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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서태후 120가지 반찬 살아남기 위한 전략"/대청황제공덕비(사적 101호) 5장

"서태후 120가지 반찬 살아남기 위한 전략"

조선일보/라이프/북스

입력 : 2012.11.24 03:04 / 수정 : 2012.11.24 15:49

서태후와 궁녀들
룽얼 구술|진이·선이링 지음|주수련 옮김|글항아리|640쪽|2만4000원


"상소문을 읽으신 뒤에는 종이 위에 엄지손가락 손톱으로 꼭꼭 눌러 무언가를 표시하셨어요. 어떤 때는 수직선을 그리시고, 어떤 때는 ×자를 그리시고 어떤 때는 V자 표시를 하셨지요. 상소문을 읽는 이 짧은 시간 동안 태후마마의 손톱이 한 번 움직이는 대로 어떤 이는 승진을 하고 어떤 이는 목이 날아가고 어떤 이는 귀양을 가게 되는 거예요."

서태후(1835~1908)는 1861년부터 어린 아들 동치(同治)제와 그 뒤를 이은 조카 광서(光緖)제를 대신해 50년 가까이 수렴청정으로 청나라를 다스렸다. 서구의 침략과 내란에 시달리던 노쇠한 제국의 마지막 순간을 이끈 여장부였다. 서태후의 '손톱 결재'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룽얼은 열세 살에 자금성에 들어가 8년간 서태후를 모신 궁녀다.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8국 연합군이 자금성을 함락하자, 서태후와 광서제를 모시고 시안(西安)에 피란까지 갈 만큼 측근이었다. 룽얼이 증언하는 서태후의 궁중생활은 현장 목격담처럼 생생하다. "태후마마의 식사 때는 매번 120가지가 넘는 요리가 올라온답니다. 오늘 이 요리를 드셨다면 내일은 다른 요리를 드시면서 누구도 태후마마가 무슨 음식을 잘 드시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지요. '같은 음식을 세 숟가락 이상 뜨지 않는다'는 규범도 있었어요." 독살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썼다는 것이다.

 
서태후는 냉혹한 통치자였다. 의화단사건으로 피란길에 오르는 황급한 상황에서도 광서제의 후궁 진비(珍妃)를 우물에 빠뜨려 죽인다. 서태후는 1898년 캉유웨이 등 관료들과 함께 입헌군주제 개혁을 통해 자신에게 맞섰던 광서제를 용서하지 않았다. 광서제를 유폐하고 다시 섭정을 실시한 서태후는 광서제가 총애한 진비를 정치적 걸림돌로 여긴 것이다.

그런 서태후도 피란길에선 위신을 지킬 수 없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몇년씩 정성 들여 기른 손톱을 자르고, 평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음식을 구할 수 없어 피란길의 첫 점심은 옥수수죽과 콩이었다. 이틀간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한 서태후는 한 지방관에게 계란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계란 다섯 개가 올라오자 세 개를 허겁지겁 먹었다. 나머지 두 개는 황제에게 올리라고 했다.

용변을 보는 일도 밖에서 해치워야 했다. "여기 풀이 빽빽한 곳에서 해결할 테니 나를 둘러서서 가리도록 해라." 태후의 명에 따라 궁녀들은 재빨리 둥글게 벽을 만들었다. 태후, 황후, 후궁, 공주들이 차례로 용변을 해결했다. 화장지도 없어서 야생 마잎으로 대신했다. 서태후는 청이 망하기 3년 전인 1908년 세상을 떴다. 자신에게 맞섰던 광서제보다 하루 뒤 죽었다. 죽는 순간까지 절대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룽얼은 서태후의 삶에 대해 "태후마마는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삶을 사시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신분은 높았으나 스물대여섯에 과부가 된 외로운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산해진미를 먹고 능라주단을 입지만 곁을 지키는 사람은 철없는 궁녀와 간교한 태감들뿐이었다. 모자지간에도, 며느리와도 진심 어린 대화 없이 연극하듯 대사를 읊을 뿐이었다. 룽얼은 1940년대 후반 베이징에서 한집에 살았던 작가 부부에게 서태후와 궁중생활을 들려줬다. 궁녀의 시각으로 청 제국의 마지막 순간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서태후의 '손톱 결재'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서태후(1835~1908)는 1861년부터 어린 아들 동치(同治)제와 그 뒤를 이은 조카 광서(光緖)제를 대신해 50년 가까이 수렴청정으로 청나라를 다스렸다....^-^

 

서태후는 1898년 캉유웨이 등 관료들과 함께 입헌군주제 개혁을 통해 자신에게 맞섰던 광서제를 용서하지 않았다. 광서제를 유폐하고 다시 섭정을 실시한 서태후는 광서제가 총애한 진비를 의화단사건으로 피란길에 오르는 황급한 상황에서도 광서제의 후궁 진비(珍妃)를 우물에 빠뜨려 죽인다...냉혹한 통치자였다.

 

서태후는 청이 망하기 3년 전인 1908년 세상을 떴다. 자신에게 맞섰던 광서제보다 하루 뒤 죽었다. 죽는 순간까지 절대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신분은 높았으나 스물대여섯에 과부가 된 외로운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룽얼은 1940년대 후반 베이징에서 한집에 살았던 작가 부부에게 서태후와 궁중생활을 들려줬다.

 

- 2012년 12월2일 일요일 오전 6시5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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