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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시대 병역비리/수원 화성 북동적대 2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시대 병역비리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3-01-02 20:45:01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如坑穽) 여깁니다.”

1636년 8월, 대사간 윤황이 엎드려 고한다. 백성들이 온갖 핑계를 대고 병역을 기피한다는 상소였다. “10가구당 겨우 1~2명이 병역을 담당할 뿐”이라고 고발했다. 21~24개월만 버티면 되는 요즘과 달리 16세부터 60세까지 44년간 짊어져야 할 양인의 의무였으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역이었을 것이다(그림은 조선의 병적기록부). 심지어 천민이던 손장수는 ‘이시애의 난’(1467년)을 진압한 공 덕분에 양민으로 승격됐지만, 고달픈 병역의 의무가 두려워 다시 천민 신분을 자청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신분 상승도 팽개쳤을까. 가장 문제가 됐던 병역기피 수법은 도첩(승려 자격증)을 받아 스님이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서학생 박경준은 “쌀을 훔쳐 먹는 도적”이라는 무시무시한 표현까지 썼다(1616년). 1492년(성종) 불교에 심취한 인수대비(성종의 모후)가 도첩제 폐지에 반대하고 나서자 사간 권구는 독기 서린 어투로 쏘아붙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모후(인수대비)가 국정간섭을 하다니요.”

학교도 병역회피의 소굴이 됐다. ‘현직 관리=병역면제’의 규정을 이용해 지방의 유생들이 대리수강이나 뇌물을 통해 불법으로 훈도(訓導·선생)로 둔갑하는 예가 비일비재했다. 소년들의 기본 학습서인 <소학>조차 외우지 못하는 학생들도 부지기수였다. 일정한 시험에서 낙방하는 학생들은 병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 경우 지방 향교 학생 4만명 중 5분의 4가 탈락될 운명이었다.

1612년(광해군 4)에는 병역회피를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다가 적발된 이도 있었다. ‘훈도(선생)’의 임명장에 자신의 이름을 위조한 혐의가 그만 들통난 것이다. 대대로 병역면제 혜택을 받아온 명문가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1710년(숙종 36) 민진후는 “선현의 자손이라고 거짓을 고하는 자가 많다”고 개탄했다.

“안(安)씨 성을 가진 자는 다 안향의 자손이라 하고, 한(韓)씨 성을 가진 자는 모두 ‘기자(箕子)의 후예’라 칭합니다.”

1659년(효종 10) 병조참지 유계가 공자를 인용하며 상소를 올린다.

“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병역의 불평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 군역의 ‘괴로움’보다는 ‘불평등’이 더욱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진정 옳은 말이다.

 

짱나가장 문제가 됐던 병역기피 수법...도첩(승려 자격증)을 받아 스님이 되는 것...학교도 병역회피의 소굴...불법으로 훈도(訓導·선생)로 둔갑하는 예가 비일비재했다...병역면제 혜택을 받아온 명문가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도 속출했다...“안(安)씨 성을 가진 자는 다 안향의 자손이라 하고, 한(韓)씨 성을 가진 자는 모두 ‘기자(箕子)의 후예’라 칭합니다.”...^-^

 

  ‘불평등’이 더욱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진정 옳은 말이다....^-^

수원 화성 북동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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