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형용사 정치'
'착한' 거부, '따뜻한' 예산… 본질 가리는 형용사 부쩍 늘어
허접스러운 글이라도 쓰다 보면 길어질 때가 있다. 지면은 제한돼 있기 때문에 그럴 때면 썼던 걸 다시 지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삭제' 키를 누르다 보면 늘 단골 영순위로 떠오르는 것들은 형용사와 부사다.
어느 작가는 "문장은 형용사로부터 부패한다"고 했다. 수식하는 말은 멋있어 보이고 사람을 솔깃하게 만든다. 그러나 곰곰이 뜯어보면 역시 본질과 상관없는 장식품인 경우가 많다. 때론 알맹이가 안고 있는 부실함이나 밝히고 싶지 않은 진실을 흐리기 위해 수식어가 동원되기도 한다.
지난 몇달 대선 정국을 달구었던 야권의 '아름다운 단일화' 논의는 결국 안철수씨의 일방적 중도 사퇴로 막을 내렸다. 안철수씨와 문재인씨가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감동을 주는 경선을 거쳐, 단일 후보 선출 후에도 서로 힘을 합해 대선 승리까지 함께 가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여전히 안씨의 중도 사퇴를 '아름다운 양보' '통 큰 결단' '신선한 충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대선 후보 등록 후 기자회견에서 안철수씨에 대해 '커다란 미안함'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야권 단일 후보로서의 '막중한 책임감'과 '무거운 소명의식'으로 대선에 임해 국민과 소통하는 '겸손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국어 어원(語源) 연구의 대가인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어원을 알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아름+답다'의 합성어는 분명한데 '아름'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얼굴 생김이나 차림 등 구체적인 대상을 얘기할 때는 보통 '예쁘다' '곱다'고 한다. 마음 씀씀이나 행동거지 같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주관적인 느낌을 담아서 얘기할 때 '아름답다'고 한다.
물고 뜯기는 정치판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적확(的確)한 용도로 쓰인 경우가 있었다. 작년 9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을 때다. 지지율 50%인 안 원장이 지지율 5%대인 박 상임이사에게 후보 양보 선언을 하는 순간 안 원장의 동지인 '시골 의사' 박경철씨는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즈음 야권에선 정치적·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이런저런 수식어들이 많이 동원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장직을 걸고 실시했던 무상급식 찬반 투표에서 야당 측이 내건 구호는 '나쁜 투표, 착한 거부'였다. 안 원장과 '청춘콘서트'를 함께 진행했던 한 개그맨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이 예쁜 바다, 이대로 놔두는 건 불가능할까?"라고 했다. 한진중공업 사태, 반값 등록금 시위 같은 데 자주 얼굴을 내밀었던 어느 여배우에겐 '아름다운 사람'이란 별명이 붙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당선된 다음 날 "제일 먼저 서울시의 '따뜻한 예산'을 챙기겠다"고 했다.
안철수씨의 일방적 중도 사퇴를 '아름다운 양보'로 표현하려는 사람들에겐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야권의 후보 단일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얘기하는 '아름다운'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야권의 '아름다운 단일화'는 서로 발톱을 감추고 권력 획득을 위해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준 과정이었다.
정치의 세계에서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미사여구(美辭麗句)나 덧칠이 눈에 걸릴 뿐이다.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실천으로 옮기는 걸 표현하는 데는 동사(動詞)면 족하다. 정치인들은 자기 말에서 형용사가 늘어나면 말의 내용이 가난한 건 아닌지, 자기가 덧칠의 유혹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오피니언/김태익 논설위원/입력 : 2012.11.26 23:10
'착한' 거부, '따뜻한' 예산… 본질 가리는 형용사 부쩍 늘어
'아름다운' 양보라는 安 사퇴는 권력 투쟁 다 보인 뒤 나온 것
국민을 위한 정책 실천하려면 덧칠 없이 動詞만으로도 충분
- 김태익 논설위원
어느 작가는 "문장은 형용사로부터 부패한다"고 했다. 수식하는 말은 멋있어 보이고 사람을 솔깃하게 만든다. 그러나 곰곰이 뜯어보면 역시 본질과 상관없는 장식품인 경우가 많다. 때론 알맹이가 안고 있는 부실함이나 밝히고 싶지 않은 진실을 흐리기 위해 수식어가 동원되기도 한다.
지난 몇달 대선 정국을 달구었던 야권의 '아름다운 단일화' 논의는 결국 안철수씨의 일방적 중도 사퇴로 막을 내렸다. 안철수씨와 문재인씨가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감동을 주는 경선을 거쳐, 단일 후보 선출 후에도 서로 힘을 합해 대선 승리까지 함께 가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여전히 안씨의 중도 사퇴를 '아름다운 양보' '통 큰 결단' '신선한 충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대선 후보 등록 후 기자회견에서 안철수씨에 대해 '커다란 미안함'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야권 단일 후보로서의 '막중한 책임감'과 '무거운 소명의식'으로 대선에 임해 국민과 소통하는 '겸손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국어 어원(語源) 연구의 대가인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어원을 알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아름+답다'의 합성어는 분명한데 '아름'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얼굴 생김이나 차림 등 구체적인 대상을 얘기할 때는 보통 '예쁘다' '곱다'고 한다. 마음 씀씀이나 행동거지 같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주관적인 느낌을 담아서 얘기할 때 '아름답다'고 한다.
물고 뜯기는 정치판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적확(的確)한 용도로 쓰인 경우가 있었다. 작년 9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을 때다. 지지율 50%인 안 원장이 지지율 5%대인 박 상임이사에게 후보 양보 선언을 하는 순간 안 원장의 동지인 '시골 의사' 박경철씨는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즈음 야권에선 정치적·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이런저런 수식어들이 많이 동원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장직을 걸고 실시했던 무상급식 찬반 투표에서 야당 측이 내건 구호는 '나쁜 투표, 착한 거부'였다. 안 원장과 '청춘콘서트'를 함께 진행했던 한 개그맨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이 예쁜 바다, 이대로 놔두는 건 불가능할까?"라고 했다. 한진중공업 사태, 반값 등록금 시위 같은 데 자주 얼굴을 내밀었던 어느 여배우에겐 '아름다운 사람'이란 별명이 붙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당선된 다음 날 "제일 먼저 서울시의 '따뜻한 예산'을 챙기겠다"고 했다.
안철수씨의 일방적 중도 사퇴를 '아름다운 양보'로 표현하려는 사람들에겐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야권의 후보 단일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얘기하는 '아름다운'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야권의 '아름다운 단일화'는 서로 발톱을 감추고 권력 획득을 위해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준 과정이었다.
정치의 세계에서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미사여구(美辭麗句)나 덧칠이 눈에 걸릴 뿐이다.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실천으로 옮기는 걸 표현하는 데는 동사(動詞)면 족하다. 정치인들은 자기 말에서 형용사가 늘어나면 말의 내용이 가난한 건 아닌지, 자기가 덧칠의 유혹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느 작가는 "문장은 형용사로부터 부패한다"고 했다. 수식하는 말은 멋있어 보이고 사람을 솔깃하게 만든다. 그러나 곰곰이 뜯어보면 역시 본질과 상관없는 장식품인 경우가 많다. 때론 알맹이가 안고 있는 부실함이나 밝히고 싶지 않은 진실을 흐리기 위해 수식어가 동원되기도 한다...ㅇㅇ...^-^
국어 어원(語源) 연구의 대가인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어원을 알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마음 씀씀이나 행동거지 같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주관적인 느낌을 담아서 얘기할 때 '아름답다'고 한다...^-^
야권의 '아름다운 단일화'는 서로 발톱을 감추고 권력 획득을 위해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준 과정이었다...정치의 세계에서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미사여구(美辭麗句)나 덧칠이 눈에 걸릴 뿐이다.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실천으로 옮기는 걸 표현하는 데는 동사(動詞)면 족하다. ...ㅇㅇ...^-^
- 2012년11월27일 화요일 오후 1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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