입니다...^-^
인목대비가 유폐 된후로 서궁이라고 불렀습니다...^-^
덕수궁 석어당 1...인목대비가 광해군에 의해 폐위되고 유폐된곳은 지금의 석어당 건물 입니다...^-^
덕수궁 석어당 2... 인목대비가 유폐 된후로 서궁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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