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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1] 대한민국 해군 첫 군함 '백두산호' 무장/6.25 전쟁 3장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1] 대한민국 해군 첫 군함 '백두산호' 무장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한국학 

입력 : 2012.03.15 23:13 | 수정 : 2012.03.19 16:02

1949년 3월 2일자 미국 뉴욕타임스 1면 특종은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이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했다는 기사였다. '애치슨라인(Acheson Line)' 공포 열 달 전이었다. 그해 6월 주한미군은 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철병(撤兵)을 단행하면서 국방 원조를 약속했다. 24일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은 긴급 담화를 발표했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상 대비가 필요하다. 해군은 급속한 시일 내에 최소한 순양함을 필두로 구축함·잠수함 및 각종 보충함 등 약 7만 톤의 함정은 절대 보유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점 미국에 적극 원조를 요청하는 바이며, 또 그 정도의 원조는 획득할 것을 확신한다." 1950년 1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Mutual Assistance Agreement)이 발효되었지만, 6·25전쟁이 터지기까지 변변한 원조는 없었다.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3월 16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에서 우리나라 해군 첫 군함인 백두산호에 구경 3인치, 포신 50인치의 대해·대공 양용(兩用)포를 탑재하는 모습.
그런 가운데 1950년 3월 16일 하와이에서 낭보가 날아왔다. 우리 해군 장병이 십시일반 박봉을 털어 구입한 백두산호가 구경 3인치, 포신 50인치의 대해·대공 양용(兩用)포를 탑재하는 등 무장을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4월 11일 대한민국 해군 1호 전함이 진해 해군기지에 입항함으로써 우리 해군은 군함 없는 해군의 한을 풀었다. 6월 25일 전쟁이 터진 날 밤 부산 앞바다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하던 백두산호의 탐조등에 북한 인민군 육전대 1000여명을 태운 수송선이 걸렸다. 함포가 불을 뿜었고 적함은 수장되었다.

그때 해군 장병과 손원일 제독이 보여준 미우주무(未雨綢繆·비가 오기 전에 둥지의 문을 닫아 얽어맨다)의 혜안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도 인천상륙작전도 그리고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다. "바다에는 미래가 있다.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이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1927년 상하이 부둣가에서 18세 청년 손원일이 품은 웅지가 우리 앞길을 비추는 등대로 다가서는 오늘이다.

 

 

 

알라뷰   해군 장병과 손원일 제독이 보여준 미우주무(未雨綢繆·비가 오기 전에 둥지의 문을 닫아 얽어맨다)의 혜안...1950년 3월 16일 하와이에서  우리 해군 장병이 십시일반 박봉을 털어 구입한 백두산호가 구경 3인치, 포신 50인치의 대해·대공 양용(兩用)포를 탑재하는 등 무장을 마쳤다는 낭보가 들어왔다...^-^

 

1950년 4월 11일 대한민국 해군 1호 전함이 진해 해군기지에 입항함으로써 우리 해군은 군함 없는 해군의 한을 풀었다...^-^

 

 십시일반 박봉을 털어 구입한 첫 군함 백두산호가 자랑스럽다...ㅎㅎ...^-^

 

- 2013년 2월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오후 4시...수산나 - 

 

 

1950년 6.25 전쟁

 

6.25 전쟁의 전개

 

6.25 전쟁 중요일지