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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박정희 X 따러 왔시요”/북한산 진관사 일주문 등 4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박정희 X 따러 왔시요”

경향신문/오피니언/테마칼럼/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입력 : 2013-01-16 21:38:11

 

“청와대를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목을 따러 왔시요.”

1968년 1월21일 밤, 대한민국 한복판, 그것도 청와대와 직선거리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졌다. 휴전선을 통과한 124군 소속 북한 특수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쏜살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이때 ‘생포된’ 김신조가 생경한 북한 사투리로 내뱉은 ‘청와대 운운, 대통령 목 운운’하는 말은 세상을 경악시켰다. 이들은 북한에서 험준한 산악을 시속 12㎞로 뛸 수 있도록 맹훈련을 받았다.

 

남파 직전인 1월10일에는 사리원 인민위원회 건물을 실제로 습격해 12명을 사살하고 40여명을 다치게 했다. 남파공작을 위해 자기편 식구들을 몰살시키는 ‘실전훈련’까지 벌인 것이다. 사건은 남한이 북파한 공작원들의 소행으로 위장됐다. 1월18일 새벽 휴전선을 넘은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산악을 달렸다. 파주 법원리에서 만난 나무꾼 4형제를 살려준 것이 ‘중대한 실수’였다. 나무꾼 형제들의 처리를 놓고 즉석투표를 벌인 끝에 ‘살리자’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김신조는 훗날 “‘이런 불쌍한 인민들은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차라리 낫다’는 의견에 따라 절대다수가 ‘살리자’는 쪽에 표를 던졌다”고 회고했다. ‘살려주는 조건으로’ 공산당 입당원서와 서약서까지 받았다. 하지만 나무꾼 형제들은 곧바로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했다. 그럼에도 북한 특수대원들은 휴전선을 뚫은 지 단 사흘 만인 21일 밤 청와대 옆길까지 ‘행군대열’로 침투했다.

이들의 원래 목표는 청와대는 물론 육본과 미대사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이었다고 한다. 부대원도 76명이었는데, 나중에 ‘청와대’로 목표가 축소돼 31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28명이 사살되거나 자폭한다. 생존한 김신조 외에 나머지 2명은 끝내 행방을 찾지 못했다. 이들은 남파 직전 ‘김일성 수령에게 보내는 혈서’까지 썼단다. 그러나 끝내 버림받았다. 시신 인도를 제의했지만, 북한은 ‘우리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단다. 남파 사실을 시인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남에서는 민간인마저 무참하게 살해한 ‘무장공비’로 기억될 뿐이다. 이들 28명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 묻혀 있다.(사진) 묘비 8개에는 ‘무명인’이라고만 적혀 있다. 산산이 흩어져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인 채로…. 그나마 고향 땅 북쪽을 향해 묻혀 있다는 것이 다행일까. 그나저나 이 야만의 역사는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45년 전 서울 한복판, 그것도 청와대 인근에서 벌어진 일이다.

 

막던져1968년 1월21일 밤...북한 특수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달려왔다...휴전선을 뚫은 지 단 사흘 만인 21일 밤 청와대 옆길까지 ‘행군대열’로 침투했다....하지만 파주 법원리에서 만난 나무꾼 4형제를 살려준 것이 ‘중대한 실수’였다....나무꾼 형제들은 곧바로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했다....이 가운데 28명이 사살되거나 자폭한다. 생존한 김신조 외에 나머지 2명은 끝내 행방을 찾지 못했다...이들 28명 무장공비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 묻혀 있다.(사진)

 

- 2013년 1월19일 토요일...수산나 -

 

 

 

북한산 진관계곡 탐방로....무장공비 침투로...1968년 1월21일 발생...^-^

 

북한산 진관사 입구

 

북한산 진관사 입구

 

북한산 진관사 일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