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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청자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산벚나무 5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청자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2-11-28 21:24:09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든 겁니까?”(고종) “고려시대의 것입니다.”(이토 히로부미) “아 그래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겁니다.”(고종) “….”(이토)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 조선의 임금이라는 분이 고려청자를 전혀 본 적도 없다고 하고, 일본인 통감 이토는 ‘고려의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그런데 이토는 “이런 물건은 조선에는 없다”는 고종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랬을 것이다. 이 청자가 도굴품임을 이실직고할 수 없었을 테니…. 조선인들은 조상의 무덤을 훼손하는 것을 패륜행위로 보았다. 그랬으니 고종은 고려시대 무덤 안에 안장되던 고려자기를 꿈에서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일제침략이 본격화한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은 고려고분 도굴에 눈이 멀었다. 처녀분에서 찬란한 고려자기를 완형의 상태로 수중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총칼로 후손들을 위협한 뒤 무덤을 유린, 강탈해갔다. 어떤 경우엔 흙이 잔뜩 묻은 고려자기를 신문지로 싸서 매매하기도 했다. 무덤 한 곳을 2~3차례씩이나 털리는 예도 생겼다. 고분이라 짐작되는 주민의 땅을 통째로 매입해서 무덤을 파낸 뒤 꺼낸 고려자기(사진)를 거래하는 일도 있었다. 식민사학의 뿌리를 심은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우메무라 스에하루(梅原末治)조차 개탄했다. “악질 일본인이 남의 나라 조상 무덤을 그토록 비정하게 도굴, 총독정치의 오점이 됐다”고….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파헤친 도굴품을 사들여 퍼뜨린 고려자기 장물아비였다. 당시 일왕가와 귀족들 사이에 이토의 고려자기 선물을 받지 못한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토의 하수인은 니타(新田)라는 자였다. 이토의 술자리에 배석해 노래와 춤으로 주흥을 돋운, 지금으로 치면 ‘술상무’였다. 이토는 ‘닥치는 대로 (고려자기를) 사라’고 명령했다.

니타는 충무로의 곤도(近藤)라는 골동품상에서 개성과 강화 등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들을 좌(左)에서 우(右)로 50~100점씩을 손가락으로 지정, 한꺼번에 구입했다. 고려자기 ‘싹쓸이 쇼핑’이었다. 경성에서는 고려자기가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도굴과 장물거래로 먹고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고려자기 도굴 및 거래업이 ‘당대 조선의 각광받는 유망산업’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이 시대를 ‘고려청자의 광풍시대’라 했다. 굴옥(掘屋), 즉 호리꾼이라는 직업도굴단까지 생겼다. 모두 이토가 퍼뜨린 ‘광풍’이었다. 이토를 쏘았던 안중근 의사가 그랬단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비운(悲運)이 지하 백골에 이르렀다”고….

 

꺅짱나이토 히로부미는 도굴품을 사들여 퍼뜨린 고려자기 장물아비... 일왕가와 귀족들 사이에 이토의 고려자기 선물을 받지 못한 자가 없을 정도였다...이토의 하수인은 니타(新田)...고려자기 ‘싹쓸이 쇼핑’를 했다... ‘고려청자의 광풍시대’라 했다...고려자기 도굴 및 거래업이 ‘당대 조선의 각광받는 유망산업’으로 추천되기도 했다....ㅜㅜ...^-^

 

사진의 청자에 사람이 그려져 있네...ㅎㅎ...^-^

 

- 2012년 12월30일 일요일...수산나 -

산벚나무 1...꽃

 

산벚나무 2...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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