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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환향녀, 화냥년/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6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환향녀, 화냥년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2-11-21 21:34:49

 

“(아낙네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다.”

1638년 <인조실록> 기자가 비분강개한다. “본심은 아니었어도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대체 무슨 일인가. 당시 신풍부원군 장유가 진정서를 냈다. 병자호란 때 청군에 끌려간 며느리가 ‘환향’했다는 것. 이 며느리와는 선조의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아들이 이혼하고 새장가 들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환향녀’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좌의정 최명길은 ‘절대 불가한 일’이라고 반대한다.

“전쟁통에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여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또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볼 수 있습니까.”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간 백성은 최다 60만명에 달했다.(사진은 삼전도비) 그 가운데 반은 힘없는 여성들이었다.

“각 진영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군이 채찍을 휘두르며 몰아갔다.”(<연려실기술>)

끌려가면서도 청나라군의 회유와 협박을 끝내 뿌리치며 단식투쟁을 벌이다 굶어죽은 처녀도 있었다. 과도한 몸값 때문에 ‘환향’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도 있었다. 청나라 왕·귀족과의 혼인을 위해 심양에 끌려간 여인 10명은 “너무 못생겼다”는 타박까지 들어야 했다. 사실 임진왜란 직후에도 비슷한 쟁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당시 선조는 “이는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조야첨재·朝野僉載>)는 확고한 영을 내렸다. 인조도 최명길의 주장을 좇아 ‘이혼 및 재혼 불가’의 명을 내렸다. <실록>의 기자는 최명길을 두고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욕했다. 항간에서는 ‘환항녀’를 ‘화냥년’이라며 비웃었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호로(胡虜)자식’이라 손가락질했다. 슬금슬금 ‘환향녀’들을 버리고 재혼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러고보면 못난 임금, 못난 아비, 못난 남편 만나 모진 삶을 이어갔던 여인들의 팔자가 아닐 수 없다.

“병란을 맞아 의(義)에 죽은 충신은 없고, 매서운 정절을 지킨 자는 부녀자뿐이니….”(<강도몽유록>)

강화도 함락 때 목숨을 바친 어떤 기생의 항변이다. 도망가느라 처자식과 노모를 두고 줄행랑친 남자들을 보라며…. 그러니 누가 ‘정절’을 논하고 꾸짖는단 말인가. 당대 여인들의 외침이 귓전을 때리는 것 같다. “남자들이나 잘하세요."

 

 

헉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간 백성은 최다 60만명...그 가운데 반은 힘없는 여성들...^-^

“각 진영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군이 채찍을 휘두르며 몰아갔다.”(<연려실기술>) ...^-^

 

엉엉<실록>의 기자는 최명길을 두고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욕했다. 항간에서는 ‘환항녀’를 ‘화냥년’이라며 비웃었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호로(胡虜)자식’이라 손가락질했다. 슬금슬금 ‘환향녀’들을 버리고 재혼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 2012년 12월30일 일요일...수산나 -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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