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13일 토요일인 어제...광해군에 관한 칼럼 4개를 하루종일 블로그에 올렸다...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히트를 치니, 조선일보에 칼럼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ㅋㅋ...덕분에 역사공부를 하고...나름대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으니 영화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ㅎㅎ...^-^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영화 제작노트를 읽어보니 "15일치 광해군 일기가 없다" 는데 착안하여...그 15일간의 허구(픽션)가 가미된 팩션영화라고 소개가 되었다..임금이 무서워 한다는 승정원 일기가 빠질 수도 있네!!...하며 놀랐는데...이것에 관한 내용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ㅎㅎ...^-^
"15일치 광해군 일기가 없다는 것은 완전 허구다." 라고 제목이 붙어 나왔고...그 옆에 "9,000명 전사는 사실이다" 라고 나왔다...광해군 10년에 명나라에서 파병요청을 했는데, 훈련과 무기를 갖추지 않은 13,000명(영화에서는 20,000명) 군사를 보내, 이 중 9,000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후금농장에 노예로 끌려간 것이 광해군의 중립외교, 실리외교의 실체라고 하며 "9,000명 전사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그 뿐 아니라 후금에 패한 명나라가 부상자와 전사자의 위로금으로 은 1만냥을 보내왔는데...이 또한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궁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ㅠㅠ...^-^
실록에 나온 광해군에 관한 기록은 95% 광해군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승자(인조) 논리에 의해 폄하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기록에 의하면 광해군은 소심하고 예민하며 앞뒤 안 가리는 과단성도 있는데...신하들 반대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감정표현이 적나라한 군주로 기록되어...영화의 광해군 캐릭터와 일치한다고 썼다...ㅎㅎ...^-^
광해군의 실정은 풍수사상과 점술에 의지하여 점술사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을 처리하므로...실록에 "잡술"을 멀리하시라는 신하의 조언도 나왔다고 한다...경복궁과 창덕궁이 불길하고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지금의 경희궁을 새로 짓고...인왕산 밑에 세 개의 궁궐이 조성되는 역사를 벌인 것도 지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에 그 의견들을 모두 수용한 결과라고 한다...ㅠㅠ...그러니 나라 살림이 피폐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풍수에 빠져 곳간이 비어버린 꼴이다."...ㅠㅠ...^-^
다른 실정은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다..."잡채판서" 이충은 온실을 지어 새로나온 야채를 매일 임금에게 진상하므로 판서의 벼슬을 받고..."산삼각로" 한효순은 산삼을 바쳐 정승이 되었으며...국정을 농단한 간신 "이이첨"은 대필답안지로 아들을 과거시험의 장원으로 만들고...왕비의 오라비 "유희분"은 권세가 하늘을 찔러...과거시험에 부정(청탁)으로 일가 다섯이 동시에 급제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이에 시인 "권필"이 격분하여 "시"를 지었는데...광해군에게 끌려가 죽도록 맞고, 귀양가다가 장독이 솟구쳐 동대문 밖에서 급사하므로...훗날 인조반정의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ㅠㅠ...예나 지금이나 부정 부패는 망하는 길의 지름길이다...ㅎㅎ...^-^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한 광해군을 높이 평가한 최초의 학자는 일본의 역사학자 "이나바 이와기치"이다...그는 "힘센나라에 붙어야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일본의 식민사관 필요에 의하여 이런 주장을 내세웠다는 것이다...ㅠㅠ...^-^
무엇보다 광해군이 집안단속도 제대로 못한 어리석은 군주라는 것은 인조반정 당시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반정군은 1,500명이 넘지 않았는데...장단부사 "이서"가 이끌고 온 병사 700여명만 정규군이고, 나머지는 오합지졸 민간인이라고 한다...반정군은 홍제동 인근에 모여서, 창의문에 이를 때 까지 아무런 제재도 안 받았다...창덕궁으로 300명 선봉대가 들어갔는데...광해군은 허겁지겁 후원으로 도망쳐 피신했다고 한다...궁궐에 총포로 무장한 정규군이 과연 얼마인데, 오합지졸 1,500여명에게 정권을 내 준다는 말인가?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반면교사 지도자" 라고 썼다...ㅠㅠ...읽고보니 그도 그렇다...ㅎㅎ...^-^
광해군이 명과 청사이의 실리외교는 일본학자의 식민지관 논리에 의해 해석이 된 것이며...그는 집안단속도 제대로 못한 '반면교사'의 지도자...풍수사상과 점술에 의지하여 무리한 궁궐공사[경희궁, 경복궁, 창덕궁]를 강행하다가 나라의 살림을 피폐하게 만든 한마디로 찌질한 군주라는 결론을 얻었다...ㅎㅎ...^-^
하여튼 한 인간으로써 말도 많고...탈도 많고...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아간 임금이다...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가서...아들(세자)이 인두로 땅굴을 팠는데...며느리(세자빈)와 함께 26일이나 파서 탈출했는데...나루터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세자빈은 자살하고...자살하라는 명을 받은 아들(세자)은 목을 매 죽고...부인 유씨는 강화도에서 홧병으로 역시 죽었는데도...광해군은 꿋꿋이 살아남아 옮겨진 귀양지 제주도에서 67세까지 천수를 다하고 사망했다니 대단한 심성(?)의 소유자이고...폐위된 왕을 죽이지 않고 천수까지 누리게 한 왕 또한 대단(?)하여...어질 인(仁)이 들어간 "인조" 가 되었나 보다...^-^
솔직히 말하면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맏아들 소현세자에게 벼루(용연석)을 던져...죽게 만들은..."요녀석"의 기원을 만든 임금으로...며느리 강씨와 손자들 까지 죽게 만든 절대 인자(?)하지 않은 군주인데 말이다...ㅎㅎ...며느리는 인조독살 혐의를 받아 감옥에서 사약을 받아 죽고...손자 셋은 제주도로 귀양가서 첫째, 둘째가 죽고 막내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ㅎㅎ...^-^
- 2012년 10월14일 일요일 오후1시40분...수산나 -
경희궁 숭정전 정면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서 1618년(광해군10) 경에 건립되었다.
경희궁 숭정전 측면
숭정전은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하거나 궁중연회, 사신접대 등 국가적인 공식의례가 행해진 곳으로 경희궁의 으뜸가는 건물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이 즉위식을 거행한 유서 깊은 곳이다.
경희궁 숭정전과 동행각
그러나 일제가 숭정전 건물을 1926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다. 원래의 숭정전은 법당으로 개조되어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 숭정전과 서행각
이곳의 숭정전은 발굴과 문헌조사를 통하여 복원된 건물이다.
경희궁 숭정전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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