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마오쩌둥 아들, 밴플리트 아들/개망초 3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마오쩌둥 아들, 밴플리트 아들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2-11-07 20:58:46

 

“소하(蕭何), 그대의 공이 가장 크다.”

기원전 202년, 초·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 고조(유방)는 논공행상의 최고 공신으로 소하를 꼽았다. 소하는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후방에서 병참을 관리한 인물이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이 아우성쳤다. 하지만 고조가 그들의 입을 막았다.

“소하는 전 일가를 통틀어 수십명이 전쟁에 참전했다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1950년,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맏이인 마오안잉(毛岸英·사진)이 자원입대했다. 새어머니인 장칭(江靑) 등이 만류하자 마오쩌둥이 일축했다.

“마오의 아들이 죽음을 무서워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겠는가.”

마오안잉은 두번째 부인인 양카이후이(楊開慧)가 낳은 아들이었다. 양카이후이는 1930년 국민당 군벌에게 붙잡혀 총살당한다. “남편을 배반하라”는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그런 양카이후이가 낳은 자식이었으니 얼마나 끔찍이 여겼을까. 1950년 11월25일 아침, 중국군 총사령부 막사에 소이탄 100여발이 떨어진다. 마오안잉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뒤늦게 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은 마오 주석은 줄담배를 피우다 한마디 던졌다. “그 놈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니까….”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 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라”고. 그러면서….

“자기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는 아주 많습니다.”

1952년 4월4일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의 아들(지미 중위)이 B-26 전폭기를 몰고 출격했다가 실종된다. 지미 역시 한국전 참전을 자원한 보라매였다. 밴플리트는 말했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겁니다.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한국전엔 미군 현역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고, 그 가운데 35명이 죽거나 다쳤다.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아들 빌 대위는 일선 소총중대장을 자원,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3차례나 부상을 입었다. 그는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해리스 해병 제1항공사단장의 아들인 해리스 소령도 장진호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그러고보면 지도자 노릇 하기도, 지도자의 자식 노릇을 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그럴 깜냥이 안되면 처음부터 포기하든지….

 

보고있나1950년,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맏이인 마오안잉(毛岸英·사진)이 자원입대...“마오의 아들이 죽음을 무서워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겠는가.”...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은 마오 주석은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라”고....ㅠㅠ...^-^

 

1952년 4월4일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의 아들(지미 중위)이 B-26 전폭기를 몰고 출격했다가 실종된다. 밴플리트는 말했다...“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겁니다.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ㅠㅠ...^-^

 

못써지도자란 모름지기 이와 같은 솔선수범이 있어야 하는데...한국은 상류층 일수록 군대를 안 가거나 안 보내니...군대 안 보내는 부모나 본인 모두 "못써!"......^-^

 

                                                                         - 2012년 12월30일 일요일 오후 4시30분...수산나 -

개망초 1

 

개망초 2

 

개망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