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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Why] [김윤덕의 사람人] 토니 블레어 前 총리의 아내 셰리 블레어 아시아여성대학(AUW) 명예총장/장미 3장

 [Why] [김윤덕의 사람人] 토니 블레어 前 총리의 아내 셰리 블레어 아시아여성대학(AUW) 명예총장

조선일보/사회 사람들/김윤덕 기자

입력 : 2013.02.02 03:03

영국의 힐러리 "딸을 교육시키는게 사회적으로 더 이득"
- 여성은 수익의 90% 가족에 투자
남성 상당수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유흥에 흥청망청 돈 낭비
반면 여성은 자녀 교육에 헌신하죠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 유명하잖아요
- 아시아 낙후지역 여성 리더 양성
파키스탄 등 13개국 541명 재학
올해 첫 졸업생 배출하는데 이들이 모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가족·마을·사회를 바꿀 겁니다
- 불우한 어린 시절
아버지 외도로 싱글맘이 된 어머니 그 때문에 외할머니집서 자라…
노동자 의식 강했던 외할머니가 약자 도와야 한다는 신념 심어줬죠
- 여성들 성공하고 싶다면
나의 모든 성취는 희망에서 비롯…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좋은 남자 만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신의 성공 지원할 남자 찾으세요

'영국의 힐러리', '레이디 맥베스'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이 여인은 셰리 블레어(Blair·59)다. 1997년부터 10년간 영국 총리를 지낸 토니 블레어의 아내.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공관에 입성할 때부터 2007년 퇴임할 때까지 영부인 셰리는 힐러리 클린턴만큼이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내조하는 여인이 아니어서다. 영국 왕실의 법정변호사(Queen's Counsel)로 남편 수입의 3배를 벌어들였던 그는 "나의 직업은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변호사"라며 토니 블레어가 총리직에 오른 지 일주일 만에 변호사 업무에 복귀했다. 대 테러법 강화에 반대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등 총리 남편의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했다.

거침없는 입담만큼이나 구설에도 올랐다. 화려한 의상과 헤어스타일, 대중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그를 '셰리 앙투아네트'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누구보다 열정적인 페미니스트이며,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라는 점이다. 2008년 '셰리 블레어 여성재단'을 설립한 그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한다. 낙후된 아시아 13개국 여성들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아시아여성대학(Asian University for Women)'의 명예총장으로도 맹활약 중이다.

지적장애인들의 스포츠 축제인 '2013 평창스페셜올림픽'에 초청돼 한국에 온 셰리 블레어를 지난달 31일 만났다. 그는 화려한 외모와 달리 명랑하고 수다스러운 '아줌마'였다. "한국은 월등한 품질의 컴퓨터와 휴대폰을 생산해 글로벌 시장을 석권했지요. 스티브 잡스는 원통해할 일이지만요, 하하!" IT의 발전이 빈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에 대해 열변하는 대목이었다.

여성을 가르치는 게 중요한 이유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한 평창스페셜올림픽은 어땠나?

"산 중턱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축제였다. 눈 덮인 계곡이 환상적이더라.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는데, 그중에서도 발레와 마술 공연이 좋았다. 마술사(이은결)가 무척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물론 그보다 감동적인 것은 장애인 선수들의 경기였다. 정말 스페셜 했다."

2007년 토니 블레어 총리가 두 번째 임기를 마친 뒤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공관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 블룸버그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공관)를 떠난 뒤에도 여전히 바쁜 것 같다.

"속도를 줄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된다(웃음)."

―아시아여성대학(AUW)의 명예총장으로 일하게 된 계기가 있나?

"미국 변호사이면서 교육자인 카말 아마드가 2008년 내게 명예총장(Chancellor)직을 제안했다. 그의 모국인 방글라데시에 아시아 빈곤국 여성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의 사명감에 끌렸다. AUW에 모인 여성들은 그의 가족 혹은 지역에서 가장 처음 대학에 가는 여성들이다. 나도 우리 집안에서 가장 처음 대학에 간 여성이라 교육의 중요성, 그것의 캐스케이드(파급) 효과를 잘 안다. 우리 교육의 목적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critical thinker)을 길러내는 것이다."

―올 초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 '남자아이를 교육하는 것보다 여자아이를 교육하는 것이 더 위대하고 장기적인 이득을 가져온다'고 썼다.

"나도 아들 3명과 딸 1명을 키웠다. 그런데 이런 연구가 있다.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은 투자를 하고 수익을 거두게 한 뒤 그 수익을 활용하는 행태를 조사했더니 흥미롭게도 여자들은 수익의 90%를 가족을 위해 사용했다. 남자들은 수익의 얼마를 가족에게 투자할 것 같나?"

―10% 정도?

"똑같은 질문을 캐나다 사람에게도 했는데 그는 1%라고 하더라(웃음). 연구결과에 따르면 남자들은 수익의 30~40%만 가족에게 투자한다. 물론 좋은 남자들도 있지만, 나의 아버지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유흥을 즐기는 데 돈을 낭비하는 남자가 여전히 많다. 이런 결과만 봐도, 여성, 어머니를 교육하는 게 자녀들에게 큰 자산(asset)이 된다. 교육받은 여성은 교육의 위대한 가치를 자녀와 이웃에게 전파한다. 한국만 해도 교육받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더 열심히 교육하지 않나? 그래야 남성이 여성을 동등한 파트너로 여기고, 좋은 남편이 되려 노력한다."

―초등학교나 중학교가 아니라 왜 대학교를 세웠나?

"초등교육은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한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는 숙련된 전문가와 리더가 필요하다. 그들은 고등교육을 통해 양성될 수 있다. 어떻게 인구의 절반이 고등교육의 기회를 잃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나?"

―2008년 설립돼 13개국 여성 541명을 교육하는 AUW는 올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고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는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여학생 1명과 파키스탄에서 온 여학생 2명이 있었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는데, GDP·행복 지수·종교 분쟁 등 30개에 달하는 주제를 가지고 거의 매일 영어로 토론하는 훈련을 시켰더니 그해 학교 토론대회에서 우승해 우릴 놀라게 했다. 캄보디아에서 온 여학생은 처음 왔을 때 너무 주눅이 들어 있어 큰 소리로 말하는 훈련부터 시켰는데, 여름방학에 집에 가면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 데다 질문이 많아졌다고 식구들에게 구박을 받았다더라(웃음). 재학생 중에 스리랑카의 타밀족과 싱할라족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오랜 적대 관계를 갖는 부족들이지만, 두 학생은 서로 허물없는 우정을 쌓았다. 그런데 기말고사 중에 두 부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전에는 부족 간 쟁투에 의문을 갖지 않았던 두 학생은 '도대체 왜 싸우는 거지?' 고민하게 됐고 그때부터 화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폭력 대신 같은 인간으로서 우정을 쌓게 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며, 방학 때마다 자기 마을로 돌아가 캠페인을 한다. 자랑스럽지 않은가?"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13개국의 여성들을 교육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아프가니스탄 학생들에게 탈레반의 죄악에 대해 얘기하면 탈레반은 나쁘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해 난감한 적이 많았다(웃음). 아주 어릴 때부터 세뇌받은 고정관념, 왜곡된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게 가장 어렵다. 현실을 직시하는 눈, 평등에 대한 가치와 정의감,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결국 교육의 힘이다."

―'셰리 블레어 재단'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가?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다. 글로벌 멘토링, 휴대폰 보급, 재정 지원을 통해 여성 사업체를 발전시킨다. 그것이 결국은 그 사회, 그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킨다. 특히 IT 지원이 중요하다. 인터넷과 휴대폰은 팔레스타인부터 스위스까지 연결할 수 있다. 제과점을 차리고 싶다면 런던 우리 사무실에 전화해 사업계획을 세울 수 있다. 남녀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없는 무슬림사회에서 인터넷은 아주 유용하다."

총리의 아내? 내 직업은 변호사

셰리 블레어가 가난한 여성들의 삶과 인권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건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이다. 2008년 펴낸 자서전 '나 자신을 말한다(Speaking for myself)'에는 항구도시 리버풀에서의 유년기가 묘사돼 있다. 아버지 토니 부스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영화에서 리버풀의 바보 역을 맡아 유명해진 배우다. 어머니도 배우였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면서 싱글맘이 된다. 생계를 위해 피시 앤드 칩스(fish & chips) 가게에서 일해야 했던 어머니 대신 셰리와 여동생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여덟 살 때 이미 여성의 경제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교육을 통해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독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고 했다. 다행히 셰리는 월반할 만큼 똑똑한 소녀였고 투지도 강했다.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사법시험을 거쳐 영국 변호사의 상위 10%만 해당하는 왕실 법정변호사(QC)에 발탁되는 입지전적 삶을 이어간다.

―당신은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여성이다. 광부 남편을 둔 외할머니 때문에 나는 열여섯 살에 노동당에 가입했다. 기회 평등에 대한 신념과 사회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외할머니가 심어주셨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둘 다 열네 살에 학업을 포기했다.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있었다면 삶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더러 자식 4명을 키우면서 커리어도 지속하는 게 대단하다고 말하는데, 나의 어머니가 돈도 없이 우리를 키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성에게 교육과 경제적 능력이 절실한 이유다."

―어려운 여건에서 어떻게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변호사라는 직업을 얻을 수 있었나?

"외할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다. 학교 공부는 나의 꿈을 성취해나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에게 '너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선생님도 아무도 없었다. 가끔 장애물을 만나긴 했지만 우리가 나아가는 힘은 꿈이지, 장애물이 아니다."

―여성으로서 차별당한 경험은 없는가.

"졸업하고 법률사무소에 들어갈 때 여성은 매우불리했다. 여자는 임신하면 직장을 그만둘 테니 남자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절이다. 변호사 중 여성은 10%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나는 법조계에 인맥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해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다 괜찮다 잘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총리 공관에서의 10년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나와 내 아이들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남편이 퇴임할 때까지 변호사 일을 계속하면서 늦둥이까지 낳은 건 행운이었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의 부시, 클린턴 대통령 등 세계의 지도자들도 만났다. 나는 지금도 영부인(권양숙)이 선물한 귀고리를 보물처럼 간직한다.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영접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는데, 검은 드레스와 베일을 쓰고 교황청으로 입장하는 모습을 천국에 있는 외할머니가 보면 매우 자랑스러워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웃음)."

―토니 블레어는 20세기 가장 젊은 영국 총리인 데다 미남에 달변이라 인기가 많았다. 남편으로서는 어땠나?

"총리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총리가 되기 전에는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칼같이 들어오는 성실한 남편이고 아빠였다. 총리가 된 뒤에는 24시간 일하는 직업이어선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뒤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느라 늦었어' 하면 바가지를 긁을 수 없었다. 얼마나 절묘한 변명인가."

―10점 만점에 몇 점을 주겠는가?

"(1980년) 결혼한 이후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매우 동등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내 인생에 진정한 지지자(real supporter)다. 점수를 높이 줄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다.

"민주주의 국가의 언론이 그렇듯이 우리 부부에게도 언론은 친절하지 않았다. 당신이 영국 날씨를 불평하듯이 토니 블레어는 언론에 대해 자주 불평했다. 남편은 20세기의 가장 젊은 영국 총리였고, 나는 직업을 가진 여자이니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맨들이 끔찍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미셸 오바마 미국 영부인에게 '뒷자리에 앉는 법을 배워야 한다(learn to take a backseat)'는 충고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총리 부인이 되고 나서도 일을 계속한 당신과 달리 미셸은 직업을 포기하고 영부인 역할에만 전념했다. 불만스럽지 않은가?

"미셸은 매우 훌륭하게 퍼스트레이디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수많은 행사와 사람들이 그녀를 기다리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나도 총리의 아내였지만 영국에는 미국처럼 수많은 주(state)가 없다. 게다가 미셸은 세계 전역에 리더십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이다."

―힐러리 클린턴과는 오랜 친분을 유지해온 것으로 안다.

"그녀는 나의 진정한 멘토이자 친구다. 내가 총리 부인이 되었을 때 힐러리는 이미 3년차 영부인이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능숙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자기와 맞지 않는 타입이라고 해서 얼굴을 붉히는 여성이 전혀 아니었다. 영부인이었을 때는 일하지 않았지만, 그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를 띤 장관으로 눈부신(brilliant) 활약을 했다. 존경할 만하다."

―남편의 경제력에만 의지한 채 집에서 아이만 키우는 여성을 '여미마미(yummy mummy)'라고 비판한 것이 논란이 됐다.

"아, 그건 정말 왜곡된 보도였다. 그 때문에 영국 전체가 나를 들볶았고 나는 고문(torture)을 당했다(웃음). 아이 4명을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엄마의 소임(motherhood)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문제는 엄마 역할과 자신의 일을 병행하는 것이 굉장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엄마를 버렸을 때 우리는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아무리 좋은 남편이라도 그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좀 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여성에게 교육과 재정적인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싶었다."

―셰리 블레어는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강한 여성'의 상징이다. 젊은 여성들에게 격려의 한 말씀 해달라.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쟁취할 기회를 피하지 말라. 네 삶에서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해봐라. 타협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믿어라.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너를 동등하게 대하고 너의 성공을 지원할 남자를 찾아라."

 

자기짱   토니 블레어 前 총리의 아내 셰리 블레어 아시아여성대학(AUW) 명예총장...'영국의 힐러리', '레이디 맥베스'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이 여인은 셰리 블레어(Blair·59)다. 1997년부터 10년간 영국 총리를 지낸 토니 블레어의 아내....영국 왕실의 법정변호사(Queen's Counsel)로 남편 수입의 3배를 벌어들였던 그는 "나의 직업은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변호사"라며 토니 블레어가 총리직에 오른 지 일주일 만에 변호사 업무에 복귀했다...거침없는 입담만큼이나 구설에도 올랐다. 화려한 의상과 헤어스타일, 대중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그를 '셰리 앙투아네트'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8년 '셰리 블레어 여성재단'을 설립한 그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한다. 낙후된 아시아 13개국 여성들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아시아여성대학(Asian University for Women)'의 명예총장으로도 맹활약 중이다....^-^

"우리 교육의 목적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critical thinker)을 길러내는 것이다."... 칼럼에 '남자아이를 교육하는 것보다 여자아이를 교육하는 것이 더 위대하고 장기적인 이득을 가져온다'고 썼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세뇌받은 고정관념, 왜곡된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게 가장 어렵다. 현실을 직시하는 눈, 평등에 대한 가치와 정의감,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결국 교육의 힘이다."

'셰리 블레어 재단'에서는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다. 글로벌 멘토링, 휴대폰 보급, 재정 지원을 통해 여성 사업체를 발전시킨다.

"졸업하고 법률사무소에 들어갈 때 여성은 매우불리했다. 여자는 임신하면 직장을 그만둘 테니 남자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절이다. 변호사 중 여성은 10%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나는 법조계에 인맥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해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다 괜찮다 잘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힐러리 클린턴- "그녀는 나의 진정한 멘토이자 친구다. 내가 총리 부인이 되었을 때 힐러리는 이미 3년차 영부인이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능숙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자기와 맞지 않는 타입이라고 해서 얼굴을 붉히는 여성이 전혀 아니었다. 영부인이었을 때는 일하지 않았지만, 그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를 띤 장관으로 눈부신(brilliant) 활약을 했다. 존경할 만하다."

젊은 여성들에게 격려의 말-"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쟁취할 기회를 피하지 말라. 네 삶에서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해봐라. 타협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믿어라.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너를 동등하게 대하고 너의 성공을 지원할 남자를 찾아라."

- 2013년 2월5일 화요일 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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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장미의 요크가와 붉은 장미의 랭카스터가가 왕권을 놓고 30년간 전쟁...결국 랭카스터가의 핸리튜더가 왕권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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