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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조선[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다큐멘터리 감독 정수웅(70) /담쟁이 2장

 [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시신과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10대, 결국 그때 죽음에 대한 관념은 달라져…

조선일보/사회 사람들/신동흔 기자

입력 : 2013.01.26 03:05 | 수정 : 2013.01.27 07:38

카메라 든 史官… 일흔에도 현장 뛴다, 나는 PD다

1977년 '草墳'으로 '다큐 노벨상' 수상
'명성황후' '무희 최승희' 등 걸작 40여편… 국내외 호평, 4년연속 방송대상 신기록도

정수웅 감독은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스트의 기관총”이라고 했다. 평생 현장에 나갈 때면 그는 언제든 셔터를 누를 수 있도록 카메라를 몸에서 떼지 않았다. 비록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한 것이었지만, 한 손에 뷰파인더를 잡고 카메라 뒤에 선 그의 얼굴에서 그때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 허영한 기자

다큐멘터리 감독 정수웅(70)은 지난 2008년 10월 어느 날 밤 파키스탄 치라스의 한 민가(民家)에 머물고 있었다. 남들은 이미 은퇴했을 나이의 독립 프로덕션 PD, 30대 시절 중앙아시아에서 잠깐 보았던 불상의 미소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온 길. ‘그리스 석상의 미소가 신라 반가사유상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그 미소는 어떤 루트로 전파된 것일까.’ 젊은 시절 간직했던 궁금증이자 화두 하나를 붙잡고 탈레반이 정부군과 대립하고 있는 지역으로 현지인 가이드 한 명만 데리고 들어왔다. 그가 걷다 잠시 쉬는 이 인더스 강변의 마을을 신라의 승려 혜초가 지나갔고,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머물렀으리라.

밤이면 반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가이드가 누운 침대 아래서 잠을 청했다. 키 작은 소년병들이 총을 끌고 방 앞을 오가는 소리가 수시로 났다. 그들은 문밖에서 한참을 수군거리기도 했다. '누군가 마을에 나타났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나' '잡히면 십중팔구 인질 삼아 돈을 요구하거나, 죽일 텐데' 별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 '스마일로드(미소의 길)'가 KBS에서 2009년 방송을 타며 호평을 받았다. 이제는 해외로 나가 지난 18일 일본 NHK-BS1에서 방송됐다.

올해로 다큐 감독 40년을 맞은 그는 KBS와 일본 니혼TV 산하 일본영상기록센터 등을 거쳐, 지난 1985년부터 28년째 독립 PD로 활동 중인 현역이다. '송화강, 한인들의 숨결'(1990) '노예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1993) '잃어버린 50년, 캄차카의 한인들'(1995) '세기의 무희 최승희'(2002) '110년 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2005) 등 민족사의 애환과 한·일 관계의 비사(秘史)를 다룬 선 굵은 다큐멘터리 40여편을 만들었다. 한·중 수교를 맺기도 전인 80년대 후반부터 중국에 들어가 만주 벌판을 누볐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구법승처럼 혼자 걷기도 했다. 두 달 전에도 독도 비사를 추적하기 위해 일본 시마네현에 다녀온 그를 지난 21일 서울 용산의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새로운 작품의 방송 기획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내는 쉬지를 않는 것 같았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이도 잊고 삶과 죽음이 간발의 차이로 엇갈리는 현장을 찾아다니게 하는 것일까.

길 위에서 살아온 삶

―이제는 좀 쉬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 쉴 수 없다. 계속 현장을 다녀야지. 지금은 '하늘이 내린 역동의 리듬 세마치, 신한류를 펼치다'를 만들고 있고, '독도, 일본의 음모는 어떻게 이뤄졌는가'도 취재 중이다. 싸이 '강남스타일'도 알고 보면 우리의 삼박자 리듬 세마치에서 나오는 춤이다. 외국에는 없는 신명이 거기에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지금도 카메라를 직접 들고 다니나.

"요즘은 메모리 카드가 들어간 콤팩트한 카메라를 들고 다닐 수 있어 편하다."

―해외 출장은 요즘도 가나.

"최근에는 독도 관련 취재를 위해 일본 시마네현에 10차례 정도 다녀왔다."

―돈이 많이 들 텐데.

"강원도 동해시에 가서 배를 타고 가면 항공으로 가는 비용의 10분의 1도 채 들지 않는다. 꼭 비용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한·일의 역사가 담긴 그 바다를 꼭 배를 타고 건너볼 것을 주위에 권하는 편이다. 그 바다가 연상시켜주는 여러 가지가 있다."

1998년 정 감독이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한 인도 사르나트 지방 사찰에서 불상을 촬영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방송계에선 백두산에 처음 간 PD로도 유명하다.

"첫 직장인 KBS를 그만두고 일본 다큐멘터리 프로덕션에 스카우트되어 갔다 돌아온 뒤, 88올림픽 개·폐회식 영상총감독을 맡았다. 그때 백두산 영상을 주최국 국기가 게양될 때 쓰고 싶은데 KBS에도 NHK에도 낡은 필름밖에 없었다. 직접 들어가 찍어야 했다. 그런데 갈 방법이 없었다."

―밀입국한 것인가.

"일본에 있을 때 알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중국 비자를 받았다. 베이징까지만 허락된 여권이어서 나머지는 내가 해결해야 했다. 결국 백두산 천지까지 올라가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로도 4번이나 더 백두산에 올랐다. 이듬해 '송화강, 한인들의 숨결'을 찍었고, 발해 유적지를 실물로 확인하는 성과도 올렸다. 그때 역사학자들이 꽤나 부러워했다."

―역시 몰래 들어간 것인가.

"올림픽 끝나고 중국에 들어가서 몇 달을 살았다. 말도 이북 말을 배웠고, 옷도 중국 사람들이 입는 군복 같은 것을 입고 다녔다.

북한 사람들 밤이 되면 혜산에서 강 건너 술 마시러 나왔다. 남한에서 왔다고 밝히고 함께 술 마신 적도 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을 텐데.

"두만강 상류는 폭이 실개천만 하다. 거기에 북한 경비병이 서 있는데 그냥 건너와 나를 잡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부러 헙수룩하게 다니면 괜찮았다. 미리 닭을 한 마리 사서 던져주고 '수고 많소' 그러면 그쪽에서 '고맙습네다'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고 나면 카메라로 건너편 찍어도 별말이 없더라. 사실 국경 지대에서는 정보가 빠르지만,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느 날인가 방에서 자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길래 열어보니 인민군들이었다. 내가 아주 넉살을 떨면서 반갑게 맞이했지.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이 자기들 요즘 사정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사람이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옆구리 찌르기도 하고…. 헤어질 때 중국 돈 몇푼 쥐여줘서 보냈다."

―두 달 전에도 출장을 다녀왔다고 하던데.

"지금 여기 있으면 힘이 없고 오히려 몸이 아프다. 하지만 현장에 가면 날아다닌다. 신바람이 나니까."

―원래 대담했나. 80년대에 만주는 오지였다. 몰래 들어가 신분도 보장이 안 되고 죽을 수도 있는 일 아니었나.

"죽음이 꼭 끝은 아니지 않을까 평소 생각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고3 때부터 대학 때까지 4년 동안 국립의료원 시체안치실에서 시신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안치실에 있다가 환자가 죽으면 병실로 올라가 지하의 안치실로 옮겨오는 아르바이트를 매일같이 했다."

―무섭지 않았나.

"1960년대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시체를 운반하다가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때가 있었다. 시신과 단둘이 3~4시간씩 깜깜한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다 보면 혼잣말로 대화 같은 것을 나누게 되는 때도 있었다. 죽음에 대한 관념은 그때 좀 달라진 것 같다."

1977년작 '초분' 빛 못볼뻔
진도의 장례풍속 담았는데 선진조국 분위기 해친다며 방송불가 판정…
해외서 상 탄뒤 겨우 방송

명성황후 시해 사죄 끌어내
시해 범죄자 후손 찾아내 110년만에 대신 참회케 해
"역사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봐야해요"

전범국 일본 살린 게 한국인
2차대전 日 항복 설득한 외상 '도고' 추적해보니
조선서 피랍 도공의 후손이름이 박무덕이더라


민족사의 애환을 찾아

초창기부터 그가 찍은 다큐는 항상 화제가 됐다. KBS PD로 일할 때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한국의 미'나 '한국의 재발견' 시리즈 중 수작(秀作)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1977년 KBS 5년차 PD 시절, 사람이 죽으면 풀 무덤으로 덮어뒀다 유골만 추려 다시 매장하는 전남 진도의 장례 풍습을 담은 작품 '초분(草墳)'을 찍었다. 그런데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낙후된 시골의 모습이 선진 조국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필름이 해외로 나가 다큐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든 하프상(賞)' 국제상을 수상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해외에서 일을 내자 부랴부랴 국내에서도 다시 방송이 결정됐고, 한국방송대상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불교문화의 원류를 찾아서'(1978) '비구니의 세계 석남사'(1979) '신라의 신비 대왕암'(1980) 등의 작품을 통해 내리 4년 연속 방송대상을 수상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잘나가던 그는 1982년 홀연히 KBS를 떠난다.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황강에서 북악까지'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전기 필름을 연출하라는 지시를 받아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사표를 썼다.

(왼쪽부터) 중국 마이지산 석굴에서 발견된 불상의 얼굴.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충남 서산 마애삼존불. / 정수웅 감독 제공

―77년 필름 '초분'을 보면 무척 아름답다. 유골을 모아 매장할 때 무덤가의 엉겅퀴 꽃에 나비가 한 마리 내려와 한참을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오던데, 어떻게 그런 장면을 잡아냈나.

"골든 하프상 심사위원들로부터 '100만달러짜리 컷'이라는 소리를 들은 장면이다. 나비를 일부러 앉힐 수는 없다. 무덤가의 나비는 혼령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나는 '왔구나'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다. 영적인 세계에서 도와준 것 아닌가 싶다. 수상으로 인해 내가 다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작품이 됐다."

―KBS 내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하던데.

"초분은 환태평양 지역에서 내려온 장례 풍습인데 다 사라지고 진도에만 남아 있었다. 진도가 상엿소리나 씻김굿 등 무형문화재가 많지 않나. 영상인류학적으로 의미가 큰 작품인데 기획안을 올렸더니 '새마을운동이 한창인데 왜 이런 걸 하느냐'고 반대가 심했다. 뼈 닦고 씻김굿 하는 모습이 원시적으로 보인다는 거지. 그냥 밀어붙여서 해외 출품까지 했는데, 수상을 하면서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분위기가 역전이 됐다. 한국 방송 사상 처음으로 해외 13개국에서 전파를 탔다. 친구인 김지하도 감옥에서 나온 다음 이 작품을 보고 좋아했다. 그 양반이 전남 신안 출신이지 않나."

―초기작 중에 민속을 다룬 작품이 많았다.

"KBS 시절 '한국의 미' '한국의 재발견'을 하면서 우리 민속이 일제강점기에 다 사라진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모이면 무슨 일 생길까 봐 민속놀이를 금지한 것이다. 전통의 명맥을 되살린다는 사명감으로 인간문화재도 많이 발굴했다."

2005년 한국을 찾은 명성황후 시해 주범의 후손 2명이 홍릉(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에서 사죄하는 모습./ 정수웅 감독 제공
―그러다가 일본에 갔나.

"일본 다큐 전문 회사에서 내 작품을 보고 제의를 해왔다. 영상인류학을 하라고. 만약 그 길로 죽 갔으면 나는 아프리카나 남미 원시부족들 사이를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살면서 역사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2년 반 만에 돌아온 것이다."

―명성황후, 무용가 최승희, 태평양전쟁 최후의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등 한·일 관계사의 주요 인물을 조명한 작품도 많다.

"나는 역사를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기 위해 캄차카에 억류된 북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났고, 압록강에서 만나는 이산가족들을 보여줬다. 명성황후 역시 범죄를 저지른 후손들을 찾아내 사죄하는 쪽으로 방송을 만들었다."

―2005~2006년 당시 한·일 양국에서 모두 화제가 됐었다.

"그때 일본 공영방송인 NHK에서도 방송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조선일보에서 보도가 나갔다. 그리고 그 기사를 일본 우익이 읽었다. 계약까지 끝난 상태였는데 NHK 불방이 결정됐다. 그때 총리가 바로 얼마 전 다시 총리가 된 아베 신조였다. 우익 성향의 인물이 다시 총리가 됐으니, 한·일 양국의 역사를 직시하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가 됐다."

―도고 시게노리라는 일본 외상에 대한 다큐도 있다.

"그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고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하도록 설득한 태평양전쟁 시절 일본의 외상이었다. 이 사람이 과거 조선에서 납치되어 건너간 도공의 후손이었다. 7세 때까지 박무덕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불렸다. 일본 군부는 끝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했기 때문에 만약 일본 왕실이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독일처럼 일본도 분할통치에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고…. 전범국가 일본을 살려준 것이 한국 사람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다 찾아내나.

"다큐멘터리스트는 긴 호흡으로 하는 거니까 가능하다."

―방송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해 왔나.

"방송국에서 편성이 되기 전에 미리 받지는 않으니까 여기저기 꾸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만 방송해 가지고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이번 스마일로드도 일본 NHK에 편성되고 나면 빚도 좀 갚고 다음 제작비로도 써야지."

정수웅 감독이 지난 21일 일본 NHK에서 보내온 ‘스마일 로드’프로그램의 방송 내용을 점검하고 있다. / 허영한 기자
기획·촬영에 대본도 직접 작성
고희에 글쓰기 아주 고통이다… 하지만 내가 보고 들은 걸 누가 대신해 쓸 수 있겠나


"다시 태어나도 다큐 PD 할 것"

그는 혼자서 기획하고 촬영하고 대본 쓰고 편집한다. 어린 시절, 13세의 정수웅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세 살 때 세상을 떠난 부친에 대해 그는 기억이 없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갔다 돌아올 때까지 그의 친구가 되어준 것은 영화 필름이었다. 당시 밀짚모자 둘레에 영화 필름을 두르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는 틈날 때마다 이를 모아서 갖고 있었다. 정 감독은 "필름을 풀어 돋보기를 대고 반대편 벽에 영사해보기도 하고 하늘에 비춰보기도 하며 혼자 '시네마 천국'을 살았다"며 "아마 감독으로 살아갈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필름에 얽힌 첫 기억이다"고 했다.

―일흔 나이에 이 모든 기획서와 대본을 직접 쓴다. 글 쓰는 것, 어떤가.

"아주 고통스럽다. 하지만 반드시 직접 써야 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직접 안 썼는데 일본 가서 한국은 방송다큐 작가가 별도로 있다고 했더니 '그러면 감독은 뭘 하냐'고 묻더라. 일본 다큐 감독들은 모두 자기가 직접 대본을 쓴다."

―다큐멘터리에 방송 작가가 있으면 뭐가 문제인가.

"프로그램이 천편일률적으로 된다. 해설들이 감성에 호소하고 아름다운 말만 감칠맛 나게 한다. 대신 다큐멘터리의 생명인 '리얼리티'가 깨져 버린다. 우툴두툴 문장이 거칠어도 대본은 직접 써야 한다. 자기가 체험한 세계, 눈으로 본 세계인데, 누가 대신 쓸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만든 작품의 내레이션들은 모두 내 손으로 쓴 것들이다. 요즘 젊은 PD들도 직접 쓰기 시작했다"

―글 솜씨가 좋아야 할 것 같다.

"아니다. 대학 졸업했을 정도의 실력이면 다 쓸 수 있다. 좀 거칠어도 성우가 읽으면 괜찮다. 내 경우는 젊을 때 책을 많이 읽은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나는 성균관대 국문과에 다니다 중퇴하고 서라벌예대 방송과로 옮겼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매일 시체 운반일을 할 때 사람이 항상 죽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기 시간에 책을 읽었다. 4년 동안 매일 반복된 일이었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긴 시간인지. 카뮈의 '이방인'은 10번 읽었다."

―다큐멘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다큐멘터리는 시대를 응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책무다. 다큐는 기록자이기 때문에 만약 신이 있다면, 바로 밑에 있다고 본다. 기록자의 삶은 신성한 일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부럽지 않다. 사실을 작위 없이 카메라로 포착해 영상을 기승전결로 편집해 사실 속에 있는 진실을 끄집어 내어 전달하는 행위, 멋지지 않은가."

―당신의 작품에 대해 '정서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도 있더라.

"그것은 영상 휴머니즘이다. 우리가 피사체에 카메라를 들이댈 때 결코 이쪽에서 저쪽을 일방적으로 찍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것은 나를 찍는 것이 아닌가. 나 역시 저쪽 피사체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촬영을 하면서 내 목소리가 들어가면 안 되니까 나는 인터뷰 대상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끊임없이 눈으로 대화를 한다. 어떤 때는 나와 카메라와 인터뷰이가 일체화되는 체험을 한다."


제작비? 로또 한다, 하하
가끔은 빚내서 제작했다 방송 편성되면 그때 갚아… 韓中日 대하 역사물 준비중
나 혼자론 역부족인데…


"한·중·일 아우르는 역사 다큐 만들 것"

오랫동안 한·일 관계에 천착해온 그는 "한·중·일이 격동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아베 내각이 보여주는 과거 회귀적인 모습 역시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는 필생의 작업으로 '동아시아 격동 20세기-그 현장을 가다'(18부작) 기획을 다듬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 민중의 토속적인 세계를 보여줬고, 분단으로 인한 민족사의 통한도 다뤘고, 일본의 그릇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해왔다. 그러나 한·중·일 삼국은 여전히 과거사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빚고 있다.

"나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힘겨운 과거사가 역설적으로 세 나라를 결속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먼저 과거사를 직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10년 전부터 동아시아 100년을 돌아보자고 주장하는 이유다."

―'동아시아 격동 20세기'는 무엇을 하자는 말인가.

"20세기는 인류가 처음 맞은 필름의 시대였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수많은 증거 자료가 널려 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는 너무 방대할뿐더러 지금처럼 그냥 흩어져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 이것을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형태로 잡아줘야 한다. 이미 혼자서 라이브러리도 찾아놨고 18부작으로 계획을 잡아서 영국 BBC를 비롯해 곳곳에서 영상 자료 리스트를 받아 놓았다. 이 리스트를 보고 대본에 따라 필요한 자료들을 사와야 한다."

―구입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로또 열심히 하고 있다(웃음). 나 혼자 되는 것도 아니고, 일개 방송국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국가적 사업으로 생각하고 우리 시대에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중심을 잡아놔야 한다. 이 작업을 일본이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지난 20세기 수난의 시대를 역으로 이용해 다이너미즘을 끄집어 내야 한다."

 

자기짱 다큐멘터리 감독 정수웅(70)...  ‘그리스 석상의 미소가 신라 반가사유상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그 미소는 어떤 루트로 전파된 것일까.’ 젊은 시절 간직했던 궁금증이자 화두 하나를 붙잡고 탈레반이 정부군과 대립하고 있는 지역으로 현지인 가이드 한 명만 데리고 들어왔다. 그가 걷다 잠시 쉬는 이 인더스 강변의 마을을 신라의 승려 혜초가 지나갔고,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머물렀으리라.... '스마일로드(미소의 길)'가 KBS에서 2009년 방송을 타며 호평을 받았다.

 

'송화강, 한인들의 숨결'(1990) '노예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1993) '잃어버린 50년, 캄차카의 한인들'(1995) '세기의 무희 최승희'(2002) '110년 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2005) 등 민족사의 애환과 한·일 관계의 비사(秘史)를 다룬 선 굵은 다큐멘터리 40여편을 만들었다.

 

 지금은 '하늘이 내린 역동의 리듬 세마치, 신한류를 펼치다'를 만들고 있고, '독도, 일본의 음모는 어떻게 이뤄졌는가'도 취재 중이다. 싸이 '강남스타일'도 알고 보면 우리의 삼박자 리듬 세마치에서 나오는 춤이다. 외국에는 없는 신명이 거기에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88올림픽 개·폐회식 영상총감독을 맡았다. 그때 백두산 영상을 주최국 국기가 게양될 때 쓰고 싶은데 KBS에도 NHK에도 낡은 필름밖에 없었다. 직접 들어가 찍어야 했다. 그런데 갈 방법이 없었다."... 베이징까지만 허락된 여권이어서 나머지는 내가 해결해야 했다. 결국 백두산 천지까지 올라가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로도 4번이나 더 백두산에 올랐다. 이듬해 '송화강, 한인들의 숨결'을 찍었고, 발해 유적지를 실물로 확인하는 성과도 올렸다. 그때 역사학자들이 꽤나 부러워했다."

초창기부터 그가 찍은 다큐는 항상 화제가 됐다. KBS PD로 일할 때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한국의 미'나 '한국의 재발견' 시리즈 중 수작(秀作)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1977년 KBS 5년차 PD 시절, 사람이 죽으면 풀 무덤으로 덮어뒀다 유골만 추려 다시 매장하는 전남 진도의 장례 풍습을 담은 작품 '초분(草墳)'을 찍었다. 그런데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낙후된 시골의 모습이 선진 조국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필름이 해외로 나가 다큐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든 하프상(賞)' 국제상을 수상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해외에서 일을 내자 부랴부랴 국내에서도 다시 방송이 결정됐고, 한국방송대상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불교문화의 원류를 찾아서'(1978) '비구니의 세계 석남사'(1979) '신라의 신비 대왕암'(1980) 등의 작품을 통해 내리 4년 연속 방송대상을 수상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잘나가던 그는 1982년 홀연히 KBS를 떠난다.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황강에서 북악까지'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전기 필름을 연출하라는 지시를 받아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사표를 썼다.

 

그는 필생의 작업으로 '동아시아 격동 20세기-그 현장을 가다'(18부작) 기획을 다듬고 있었다.

- 77년 필름 '초분'을 보면 무척 아름답다. 유골을 모아 매장할 때 무덤가의 엉겅퀴 꽃에 나비가 한 마리 내려와 한참을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오던데, 어떻게 그런 장면을 잡아냈나...."골든 하프상 심사위원들로부터 '100만달러짜리 컷'이라는 소리를 들은 장면이다.

 

한 사람의 천재(용기)가 10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생각난다...ㅎㅎㅎ...^-^

 

- 2013년 1월27일 일요일...수산나 -

 

 

남한산성 성벽 위 담쟁이 1

 

남한산성 성벽 위 담쟁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