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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숙종은 나쁜 남자·못난 남자/창경궁 어좌 1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숙종은 나쁜 남자·못난 남자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입력 : 2013-01-09 21:08:15

 

 

“주상은 평소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는데, 꾐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1686년(숙종 12), 임금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며느리(인현왕후)에게 충고한다. “(조울증에 빠진) 숙종이 요악(妖惡)한 장씨(장희빈)의 유혹에 빠질 경우 큰 일”이라는 걱정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장씨가 왕자를 생산하자 숙종은 중전을 폐출시켰다.(1689년 5월2일)

“상감이 얼마나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지 미처 가마조차 마련할 틈도 없이 걸어야 했고….”(<인현왕후전>)

 


왕후를 버선발로 내쫓은 것이다. 그런 뒤 불과 4일 만에 장씨를 새 중전으로 올렸다. 숙종의 변덕은 5년을 버티지 못했다. 1694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가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인현왕후의 복위가 결정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장씨가 “폐비(인현왕후)의 절을 받고 물러나겠다”고 버티자, 숙종은 “빨리 끌어내라”며 앙앙불락한다.

중전 복귀를 명받은 인현왕후도 남편을 쉽게 용서하지 않았다. 숙종이 “잘못했다”는 어찰을 내렸다. 그러나 “죄인이 어찌 어찰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버텼다. 예절을 빙자한 복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목으로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렇지만 왕후를 ‘먼지와 창호를 구별할 수 없는 더러운 집에서 5년이나 살게 한’(<인현왕후전>) 이가 누구였던가. 바로 숙종이었다. 또 숙종은 그렇게 예뻐했던 장씨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사약을 세 사발이나 들이부었다(<인현왕후전>). 그러면서 ‘이제 후궁은 왕후가 될 수 없다’는 법까지 선포했다(<숙종실록>). 모든 책임을 ‘후궁이 왕후가 된 탓’, 즉 여인에게 돌린 것이다. 청와대 영빈관과 붙어 있는 곳에 ‘칠궁(七宮·사진)’이 있다. 희빈 장씨(경종)와 숙빈 최씨 등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주변의 반경 100m 사이에 1·12사태(1968)와 10·26사태(1979)가 났던 ‘변란의 현장’이 있다. “자식이나 보고 죽어 구천의 한을 없애 달라”고 구슬픈 눈물을 흘렸던 장씨의 한이 서렸기 때문일까. 아니 그 또한 ‘나쁜 역사’의 책임을 여인에게 돌리는 ‘나쁜 습성’일 것이다. 장씨는 죽어가면서까지 “내게 무슨 죄가 있냐”며 “전하가 정치를 밝히지 않으니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쏘아붙였다. 그렇다. 칠궁에 만약 한(恨)이 서려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못난 남편을 두었던 한일 터….

못써청와대 영빈관과 붙어 있는 곳에 ‘칠궁(七宮·사진)’이 있다. 희빈 장씨(경종)와 숙빈 최씨 등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주변의 반경 100m 사이에 1·12사태(1968)와 10·26사태(1979)가 났던 ‘변란의 현장’이 있다....칠궁에 만약 한(恨)이 서려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못난 남편을 두었던 한일 터….ㅠㅠ...^-^

 

- 2013년 1월10일 목요일 ...수산나 -

 

창경궁 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