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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눈물 젖은 효녀의 쌀밥/능소화 2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눈물 젖은 효녀의 쌀밥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2-08-29 21:23:33

 

“하루에 쌀 서말(斗)과 꿩 아홉마리를 먹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아침 저녁 두끼로 줄였지만 쌀 여섯말, 술 여섯말, 꿩 열마리를 먹었다.”(<삼국유사>)

신라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년) 이야기다. 엄청난 대식가였음을 알 수 있다.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서제(庶弟)인 거득공은 손님을 대접하면서 무려 50가지나 되는 진수성찬을 차렸다. 683년 신문왕이 왕비를 맞으면서 신부집에 보낸 예물 목록을 보면 기가 막힌다.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였다.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젓갈이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상상해보라. 예물수레 300대 가운데 먹을거리가 가득한 285대가 서라벌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을…. 고구려 왕·귀족은 어땠을까.

“…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다. 아침에 먹을 간장이 창고에 가득하다.”

평남 덕흥리 고분의 묵서에 담긴 내용이다. 안악 3호분 벽화(사진)의 고기창고에도 돼지와 소, 개(노루) 같은 동물이 통째로 갈고리에 걸려 있다. 과연 평민들은 어땠을까. <삼국지>는 “고구려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다. ‘앉아서 밥먹는 자(坐食者)’가 1만여호가 된다”고 했다. “고구려 초기 인구는 3만호”(<삼국지>)였단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놀고먹는 귀족이었다는 얘기다. 6세기 말,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을 찾았을 때, 온달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느릅나무 껍질(楡皮)’을 벗기고 있었다. 신라 신문왕이 호화 음식예물을 뽐낸 지 불과 20여년 만인 705~707년 사이…. 엄청난 가뭄에 수많은 백성이 굶어죽었다.

진성왕(재위 887~897년) 시기에 지은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됐다. 그 조건으로 쌀 10여섬을 마련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머니가 인상을 찡그렸다.

“예전엔 밥이 거칠었지만 맛은 달았는데, 왜 요즘엔 밥이 좋은데 밥맛은 예전 같지 않느냐?”

거친 밥만 먹다보니 윤기 좔좔 흐르는 쌀밥을 어머니의 위장이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딸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 때문에 남의 집 종이 되었구나!” “딸이라고 어머니의 배만 채울 줄 알았지 엄마의 마음에 맞는 봉양을 못했네요.”

왕·귀족들이 음식을 탐식할 때 백성들의 통곡이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짱나 683년 신라 신문왕이 왕비를 맞으면서 신부집에 보낸 예물 목록을 보면 기가 막힌다...“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였다.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젓갈이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삼국지>는 “고구려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다. ‘앉아서 밥먹는 자(坐食者)’가 1만여호가 된다”고 했다. “고구려 초기 인구는 3만호”(<삼국지>)였단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놀고먹는 귀족이었다는 얘기다...^-^

 

 

진성왕(재위 887~897년) 시기에 지은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됐다. 그 조건으로 쌀 10여섬을 마련했다....^-^

 

 보고있나빈부의 격차가 옛~날에는 현대의 그것보다 더~욱  심했네..ㅠㅠ...^-^

 

- 2013년 1월 2일 수요일...오후 6시30분...수산나 -

능소화 1

 

능소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